혁명 주체 세력 안에 장도영의 처지를 동정하는 장교들은 몇 있었으나 그를 지지하거나 충성을 맹세할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장도영 자신도 박정희와 김종필의 독주에 불평을 할 정도였지 지지 세력을 규합할 권력 의지가 없었다. 실권 없는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은 조기 계엄 해제, 조기 민정 이양, 과격한 농어촌 고리채 정리의 완화, 무리한 부정 축재 처리의 완화 등을 주장하는 등 온건한 조치를 강조했으나 그때마다 청년 장교들에 의하여 무시당했다. 6월8일 그는 박정희 부의장을 불러 “나는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최고회의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맡아야 합니다.” 장도영은 그러고는 중앙청 총리실에서 기거하면서 내각수반직만 수행하기 시작했다. 총구로써 정권을 탈취한 군인들은 차츰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논리가 적용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강 그 기점은 5월18일이었다. 이석제 중령은 정권 탈취가 일단락된
날의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5월18일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육군본부 뜨락을 산책했다. 나뭇가지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풀 한 포기의 생명력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산천초목이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없었다> 새로운 정권도 새로운 생명체처럼 새로운 생리와 조건을 가진다. 18일까지가 정권을 물리적으로 뒤엎는 혁명의 시간대였다면, 그 뒤로는 국가 관리의 시간대였다. 혁명의 시간대엔 돌파력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관리의 시간대에선 관리 경영 능력이 필요했다. 김종필, 이석제, 오치성, 장경순 같은 장교들이 그런 관리 능력의 소유자로서 달라진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해간 사람들에 속한다. 머리는 없고 용기만 있었던 장교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도태되었다. 대한민국을 접수하여 장관직에서 경찰서장 자리까지 주요 직책을 거의 몽땅 차지한 군인들에겐 또 다른 경쟁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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