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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3) “10년 걸릴 일들을 10일 동안에 해놓으니…”

淸山에 2011. 3. 31. 09:41

 

 
 
“10년 걸릴 일들을 10일 동안에 해놓으니…”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3)/ 美유학파 혁명 장교들,
낙후된 공무원 사회에 선진화된 행정 기법을 전수하다
趙甲濟   
 
 

 

 
 
早期 민정 이양론의 대두
 
 AP통신은 6월1일 혁명정부가 ‘오는 8월15일을 전후하여 정권을 민간 과도정부에 이양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고 보도하여 박정희·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혁명 주체들을 흥분시켰다. 다음날 최고회의 대변인인
元忠淵(원충연) 보도국장은 이 외신 보도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권이양은 사회 각 분야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단행되어 북괴의 경제력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후가 될 것이다>
 
 沈興善(심흥선) 공보부장도 기자들에게 “현 내각이 바로 과도정부”라면서 “민간인으로 구성되는 또 다른 과도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윤보선 대통령은 월례 기자회견에서 정권 이양이란 상당히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우선 “조속한 기간 내에 정권을 민간 정부에 이양할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프랑스 드골 헌법을 참고로 해볼 만하며 양당제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윤 대통령은 또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악을 電光石火(전광석화)와 같이 제거하는 것을 국민들이 쌍수를 들어 지지하는 줄 믿는다”면서 “군정 기간에 공산당을
깨끗이 청소해 주어야겠다”고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군사혁명에 대해서 “올 것이 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이면 10년 걸릴 일들을 10일 동안에 해놓으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명 정부는 윤 대통령의 기자 회견에 대한 불만을, 이를 보도한 기자들을 잡아넣는 식으로 표현했다. 회견 다음날 수사당국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란 제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金永上(김영상) 편집국장, 정경부 李萬燮(이만섭·뒤에 국회의장 역임) 기자가 연행되어 갔다. 6일엔 직접 취재를 했던 李振羲(이진희·문공부 장관 역임) 기자가, 7일엔 趙庸中(조용중·<연합통신> 사장 역임) 차장이 연행되었다. 이는 정권을 장기간 장악하여 국가 개조를 하겠다고 나선 혁명파 장교들이 早期(조기) 정부 이양을 요구하는 윤 대통령과 이에 동조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에 경고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서른일곱 살의 김종필 중령(그는 혁명 성공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다)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언론 앞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6월5일 오후였다.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그는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5·16 혁명 비화를 털어놓고 혁명 정책의 기조를 밝히는 등 실력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혁명 비화를 설명하면서 4·19 혁명 직후의 8기생 중심 정군 운동을 뿌리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는 “박정희, 장도영 장군은 올해 3월에 가담했다”고 하는가 하면 “특히 장도영 총장은 정보가 누설될 때마다 잘 커버해 주었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혁명의 총기획자이고 박정희는 추대되었을 뿐이란 느낌을 줄 정도였다.
 
 金 부장은 또 “혁명 공약, 초기의 포고령, 국가재건최고회의란 명칭은 내가 기초하여 박정희 장군의 수정을 받은 것이다”고 말하고, “혁명을 구상함에 있어서는 (장준하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思想界>를 많이 참고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원래는 내각을 구성할 때 45세 이하로 하려고 했었다”고 말하고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또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은 계획 경제의 단계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의 전반에 대한 30대 젊은 장교의 소신 피력은 많은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 부장은 “이번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든 자금의 총액은 860만 환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아 기자들을 웃겼다. 그는 박정희 장군이 자신의 처삼촌임을 공개하기도 했다.
 
 임시 헌법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고 장도영 의장이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박정희 부의장이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을 겸직한 것이 6월 초, 이는 장도영의 무력화를 의미했다. 새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金鐘五(김종오) 장군과 宋堯讚(송요찬) 국방장관은 박정희·김종필 세력에게 도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 주체 젊은 장교들에게는 한때 정군 대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었다.

 
 
 

 

 
 

 혁명 주체 세력 안에 장도영의 처지를 동정하는 장교들은 몇 있었으나 그를 지지하거나 충성을 맹세할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장도영 자신도 박정희와 김종필의 독주에 불평을 할 정도였지 지지 세력을 규합할 권력 의지가 없었다. 실권 없는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은 조기 계엄 해제, 조기 민정 이양, 과격한 농어촌 고리채 정리의 완화, 무리한 부정 축재 처리의 완화 등을 주장하는 등 온건한 조치를 강조했으나 그때마다 청년 장교들에 의하여 무시당했다. 6월8일 그는 박정희 부의장을 불러 “나는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최고회의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맡아야 합니다.”
 
 장도영은 그러고는 중앙청 총리실에서 기거하면서 내각수반직만 수행하기 시작했다.
 
 총구로써 정권을 탈취한 군인들은 차츰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논리가 적용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강 그 기점은 5월18일이었다. 이석제 중령은 정권 탈취가 일단락된
날의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5월18일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육군본부 뜨락을 산책했다. 나뭇가지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풀 한 포기의 생명력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산천초목이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없었다>
 
 새로운 정권도 새로운 생명체처럼 새로운 생리와 조건을 가진다. 18일까지가 정권을 물리적으로 뒤엎는 혁명의 시간대였다면, 그 뒤로는 국가 관리의 시간대였다. 혁명의 시간대엔 돌파력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관리의 시간대에선 관리 경영 능력이 필요했다. 김종필, 이석제, 오치성, 장경순 같은 장교들이 그런 관리 능력의 소유자로서 달라진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해간 사람들에 속한다. 머리는 없고 용기만 있었던 장교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도태되었다. 대한민국을 접수하여 장관직에서 경찰서장 자리까지 주요 직책을 거의 몽땅 차지한 군인들에겐 또 다른 경쟁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무식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육본 작전교육처장 장경순 준장은 전북 김제 출신인데 별명이 ‘농림부 장관’이었다. 평소에도 농촌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이 별명 때문에 그는 혁명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된다. 혁명 내각의 장관들을 뽑는 인사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오치성 대령이었다. 오 대령은 ‘농림부 장관’ 장경순을 진짜 농림부 장관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인사차 가서 이렇게 물었다.
 
 “각하, 제가 농림부 장관이지요?”
 
 “그럼 당신이 농림부 장관이 아니면 누가 장관이오.”
 
 “그러면 하루라도 소신껏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장 장관은 농림부 전 직원들을 집합시킨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시각 이전의 문제는 일체 불문에 부치기로 하였습니다. 내 전임자는 여러분들을 지금 그 자리가 최적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임명했을 것입니다. 처음 부임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인사이동을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신대로 일해 주십시오. 나하고 근무할 수 없는 사람은 딱 두 종류뿐입니다.
 
 첫째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자기가 맡은 일 이외에 대해서는 나에게 이야기하지 마시오. 남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사람은 내가 즉각 해임시키겠습니다.
 
 둘째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일도 못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식하고 무능한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농림부는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부터는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습니다.”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니 약점이 많은 공무원들은 안심하고 ‘죽자사자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장경순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이런 보고를 올렸다.
 
 “우선 농어촌 고리채를 정리해 주어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묘지 문제입니다. 논이고 밭이고 간에 묘지
천지입니다. 이래 갖고는 농사가 안 됩니다. 묘지도 이 기회에 정리해야겠습니다.”
 
 “고리채 정리는 옳은 일이지만 묘지 이야기는 잘못 꺼냈다가는 혁명 정부가 견딜 수 없을 거요.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차후에 의논합시다.”
 
 장경순은 8기 특별기 출신이자 한때 전북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는 金起鳳(김기봉) 중령을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김기봉은 군인의 눈으로 본 당시 공무원 사회의 실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공직 사회에는 대학 졸업자도 많았지만 그들이 배운 지식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정보 수집을 하여 적정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귀납적입니다. 몇 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그중 하나를 고르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행정 실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의 정책을 세워 놓고 그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은 연역적입니다. 군의 작전 계획 등 모든 계획이 연역법의 논리에서 파생된 행정 기법입니다. 민간 분야의 낙후성은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장교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선진화되어 있었던 반면에 민간 분야는 그런 행정 경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국군은 미국의 우수한 행정학자들이 모여 만든 군사 행정 기법을 전수해 이를 토대로 전쟁을 치르고 養兵(양병)을 해가던 시절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해도 일목요연하게 강조할 부분을 제목으로 뽑곤 했지만 농림부에 와 보니 온통 미사여구로 장식된 문장 속에서 무엇이 강조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타자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먹지를 밑에 받치고 쓴 복사 문건들은 바래져 무슨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타자기를 보급하고 배우도록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관들은 내각회의를 하기 전후에는 박정희 부의장에게 들러 보고를 하곤 했다. 박정희는 꼼꼼한 것까지도
따져 묻는 바람에 업무가 폭주했다. 李錫濟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 건의했다.
 
 “각하, 사소한 것들은 내각에 일임하시죠. 그 시간에 다른 큰일을 하시거나 좀 쉬십시오.”
 
 “알아. 내가 지금 업무를 파악하느라고 그래.”
 
 박정희는 착실한 학생처럼 국정을 공부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의 이런 자세는 다음해를 넘기면서 풀어지는데 그때쯤이면 국정의 흐름을 대강 파악한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때문에 죽기 전에는 국토개발 등 국정 전반을 한 손에 잡은 것처럼 환하게 파악하여 장관들의 기를 죽이곤 했었다.
 
 실정법의 질서를 무너뜨린 군사 정권이 건국 뒤 가장 큰 법률 정비를 단행하여 우리나라의 법치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는 군정을 뒷받침할 입법 활동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법령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조선총독부 시절에 쓰던 일제의 법령과 미군정 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광복된 지가 16년,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진 것이 1948년인데 자기 나라말로 된 법령집이 없다니 이게 무슨 주권 국가인가 하는 한탄이 나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일본어와 영어로 된 법률로 다스리다니…’ 하는 울분이 솟은 이석제는 즉시 개혁에 들어갔다.
 
 朴正熙 부의장에게 실정을 보고하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조선총독부의 법률로 운영해왔단 말인가.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이었던가.
통탄할 노릇이군. 도대체 국회의원과 정치가와 공무원들은 뭘 했기에…. 법사위원장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하오?”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부터라도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법령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작업이 방대할 텐데 무슨 수로 짧은 기간에 그 많은 법률을 고치고 제정할 수 있겠소.”
 
 “각하, 지금은 혁명 상황입니다. 대한민국 통치의 근간이 되는 법률체계를 제가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법령 번역 작업과 병행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일본 법령을 폐기시키고 필요한 법령을 새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각 부처에 법무실 제도를 신설했다. 이석제는 장교 시절 제대한 뒤 考試(고시)를 치려고
법률 공부를 해두었는데 그것이 이런 일대 개혁 조치로 연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