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육영수의 오빠 陸寅修(육인수·전 공화당 의원)는 5월 하순 신당동의 박정희 사저를 찾아갔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육인수는 파란 많은 삶이 동생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동생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醜女(추녀)로 태어나 남편을 내조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여자였다. 육인수는 妹弟(매제) 박정희에게 네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런 요지였다. “첫째,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북쪽으로도 막혀 있고 바다로도 막혀 있는 이 나라의 활로를 트는 데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둘째, 중공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중공업은 계열사를 많이 만들게 되므로 일자리가 많이 생깁니다. 셋째, 정치적으로 사람을 거세는 하더라도 죽여선 안 됩니다. 넷째, 舊(구)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지금 군인들만 쳐다보고 있는데 학자들을 많이 등용하십시오.” 당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이던 洪昭子(홍소자)가 이모를 찾아간 것은 5월 하순이었다. 이모 육영수는 혁명 후 스무 명 가량으로 늘어난 식구들(경비병, 운전병, 연락병 등)의 식사 등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홍 씨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이모님은 혁명 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혁명 전과 똑같은 모습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황하거나 변하는 일이 없이 이모님은 주부로서의 본분만 한결같이 지켜 나가시고 계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모, 이제 좀 처신이나 몸가짐이 달라지셔야지요. 부엌에 드나드시는 일도 삼가시고 아랫사람들에게 시킬 건 시키시고 이모님이 손수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말했어요. 이모님은 ‘이리리(육영수가 즐겨 쓰던 감탄사)? 왜 내가 달라져야 하니?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뚤어진 게 아냐?’라고 말씀하셨어요.” 육영수는 이날 홍소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우리 생활에 언젠가는 기적처럼 큰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왔단다.” 이 대목에 대해 시인 朴木月(박목월)은 자신의 저서 《육영수 여사》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이 의미심장한 여사의 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평소의 순수한 아내로서 여사의 신념이나 생활을 배경으로 풀이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나 환경 속에서도 우리 사회나 남편의 장래에 어떤 기적 같은 변화가 오게 되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영감 속에서 살아왔다는 뜻이며, 또한 그것은 남편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아내로서의 신뢰이며 그러므로 여사는 혁명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