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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0) “거사에 실패하면 저도 남편 따라 죽을 각오를 했었지요”

淸山에 2011. 4. 8. 19:58

 

 

 
 
“거사에 실패하면 저도 남편 따라 죽을 각오를 했었지요”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0)/ “이모님은 혁명 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혁명 전과 똑같은 모습이요 생활이었습니다”
趙甲濟    
 
 

 

 
 
 ‘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육영수의 오빠 陸寅修(육인수·전 공화당 의원)는 5월 하순 신당동의 박정희 사저를 찾아갔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던 육인수는 파란 많은 삶이 동생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동생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醜女(추녀)로 태어나 남편을 내조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여자였다. 육인수는 妹弟(매제) 박정희에게 네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런 요지였다.
 
 “첫째,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북쪽으로도 막혀 있고 바다로도 막혀 있는 이 나라의 활로를 트는 데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둘째, 중공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중공업은 계열사를 많이 만들게 되므로 일자리가 많이 생깁니다. 셋째, 정치적으로 사람을 거세는 하더라도 죽여선 안 됩니다. 넷째, 舊(구)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지금 군인들만 쳐다보고 있는데 학자들을 많이 등용하십시오.”
 
 당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이던 洪昭子(홍소자)가 이모를 찾아간 것은 5월 하순이었다. 이모 육영수는 혁명 후 스무 명 가량으로 늘어난 식구들(경비병, 운전병, 연락병 등)의 식사 등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홍 씨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이모님은 혁명 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혁명 전과 똑같은 모습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황하거나 변하는 일이 없이 이모님은 주부로서의 본분만 한결같이 지켜 나가시고 계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모, 이제 좀 처신이나 몸가짐이 달라지셔야지요. 부엌에 드나드시는 일도 삼가시고 아랫사람들에게 시킬 건 시키시고 이모님이 손수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말했어요. 이모님은 ‘이리리(육영수가 즐겨 쓰던 감탄사)? 왜 내가 달라져야 하니?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뚤어진 게 아냐?’라고 말씀하셨어요.”
 
 육영수는 이날 홍소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우리 생활에 언젠가는 기적처럼 큰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왔단다.”
 
 이 대목에 대해 시인 朴木月(박목월)은 자신의 저서 《육영수 여사》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이 의미심장한 여사의 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평소의 순수한 아내로서 여사의 신념이나 생활을 배경으로 풀이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나 환경 속에서도 우리 사회나 남편의 장래에 어떤 기적 같은 변화가 오게 되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영감 속에서 살아왔다는 뜻이며, 또한 그것은 남편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아내로서의 신뢰이며 그러므로 여사는 혁명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7월에 접어들자 육영수가 졸업한 배화여고 동기동창인 이종문이 동문들을 이끌고 신당동 댁을 찾았다.
 
 “혁명 나던 새벽엔 얼마나 불안했어요?”
 
 동문들이 이렇게 묻자 육영수는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거사에 실패하면 저도 남편 따라 죽을 각오를 했었지요.”
 
 동문들이 돌아갈 때 육영수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저 자신 부족한 점이 많아요. 남들이 잘못한다고 비판하는 점이 있으면 동창들이 꼭 알려주어야 해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서 부족한 점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가도록 해보겠어요.”
 
 육영수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혁명 주체 장교들끼리 경회루에서 자축 파티를 열 때였다. 박정희나 육영수나 파티 같은 행사를 싫어하여 거의 나가본 적이 없었다. 육영수는 장롱에서 몇 가지 되지 않는 옷가지를 꺼내 하나하나 몸에 걸쳐 보이며 유일한 의논 상대자인 어머니 이경령에게 물어보곤 했다.
 
 <여사는 흰 수치마를 몸에 둘러보며 어머니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이경령 여사는 웃고만 있었다. 수치마 저고리 차림은 수수하고 청초해 보였다. 파티에 나가려고 여사는 뜰로 내려서다 말고 누구를 향해서가 아니라 가족 전체를 돌아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다운….”
 
 비록 끝이 희미했지만 여사가 말하려는 뜻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다운 옷’ 이런 뜻이었다. 군인이나 장성의 아내에서 여사는 ‘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새로운 자각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육영수 여사》에서)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로는 외국 대사 부인들이 신당동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대사 부인들이 단체로 신당동을 찾아오겠다는 기별을 받고 육영수는 당황했다. 서른 평도 안 되는 집에 이들을 앉힐 의자가 모자랐다. 소파도 없는 집이었다. ‘이 일을 어쩌지?’ 하면서 고민하던 육영수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모아 왔다.
 
 “사모님, 이제 되셨습니까?”
 
 경호병이 묻자, 육영수는 마루에 놓인 의자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고 한다.
 
 “각양각색이네요. 의자 전시장인가 보네.”
 
 손님들이 오면 육영수는 박정희와 동석하지 않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일만 했다. 과자를 굽고 차를 끓이고 술안주를 마련했다.
 
 “사모님, 심부름하는 사람을 더 들입시다.”
 
 주위에서 건의를 하면 육영수는 “우리가 편하려고 혁명했나요”라고 쌀쌀하게 끊어 버리곤 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조카들을 불렀다. 육영수는 몸이 큰 외국인들이 마루를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초라한 집에서 접대를 끝내고 손님들을 보낸 뒤엔 꼭 이런 자문을 하곤 했다.
 
 “접대를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네?”
 
 “이모님, 제가 보기엔 썩 잘된 것 같아요.”
 
 “그래…그럴까?”
 
 육영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항상 되살피며 다시 생각해 보곤 만족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다. 육영수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軍人과 文人
 
 독서량이 많은 박정희는 혁명 전에도 문인들과 친했다. 시인 구상·이용상, 소설가 張德祚(장덕조)·金八峰(김팔봉) 등은 군인 박정희의 교양에 깊은 인상을 받고 대화의 상대자가 되었던 이들이다. 박정희는 이런 문인들을 가까이하면서 군인들로부터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얻으려고 했다. 시인 具常(구상)은 친구의 거사를 맞은 소감을 자전적 시로써 표현했다.
 
 <나는 5·16 아침을 어느 舞姬(무희) 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 선생님 身上(신상)에 행여나 害(해)나 없을까요?” 하고 연거푸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말 채찍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大將旗(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들을 보네’라고 읊었다.
 
 그 친구의 日本詩吟(일본시음)을 흉내내어 새벽의 漢江(한강)을 떠올리고 있었다>
 
 구상에게는 친구 박정희의 쿠데타가 ‘예상할 수 있는 충격’이었지만 많은 문인·지식인들에게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 밖의 일이었다.
 
 신라통일 이후 우리나라는 문민 통치의 전통을 이어 왔다. 약 100년에 걸친 고려 무신 통치기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런 역사적 풍토에서 대부분의 우리 민간인들은 군인이란 종류의 인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쿠데타는 무인 통치가 정상인 터키나 일본의 쿠데타와는 그런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우리 민족사의 생리에 비추어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고 그만큼 문민(또는 문인)의 저항은 극렬해진다. ‘쿠데타가 엉뚱하다’는 구상의 첫 반응은 우리 정치사에 이물질처럼 들어온 군인들에 대한 역사의 거부감, 그 조건반사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 사흘 뒤 구상은 박정희와 만나는데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란 자전시집에서 이렇게 썼다.
 
 <그와 마주앉은 것은 5월19일 저녁,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한 방, 그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거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洋食卓(양식탁)의 매너도 모르는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얼핏 들으면 漫談(만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박정희는 구상을 최고회의 의장 상임고문으로 내정하고는 친지들을 통해서 설득했으나 구상은 <경향신문> 도쿄 특파원을 자청했다. 떠나기 직전 만난 두 사람은─.
 
 <궁리 끝에 신문지국 간판을 메고 유학의 길에 오르듯 ‘도오꼬오’로 향했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理想國家(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비행窓(창)으로 구름밭을 내다보며 그 현실로부터의 격리를 확인하면서도 그와의 작별 때 대화가 내 뇌리를 후벼팠다>
 
 구상은 그 뒤 신문사와 천주교회와 관련된 어떤 사건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엄청 한다. 자전시에 이렇게 쓸 정도이다.
 
 <내가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교회의 암흑면을 체험하게 된 것은 내 영혼의 치명상이었다. 見月忘脂(견월망지)! 라는 佛道(불도)문자를 되외우고 되씹고 되새겨도 그 더러운 司祭(사제)의 손에서 聖禮(성례)의 秘義(비의)를 용납할 수 없었고 도처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당들이 회칠한 신의 무덤으로 보였다>
 
 박정희는 구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 사건을 화제로 삼는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왼쪽 뺨을 치면 오른쪽 뺨을 내밀어 대라고 가르치셨는데야!”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
 
 “천주학이라!”
 
 

 

 
 
 
 그는 그 말을 되뇌까리면서 더 이상 나를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자못 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때 그는 나를 현실에 이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다>
 
 엘리트 관료의 눈에 비친 군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재무차관은 李漢彬(경제부총리 역임)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첫 한국인이다. 그는 재무부 예산국장 시절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5·16을 만났다. 귀국 후 승진하여 군인 장관들 아래서 일하는데 많은 장교들과 강연을 통해서 親面(친면)을 익혔다. 송요찬 내각수반도 자유당 시절 이한빈으로부터 기획예산제도에 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송요찬 수반이 급히 이 차관을 찾았다. 송요찬은 이한빈이 들어오자 회의탁자 위에 넓은 브리핑 용지를 펴놓고 붉은 연필 한 자루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차관, 이제 정부 각 부에 기획조정실을 창설해야 하겠는데 그 기획조정관은 장관·차관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이 될 것이오. 각 부의 국장급에서든지 전직자라도 좋으니 가장 유능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보시오.”
 
 이한빈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망연히 앉아서 망설였다. 송요찬 수반은 “지금 바로 정해서 오늘 근무 시간 내에 발표하려고 하니 빨리 적어 보라”고 재촉했다. 이한빈은 적어 내려갔다. 金泰東(김태동), 金永周(김영주), 李喆承(이철승), 李昌錫(이창석), 姜鳳秀(강봉수)….
 
 다음날 이한빈은 인사 발표를 보고는 두 번째로 놀랐다. 자신이 써준 그대로 방이 붙은 것이다. 이한빈은 ‘참으로 혁명 정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