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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2) 민간 지식인들이 해내지 못한 경제발전을 실현한 장교 집단

淸山에 2011. 4. 12. 16:18

 

 

 
 
민간 지식인들이 해내지 못한 경제발전을 실현한 장교 집단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2)/ “군인들이 비록 경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의무감과
탐구심, 私心 없는 애국심으로 밀어붙이니 길이 뚫렸다.”
趙甲濟   
 
 

 

 
 
李洛善의 지식인 비판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혁명주체세력들이 자주 인용하던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문구가 있었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의 국가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국가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봅시다.”
 
 최고회의 의장 공보비서관 李洛善(이낙선) 중령은 국가 개조 사업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방관적인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그가 <最高會議報(최고회의보)>에 기고한‘행동하는 지식인’이란 글은 군인의 입장에서 본 한국 지식인論(론)이다. 이 글에는 군인과 文民(문민)지식인의 차이가 잘 나타나 있고, 이 차이는 박정희 시대 내내 갈등요인으로 남아 있게 된다.
 
 <행동이 없고 말만의 인간은 정원의 잡초에 불과하다
 
 救急劑(구급제)로써 5·16 즉 ‘군인에 의한 국민의 혁명’이 왔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매그루더 장군의 국군복귀명령과 그린 美 대리대사의 張勉(장면) 정부 지지 성명에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외국인의 명백한 오판에 대해서는, 진실로 이 길이 우리의 살 길이라면 과감히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그 후 인텔리는 통 말이 없다. 행동이 없다. 심지어는 반응도 없다. 흡사 인텔리는 다 죽어 사라진 것 같다. 강풍이 스쳐 정국이 무풍의 상태로 안정되니깐 사사건건 냉소적인 論旨(논지)로 일관하고 군의 실책을 동정으로 커버하는 듯하면서 裏面(이면)으로 멸시와 야유를 뒤섞어 몽매한 국민에게 이유 없는 반감을 양성케 하고서 정권 이양 시기의 단축을 위해 압력을 가한다는 형식으로만 逸走(일주)하고 혁명과업의 완수에 대하여서는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조 당파의 생리적 후예라는 정통을 잊고 일제의 暴政(폭정)에 대한 ‘민족적 레지스탕스’의 외곽운동으로서의 부정적 태도의 여운이 상금도 불식 안 된 데다가 근자에는 또 의의와 연혁을 몰각한 피상적 레지스탕스의 풍조에 휩쓸려서 혈기의 장기로써 ‘이유 없는 반항’을 신조로 삼고 현실 생활에서 늘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한다. 상대방에 일리가 있다 하여도 다른 비리와 같이 도매금으로 부정해버린다. 상대방과 공통되는 점에서 서로 타협하고 협조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소한 상이점을 확대시하여 배격하고 相撥(상발)하고 있다.
 
 인텔리가 가장 애석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한국에 태어난’ 그 자체라고들 한다. 이유인즉 변란이 많고 빈곤하며 언제나 일에 얽매어져 부자유스럽고 도저히 행복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출생의 불행’의 관념은 온갖 불만의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納得劑(납득제)로써 일상생활의 상비약이다>
 
 
 

 

 
 
 
  이낙선은 지식인들에 비교해서 군인들이 결코 능력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텔리가 그들의 희박한 지식을 과시할 때 우리 군인은 주견 있는 총명으로 답할 것이다. 그들이 기술의 기교를 앞세운다면 우리는 근면한 정열로 상쇄를 꾀할 것이다. 뇌조직의 발달에는 건전한 심신으로 대치케 하고 개인적 유능에 의한 공격에 대하여는 단체적 협동력의 위력으로 방패삼을 것이다. 만약에 인텔리가 그들의 유구한 행정적 경험으로 압박한다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화되고 숙련되고 통일된 기계적인 행정역량으로 반발할 것이다. 영감적인 재치, 임기응변의 요행성 등으로 견준다면 우리는 가상할 수 있는 각종의 상황에 대비하는 ‘주도한 계획성’과 생각하여 평가하고 다시 숙고하고 또 다시 평가하여 결론짓는 ‘반복된 연구가 주는 완전성’의 습성화로 대할 것이다. 문제는 애국심의 색채와 强度(강도)에 의한 국가적 기여의
다소에 차이를 둘 수밖에 없다.
 
 과거에 군은 많은 비난을 받아왔고 따라서 군은 비난받는 데 단련이 되어 있다. 문제는 혁명정부가 군인주동이라는 이유만으로써 유달리 받는 비난에 관한 것이다. 文尊武卑(문존무비)의 역사적 사조의 鐵鎖(철쇄)에 얽매여 이유 없이 사람과 군인을 구분하려 든다. 인텔리들이 군인과 민간인이 마치 전혀 색다른 천성을 가진 것인 양 兩者 間(양자 간)에 특수한 문제에 대한 견해가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위험하고 해로운 허위인 것이다. 영어의 인민(People)이라는 단어의 語源(어원)인 ‘Populus’라는 말의 참다운 의미는 고대 로마시대의 武裝軍(무장군)이라는 뜻이다. 군을 구성하는 개인은 국민 또는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와 인권이라는 정신과 합치되게 무기를 행사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학원 과정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비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지성인의 외침을 들어보자. ‘자유─그것이 그립거든 그 행사에 책임을 느끼는 습성을 확립하자.’ 자유─그것이 그립거든 빈곤이 주는 고통을 연대적으로 느끼는 박애심과 동포애를 확립하자. 혁명정부의 武威(무위)행사는 ‘누려서는 안 될 자유’를 억압하여 ‘누려야 될 자유’를 보호 조장하는 경우와 범위에 한정되며 ‘필요한 최소한’을 벗어날까
항상 신경을 쓰고 있다.
 
 밀폐된 연구실에도 세기의 파동은 파급한다. 인텔리들이여! 가슴을 열어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를 받아들여라. 기아가 된 사회, 설사 그가 버림받을 이유가 충만하다 하자. 半(반)부랑자가 된 사회, 걸인과 절도가 된 민족, 瀕死(빈사)의 중태에 빠져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조국이 길손에 업히어 여러분의 문전에 다달았다>
 
 
 

 

 
 
 
 박정희 의장을 주체로 하는 장교집단의 가장 특이한 점은 민간 지식인들이 해내지 못한 경제발전을 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흔히 군인과 사람을 구별하여 군인들을 경멸해온 우리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높은 비판력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추진력이었다고 이낙선은 비판하고 있다. 문민 엘리트 집단은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는 데 실패한 반면 ‘무식한’ 군인들은 성공시켰다. 이낙선은 “진짜 무식하고 무능한 쪽은 말만 앞서고 행동력이 없는 인텔리들, 바로 당신들이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군대식 구조개혁
 
 혁명 직후 상공부 장관이 되었던 丁來赫(정래혁) 소장에 따르면 부임해 보니 민간관료들이 만들어두었던 ‘중소기업금고안’, ‘석탄개발촉진안’ 등 좋은 계획서가 책상서랍에서 잠자고 있더라고 한다. 丁(정) 장관은 이런 우수한 인력을 가지고도 왜 이 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가 싶어서 그 계획서를 꺼내놓고 실천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경제개발이나 개혁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정치적인 결단과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정치와 권력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실천되지 않았던 것이다. 군사혁명은 이런 권력의 뒷받침을 가능하게 했다.
 
 정래혁(뒤에 국방장관, 국회의장 역임)은 “군인들이 비록 경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의무감과 탐구심, 그리고 私心(사심) 없는 애국심으로 밀어붙이니 길이 뚫렸다. 특히 私心없이 문제를 보니 의외로 쉽게 해결책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자유당, 민주당 시절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머리는 우수하긴 했지만 당파성과 연고주의 같은 파벌주의, 즉 사심에 휩쓸려들다가 보니까 국익을 지향하는 업무 추진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는 얘기이다. 학계에서 5·16 군사정권으로 등장한 군 엘리트를 국가 엘리트, 그 전의 지도층을 전통 엘리트라고 분류하는 것도 행동의 기준을 국익으로 삼느냐, 당파적 이해관계로 삼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5·16 주체 세력의 국익우선 의식은 이들이 특별한 애국심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일제 시대엔 나라 잃은 설움을 겪고 6·25전쟁 때는 피로써 나라를 지킨 체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리라.
 
 군인 집단이 주도한 건국·독립·혁명은 세계 역사상 前例(전례)가 많지만 (케말 파샤에 의한 터키혁명, 나세르에 의한 이집트 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등) 군인들에 의한 경제개발은 희귀하다. 경제에 대하여 문외한인 장교들이 의무감, 탐구심,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경제를 배워가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를 주도했다는 점은 연구대상이다. 정래혁 장관이 주도했던 電力(전력) 3사의 통합에 의한 韓電(한전)의 탄생 같은 구조개혁사례들을 더 소개한다.
 
 
 

 

 
 
 
 ▲農協(농협)과 農銀(농은)의 통합: 농협이 신용업무를 겸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용업무를 분리할 것인가. 이는 농협이 발족한 이후 계속되던 논쟁거리였다. 1958년에 농협에서 농업은행이 분리되었다. 그 뒤 농은은 순조롭게 발전했다. 그러나 농협은 자기자본의 부족으로 대부분의 단위 조합이 적자 경영 또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민주당 시절에 통합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농림부는 통합을, 재무부는 분리를 주장하여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치웠다. 쿠데타 성공 보름 뒤인 5월31일 정부는 ‘협동조합을 재편성하여 농촌경제를 향상시킨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6월15일 최고회의는 농협과 농은을 통합하기로 의결하고 의장 명의로 농림부 장관에게 ‘통합처리大綱(대강)’을 내려 보냈다. 그 내용도 간단명료했다. ‘농협과 농은의 자산과 부채는 통합된 신기구가 인수하며 임원 및 직원은 통합처리위원회의 의결에 의하여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쟁점이 되는 통합처리위원회 위원장은 농림부 장관, 부위원장은 재무부 차관이 되고 위원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를 임명하도록 했다. 단, 통합기한은 7월 말까지로 못 박았다.
 
 이에 따라 6월19일부터 7월1일까지 8차의 회의를 가진 통합위원회는 신농협법안과 그 시행령안을 만들어 7월3일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7월29일에 全文(전문) 176조 부칙 17조로 된 새로운 농협법안이 공포되고 8월15일에 통합된 농협이 발족했다.
 
 ▲水利(수리)조합 통폐합: 1군 사령부의 심리전 참모로서 쿠데타에 가담했던 許順五(허순오) 대령은 6월5일자로 농림부 산하의 대한수리조합연합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수리조합이란 물이 잘 들어가지 않는 논에다가 물을 대주는 사업을 하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쌀이 增收(증수)되면 그 쌀값으로써 시설비 起債(기채) 상환금 및 水稅(수세)를 물도록 했다. 혁명 당시 전국의 조합 수는 695개였다. 이 조합들이 1400억 환 이상을 들였는데도 물이 잘 들어오는 논, 즉 水利安全畓(수리안전답)은 26만 3000정보에 머물러 있었고 外米(외미)도입은 여전했다.
 
 
 

 

 
 

 許(허) 대령은 부임 즉시, 기구축소를 단행하여 부정 부패자, 무능자, 축첩자 등 250명을 해고했다. 전 직원의 26%였다. 수리조합도 경제규모에 따르기 위해서 1郡(군) 1조합 원칙을 세워 약 700개를 약 200개로 줄여버렸다. 허순오 회장은 수리조합의 활동을 규정한 법률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일제 때 만든 조선수리조합 시행령을 적당하게 응용하고 있었다. 독립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에 맞춰 새 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1962년 1월21일부터 발효된 토지개량사업법이 그것이다(수리조합은 토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민간 정치인들이 무관심하던 것을 허순오 대령 같은 군인들의 문제 의식에 의하여 많은 법률들이 개정·제정되어 법률적 식민지 상태를 벗어났다는 것은 흥미롭다.
 
 ▲중소기업은행 발족: 중소기업 금융을 전담할 은행의 설립도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그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혁명정부는 그 발상을 신속하게 실천에 옮겼다. 7월1일 우선 중소기업은행법을 공포했다. 그리고는 농협에 통폐합된 농업은행의 도시 점포를 모체로 하여 8월1일 중소기업은행을 발족시켰다. 혁명정부는 또 1961년 말 서민금융을 전담할 국민은행을 발족시켰다. 이는 한국無盡(무진) 주식회사가 중앙무진 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하여 탄생한 것이다. 농민을 위한 농협개혁, 서민을 위한 국민은행 발족, 그리고 零細(영세)상공업자들을 위한 중소기업은행 발족은 중·하류층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혁명주체장교들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산업은행에 투자업무 허용: 산업은행에 융자업무뿐 아니라 투자업무까지 부여하는 개정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政爭(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3년간 낮잠을 잤다. 최고회의는 12월27일에 이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최고회의는 또 11월1일에는 ‘한국은행 통화안정증권법’을 제정 공포했다. 한국은행법에 규정된 공개시장조작 기능을 법제화한 것이다. 5·16 직후에는 별 용도가 없었으나 1980년대부터 무역흑자 등으로 팽창되는 통화를 환수할 때 通安증권은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처럼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