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64) ‘한강의 기적’을 시작하다

淸山에 2011. 4. 14. 12:06

 

 

 
 
‘한강의 기적’을 시작하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4)/ ‘혁명가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
趙甲濟   
 
 
 

 

 
 
 丁哉錫의 브리핑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경제기획원(EPB․Economic Planning Board)이 창설된 것은 1961년 7월22일이었다. 초대 원장[副首班]으로는 재무장관에서 영전한 金裕澤(김유택)이 임명되었다. 宋堯讚(송요찬) 내각수반은 기획원 발족에 즈음한 담화문에서 ‘과거에는 경제 정책을 수립하여 그 집행을 감독하고 경제부처를 종합 조정하는 기관이 없음으로 해서 각 부처 간에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용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에 많은 저해를 받아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의 경제정책이 나열주의에만 그치고 이를 조직화하고 一元化(일원화)하는 기능이 박약했던 결함을 거울삼는 한편 경제의 합리적인 계획수립과 강력한 집행, 지속적인 조정, 계획적인 평가의 네 가지 요소가 실제 운영 면에서 반영되어 경제상황이 실질적으로 성장 발전되기를 크게 기대해 마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날 최고회의는 유원식 재경위원회 위원을 위원장으로 하고 정소영 등 네 사람의 실무자들이 만들어낸 ‘종합경제재건계획’을 발표했다. 최고회의는 건설부, 한국은행, 기획위원회에서 각각 작성한 경제개발 계획을 종합한 이 재건 계획을 발표하면서 ‘각계각층의 기탄없는 비판을 요망하며 그러한 비판을 종합하여 최종안을 작성할 것이다’고 했다.
 
 경제기획원은 신설된 것이 아니고 건설부가 확대·개편된 것이었다. 이 건설부는 지금의 건설교통부와는 관계가 없는 부서이다. 이 건설부는 민주당 시절의 부흥부가 혁명 직후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5·16 직후 군사혁명이 성공하고 있는지 미국의 반대로 실패할 것인지 아직 불투명하던 때였다.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된 朴基錫(박기석·2군 사령부 공병참모) 대령은 조사과장 丁哉錫(정재석·뒤에 상공부 장관, 교통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역임)을 불렀다.
 
 “방금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내일 아침 8시에 열리는 회의에 부흥부를 획기적으로 확대·개편하는 방안을 보고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으니 밤새에 어찌 하면 좋겠소?”

 
 
 

 

 
 

 정 과장은 내심으로 ‘이런 중요한 안건을 밤새에 만들어내라니 혁명위원회란 데가 참으로 무지막지하구나’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部內(부내)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를 해놓은 자료가 있기 때문에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대안은 곧 마련할 수 있습니다만 정식 안건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구나 사안이 중요한 만큼 간부회의에서 검토를 해야 하니 보고 일자를 하루만 연기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기는 어려우니 밤샘을 해서라도 소신껏 작성해서 브리핑으로 대신합시다.”
 
 정재석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개편안을 가지고 근처 여관에 들어가서 ‘1안 경제기획원’, ‘2안 개발부’로 정리하여 두 장의 차트로 만들었다. 민주당 정권 하에서도 중앙기획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재무부 예산국장 李漢彬(이한빈), 부흥부 기획국장 李起鴻(이기홍) 등 네 사람으로 조직된 정부기구개편소위를 가동하고 있었다. 정재석은 이 소위의 간사였다.
 
 다음날 정재석은 옛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있던 최고회의 사무실로 갔다. 들어가 보니 결전을 앞둔 작전지휘본부에 찾아간 느낌이었다. 혁명위원들은 전투복 차림에 권총을 차고 숙연히 앉아 있었고, 정면에는 낯이 익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낯선 少將(소장)이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하자 위원들은 일어서더니 혁명공약 6개항을 함께 외우는 것이었다.
 
 패기만만한 정재석 과장은 생소한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고서 부흥부 확대개편안을 열성적으로 설명해갔다.
 
 “6·25전란의 부흥과업은 일단락되었으니 이제는 정부 주도 하의 경제 개발에 착수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중앙에 강력한 개발센터가 필요합니다. 부흥부의 主(주) 기능(기획과 조정)에 재무부의 예산국과 내무부의 통계국을 흡수하여 내각 서열상 으뜸으로 격상시켜야겠습니다. 명칭도 부가 아니라 경제기획원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여러 부에 걸친 이런 대수술은 현 여건 하에서는 당장 시행할 수 없으므로 당분간 부흥부만을 개발부로 확대·개편하여 시급한 제1차 경제개발 계획부터 입안케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때 부흥부에는 기획국, 조정국이 있고, 산업개발위원회, 지역사회개발위원회, 국토건설본부를 임시기구로 거느리고 있었다. 정재석은 이런 내외 기구들을 통합하여 종합기획국, 물동계획국, 국토건설국, 지역사회국으로 재편할 것을 건의했다. 정 과장의 보고가 끝나자 장도영 의장은 사회봉을 치켜들어 치려다 말고 멈칫 옆 자리를 돌아보면서 “참, 어떻게 처리하지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그제야 정재석도 ‘이 과묵하게 생긴 소장이 바로 혁명을 주도했다는 박정희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귀관의 보고내용은 우리 혁명군의 의욕을 잘 반영한 것 같소. 건의한 대로 우선 제2안을 채택해서 경제 제일주의를 실천토록 하겠고, 앞으로 혁명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는 대로 1안의 경제기획원으로 옮겨가겠소. 한 석 달쯤 걸리겠지. 따라서 내용은 보고안대로 결정하되 2안의 개발부 명칭만은 건설부로 고쳤으면 하오.”
 
 정재석 과장은 반론을 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개발’이라고 하면 국민경제 전체를 포괄하는데 ‘건설’이라면 한 부문에 한정되므로 이는 부흥부의 확대·강화가 아니라 오히려 축소요 약화가 됩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렇겠으나 개발이란 말은 나에게도 생소한 데 어찌 일반 국민들이 알아듣겠소. 귀관의 보고도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건설하자는 뜻인 것 같으니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건설부로 합시다.”
 
 정재석은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개발’이란 말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건설부라고 부르게 되면 主務局(주무국)을 국토건설국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정녕 건설부란 명칭을 원하신다면 경제건설부로 하든지 아니면 개편을 일단 보류했다가 경제기획원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혁명가는 어디 경제만을 건설하자는 것인가.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다 건설해야지.”

 
 
 

 

 
 
 경제기획원의 産苦
 
 건설부란 명칭을 둘러싼 부흥부 조사과장 정재석과 박정희 소장 사이의 공개적인 논쟁은 여러 최고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정 과장이 또 반론을 폈기 때문이다.
 
 “當部(당부)는 원조 교섭 등 대외 협력상 영어명칭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원조자금도 늘리고 외자도입도 촉진해야 하는데 部名(부명)을 Ministry of Construction이라 해서는 대외 설득력이 약해집니다.”
 
 박정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입을 뗐다.
 
 “좋아, 그러면 우리말로는 건설부라고 하고 英名(영명)은 원안대로 Ministry of Development라고 함세.”
 
 박정희는 스스로의 機智(기지)에 놀란 듯 벌떡 자리에서 털고 일어서 버리는 것이었다. 장도영 의장은 들었던 사회봉을 칠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건설부는 그 뒤 두 달 동안 재무부로부터 예산국, 내무부로부터 통계국을 흡수했다. 건설부 산하의 국토건설국은 내무부의 토목국을 흡수하여 국토관리청이 되었다. 건설부가 경제기획원으로 확대 개편된 후 국토건설청이 성격이 다른 건설부로 승격된다.
 
 5·16 당시 37세였던 송정범(작고·경제기획원 부원장·도로공사 사장 역임)은 자유당 시절 부흥부 기획국장과 조정국장을 지내면서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개발 계획 작성에 참여했다. 1960년 3월 송정범은 미국 워싱턴에 있던 세계은행(IBRD) 산하 경제개발연구원에 파견되어 경제개발과 관련한 교육을 받았다.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각국에서 경제개발에 참여한 여러 관료들이 강사로 나와 경험과 이론을 소개해 주었다. 미국에 머물던 당시 송정범은 예편한 뒤 미국에 와 있던 송요찬 예비역 중장과 인연을 맺었다.

 
 
 

 

 
 
 1961년 3월경 귀국한 송정범은 잦은 기구개편으로 보직결정이 미뤄지자 厚岩洞(후암동) 자택에 머물며 미국에서 공부하던 책을 읽고 소일하다가 5·16을 맞았다. 최고회의 재경위원 유원식 대령을 통해 최고회의로 불려나온 송정범은 ‘두서가 없고 정리도 안 된 그곳에 출근하는 것을 단념하고 집에서 책을 읽으며 한국은행 조사부에 나가 소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6월22일, 최고회의는 민간인 출신의 김유택(초대 경제기획원장)을 재무부 장관으로, 서울대 교수 申泰煥(신태환)을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김유택 재무장관은 비서관을 통해 송정범에게 당면한 경제 대책에 대한 기안을 부탁했다. 송정범은 ‘혁명 뒤에는 해묵은 경제적 숙제를 한꺼번에 풀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보장되는 시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지로 기안을 작성했다.
 
 김유택 장관은 이 내용을 받아 들여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송정범에게 “뒤에 남을 만한 名句(명구)가 없을까”하고 물었다. 송정범은 서독의 경제부흥을 주도한 에르하르트 부총리가 지은 《경쟁을 통한 번영·독일 기적의 경제학》이란 책에서 읽은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이 떠올랐다.
 
 라인강의 기적을 우리나라에서도 이뤄보자는 생각에 즉석에서 ‘한강의 기적’을 발표문에 첨가했다.

 
 
 

 

 
 
 
 7월 초가 되자 미국에서 인연을 맺었던 송요찬 예비역 중장이 내각수반으로 부임하면서 송정범을 찾았다. 송정범이 가 보니 송 수반은 “국방 연구원에서 두 사람을 차출했으니 함께 기획관청 창설(경제기획원)에 대해 연구해 보라”고 구두로 명령을 내렸다. 송정범은 부흥부 국장시절 국방연구원에서 한국 경제를 특강하기도 했는데 그때 자신의 강의를 들었던 김 모, 박 모 대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중앙청 옆 국립영화연구소 시사실을 빌려 조직구성 작업에 착수했다. 유난히 무더운 날씨 속에서 세 사람은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나라 살림의 틀을 새롭게 짜고 능률을 높이자면 어떤 모양의 기구가 적합한지, 새롭게 등장할 기획 관료들이 틀에 짜인 기존 부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의 문제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송정범의 회고─.
 
 “史實(사실)로 볼 때 1948년 정부수립 당시 국무총리 밑에 기획처가 있어 예산을 편성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건국 초기의 혼란 밑에서는 개발 계획을 전제로 한 기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1955년에 등장한 부흥부는 원조 업무에만 편중되어 예산 편성권은 재무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재원이 두 곳에서 분리 운영된 2원제였지요. 이런 단점을 해결하자면 재원을 한 곳으로 모아야 했어요. 우리가 얻은 첫 번째 결론은 계획과 예산의 일체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경제기획원장의 기능과 행정상의 지위 문제였어요.”
 
 송정범은 계획과 수립, 실행과 조정에 강력한 실천력을 주자면 경제기획원장에 부수반 신분격을 덧붙여주지 않는다면 기구가 발족해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의 사례도 참조했습니다. 행정관서의 영역이 오랜 전통으로 굳어진 일본의 경우 경제기획청을 두고 있지만 조정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도의 ‘플래닝 커미션(Planning Commission)’도 부처 사이의 요구를 배분만 하고 있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비교연구된 개발기구에 대한 자료와 미르달 교수의 《경제이론과 저개발 지역》이란 책은 참조할 만했지요.”
 
 송정범과 두 대령은 경제기획원 설치안을 만들어 내각에서 세 차례,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한 차례 보고·설명회를 가졌다. 내각에서는 경제기획원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송정범에게 경제 대책 기안을 의뢰했던 김유택 재무장관조차 재정과 금융의 보완관계를 들어 “예산국의 이전은 전통적인 재무부
기능을 없애려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意見百出(의견백출)의 전시장 같았다. 내무부의 통계국만
이전이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