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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5) 1962년에 뿌려진 南北 격차의 씨앗

淸山에 2011. 4. 20. 14:22

 

 

 
 
 1962년에 뿌려진 南北 격차의 씨앗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5)/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과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던 그 차이가 해가 바뀔수록 커지게 된다.
趙甲濟
 
 
 

 

 
 
 1차 5개년 계획안의 확정
 
 경제기획원장의 부수반 신분 문제는 논란 끝에 법제처장이던 헌법학자 朴一慶(박일경)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 박 처장은 경제기획원장을 장관급으로 두되 내각수반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경제기획원장이 그 職務(직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하는 序列(서열)로 결론지었다. 이 전례는 나중에 副總理(부총리)제도로 확정된다.
 
 이 와중에 송정범이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경제기획원 조직문제는 논란이 많아 곤란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박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목적과 수단이 좋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시오. 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지 이리저리 흔들리면 나중에 되는 일이 없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주재하는 최고회의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최고위원들이 저마다 경제기획원안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을 하곤 했다. 송정범의 회고─.
 
 “그때는 인플레, 실업, 식량부족으로 좌절감에 젖어 있는 국민에게 미래상과 그 수단을 제시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경제를 잘 모르던 최고위원들은 이런 초조함 때문에 대안도 없이 신경질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경제기획원의 원안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어요. 그는 정교한 修辭(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이 기구로 5개년 계획을 밀고 나가자고 결론지었습니다. 아무도 반대를 못 했지요.”
 
 혁명정부는 7월22일 건설부를 폐지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하는 경제기획원 직제 및 국토건설청 직제안을 공포했다. 경제기획원 초대원장은 韓銀(한은) 총재와 재무장관을 지낸 김유택이 기용되고 산파역을 맡은 송정범은 부원장을 맡았다. 이후 경제기획원장이 경제부처를 통솔하고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는 제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최고회의판 ‘종합경제재건계획’을 참고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란 지시를 받은 경제기획원장 김유택과 부원장 송정범은 회의를 열었다.

 
 
 

 

 
 
 ‘시멘트 공장을 만들자’, ‘제철소가 있어야 한다’, ‘정유공장을 건설하자’, ‘발전소가 모자란다’, ‘비료공장을 세우자’ 등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다.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방법론은 없고 목표만 내세우는 들뜬 분위기였다.
 
 경제기획원이 맨 먼저 봉착한 문제는 성장률이었다. 최고회의를 통해 발표된 ‘종합경제재건계획’에서 결정한 성장률은 연평균 7.1%였는데 李秉喆(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에서는 경제성장률이 최소한 연 10%는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학계에서는 “외국에서도 7% 성장의 예가 없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7.1%의 성장을 바라는가”라며 卓上空論(탁상공론)이라고 비판했다.
 
 송정범은 IBRD(세계은행) 산하 경제개발 연구원에 있으면서 배운 지식을 활용했다. 개발정책을 다룬 각국의 경험자들은 성장률을 책정할 때 정치적인 목표치로서의 성장률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송정범에게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최소치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충고했다. 송정범은 이 충고에 따라 기준치를 정한 뒤 수출정책을 고려해 연평균 성장치를 책정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최고회의판 종합경제재건계획에서 제시한 7.1%와 맞아 떨어졌다. 송정범은 “결과적으로는 재계와 학계의 중간치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산에 의한 결과”라고 증언했다.
 
 경제기획원에서 두 번째로 봉착한 문제는 농어촌 발전계획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1차 산업의 ‘상대적 후퇴’를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상공부와 농림부 간의 마찰도 컸다. 송정범 부원장이 박정희 의장에게 이런 갈등을 보고하면 박 의장은 “서로 협의를 잘 해서 타결짓도록 하시오”라고만 했다. 결국 대외 발표만은 ‘農工竝進(농공병진)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하되 실제는 種子(종자) 개량과 비료공장 건설을 고려한 선에서 공업화 중심으로 결정을 보았다.
 
 송정범은 외자는 자유롭게 도입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국내 저축이 모자라고 미국의 원조도 감축되는 상태에서 외환보유고도 부족하여 경제성장 전략은 자연스럽게 외자도입에 의한 수출 주도형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에 외자를 주려는 나라가 없다는 게 문제가 되자 경제기획원은 외자도입 촉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윤곽은 10월 말에 드러났다.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의한 농업소득의 증대와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의 시정 ▲전력, 석유, 석탄 등 에너지원의 확보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 간접자본의 충족 ▲유휴자본의 활용, 특히 고용의 증대와 국토 보전 및 개발 ▲수출 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기술의 진흥 등이 중점 목표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작업이 마무리 되어 가는 도중에 박정희 의장의 訪美(방미)계획이 확정됐다. 방미목표는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혁명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경제건설에 미국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었다. 경제기획원은 박 의장에게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 올리고 송정범은 세계은행(IBRD) 등과의 협의에 골몰했다.
 
 박 의장의 미국행에 천병규 재무장관과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이 공식 수행했다.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는 동안 송정범은 미 국무부 해외개발처(AID) 해밀턴 처장과 실무 협의에 들어갔다. 미국 측은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나치게 의욕적인 계획’으로 평가했다.
 
 해밀턴 원조처장은 “7.1% 성장률을 목표로 정한 것은 선진국에서도 예가 없다. 제철, 정유, 造船(조선), 비료, 시멘트 공장을 세운다는데, 이것이 한국에 필요하다는 것은 납득하겠지만 그러나 한꺼번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적어도 20억 달러 이상의 外資(외자)가 필요한데 한국에 누가 그런 많은 돈을 빌려 주겠는가”라며 난색을 표시했다.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IBRD(세계은행)도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에 난색을 표명했다.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이 그들을 설득한 끝에 결국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 때부터 IBRD 측이 적극 개입한다는 조건 하에 외자지원의 언질을 받아 냈다. 박정희 의장이 귀국할 때 IBRD 측은 간부를 동행시켜 한국에 파견했다. 파견된 IBRD 측 간부는 외자도입 체제를 고치고 모든 프로젝트 건설을 정부주도로 할 것을 권고하면서 외자도입 시 정부가 보증하고 수출산업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제안했다.

 
 
 

 

 
 

 IBRD 측의 권고를 받아들인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둔 채 부분적인 수정을 했다.
 
 1962년 1월1일 <경향신문>은 이틀에 걸쳐 <신춘 경제 좌담회>란 제목의 對談(대담)기사를 실었다. 財界(재계) 대표로 李秉喆 삼성물산 사장이, 學界(학계)를 대표해서는 陸芝修(육지수) 서울대 경제학 교수가, 정부에서는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이 대담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은 “더 큰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큽니다. 외자는 기업가들이 앞장서서 도입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육지수 교수는 정부의 농공병진정책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농업과 공업을 비교할 때 공업이 利潤度(이윤도)가 높으므로 어떤 나라든지 공업을 하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현 실정으로는 60%를 점하는 대다수 농민들이 잘 살게 되어야 국내시장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장기 경제계획의 첫 단계에서는 농업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宋 부원장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爲主(위주)니 重點(중점)이니 하는 말을 하시는데 우리가 항구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공업화를 지향하는 조건의 하나로서 농업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공업화에 있습니다.”
 
 1962년 1월5일, 혁명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정소영 등이 만든 최고회의판 종합경제재건계획을 토대로 경제기획원이 5개월여 작업 끝에 탄생시킨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청사진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의 서문에서 박정희 의장은 개발 계획의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한 민주정신에 입각한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경제 체제의 원칙 하에 정부의 강력한 계획성이 가미되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민족적 숙원인 승공통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획서는 기본 전략으로서 다섯 가지를 꼽았다.
 
 <가. 민간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되 基幹(기간) 부문에 대하여는 정부가 간여하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로 한다.
 
 나. 정부가 직접적인 정책수단을 보유하는 公的(공적) 부문에 계획의 중점을 둔다.
 
 다. 한국 경제의 궁극적인 진로는 공업화에 있다. 그 준비단계에서 전력,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농업생산력 증대,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용증대와 국토개발, 수출증대, 기술진흥에 주력한다.
 
 라. 국내자원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외자도입에 중점을 둔다.
 
 마. 국방비는 불가피한 자연증액만을 인정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시절에 부흥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만들어 보고하자 “5개년 계획이라니? 그건 소련 공산당들이나 할 일이 아닌가”라고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관료들은 老(노)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2년을 깎아서 ‘3개년 계획안’으로 바꾸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끔 뜯어고쳐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경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 주도하는 식으로 하고 정치도 국가가 국민들을 敎導(교도)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교도 민주주의’란 말을 쓰기도 했다. ‘교도 민주주의’(뒤에 나오는 한국적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나 ‘지도받는 자본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박정희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걸음마도 떼지 않은 한국, 더구나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한국은 서구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감당할 토양이 못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국가 엘리트가 장악한 정부가 나서서 국가근대화를 통해 市場(시장)과 民主(민주)가 기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발전단계와 남북대치상황에 입각하여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고 일부 지식인이 아닌 대다수 국민의 입장에 서서 무엇이 국익이고 善(선)인가의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식 實事求是(실사구시), 또는 박정희식 주체성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한 번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英美(영미) 등 일류 국가의 제도를 교과서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야당, 지식인, 학생들의 눈에는 독재를 위한 자기 합리화로 비쳐지기도 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국방비를 최소한으로 억제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도 주목할 점이다. 그런 사실상의 軍費凍結(군비동결) 결정이 군인혁명가 그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외국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박정희는 1960년대를 경제제일주의로 밀고나갔고 김일성은 군사제일주의로 밀고나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박정희는 1960년대에 구축한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하여 자주국방정책을 추진한다. 김일성은 과중한 군사비 부담으로 1960년대에 이미 경제가 망가지고 나서야 1970년대에 경제건설을 시도했으나 기초체력이 떨어진 뒤라 효과가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가면 연간 국방비 지출에서도 남한이 북한을 앞지르게 된다. 오늘날 남북한의 격차를 가져온 씨앗이 1962년에 뿌려진 것이다. 즉, 이 해부터 시작된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과 북한에서 시작된 4대 군사노선이 그것이다. 북한은 1962년 가을에 벌어졌던 쿠바 미사일 사건 때 소련이 핵전쟁을 각오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과 핵탄두를 철거하는 것을 보고는 자주군사노선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62년 남북한은 각각 다른 길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던 그 차이가 해가
바뀔수록 커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