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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7) 5·16, 경제再建 성취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의 發露

淸山에 2011. 4. 21. 13:22

 

 

 
 
 
5·16, 경제再建 성취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의 發露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7)/ 혁명정부의 의욕적인 자립경제건설이
탐탁지 않은 미국은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반대한다
趙甲濟   
 
 
 
 

 

 
 
 영국의 造幣공장
 
 金正濂(김정렴)은 천병규 재무장관이 통화개혁 준비작업에 동원하기 위해 최고회의 柳原植 위원에게 부탁하여 한국은행에서 정보부로 데려다 놓은 경우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공직을 다시는 맡지 않겠다는 김정렴의 인생행로가 바뀌게 된다. 1969년부터 9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박정희를 보좌하면서 경제정책을 비롯한 國政(국정)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한 김정렴. 그는 최근까지도 자신이 왜 정보부로 동원되어 가다시피 하여 그곳에 근무하게 되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천병규는 1988년에 《천마초원에 놀다》란 제목의 회고록을 펴냈는데 김정렴은 거기에 실린 글을 읽고서야 자신의 정보부行(행)이 결정된 배경을 알았다는 것이다.
 
 유원식의 지시를 받은 정보부 간부 康誠元(강성원·공화당 국회의원 역임)은 한국은행으로 연 3일간 출근하다시피 하여 김정렴에게 “정보부에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파견된 뒤 官界(관계)에서 고생한 것이 잊히지가 않아 매정하게 거절했다. 나흘째 되는 날 한국은행 총재가 부르더니 “정보부에서 귀하를 지명하여 파견근무를 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정식 인사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자진 퇴직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정렴은 내키지 않았지만 정보부 정책연구실에 자문위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나가보니 崔圭夏(최규하·전 대통령), 李鍾極(이종극), 金成熺(김성희), 金雲泰(김운태), 朴觀淑(박관숙), 劉鎭舜(유진순) 등 각계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었고 金鶴烈(김학렬·뒤에 경제기획원장 역임)은 이곳에서 일하다가 정부 쪽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김정렴은 이곳에서 현안 경제문제에 대한 의견을 써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병규 장관이 오더니 김정렴을 데리고 유원식 위원을 소개시켜주고 돌아갔다. 유원식은 “김 선생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1953년 2월의 긴급 통화금융조치를 기안했다면서요”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통화개혁에 대한 연구를 좀 해주세요. 각국의 통화개혁의 실례, 우리나라 통화개혁 시의 준비사항, 통화개혁의 구체적인 내용, 사후대책 등에 관련하여 연구를 하셔서 보고서를 써 주십시오. 통화개혁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통화개혁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것이니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안이 유지되어야겠습니다.”
 
 유 위원은 비밀작업에 적당한 장소라면서 서울시청 뒤의 한 건물 2층으로 김정렴을 데리고 갔다. 여자직원이 근무하는 부속실, 그 옆에 잘 차려진 집무실, 그리고 그 뒤쪽에 벽 전체에 검정융단의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이 있었다. 김정렴은 혼자서 이 방을 쓰면서 통화개혁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올렸다. 유원식은 “수고했다”면서 “지금 駐美(주미) 대사관 경제참사관 자리가 비어 있는데 가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김정렴은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한편 비밀 통화개혁의 실무책임자가 된 천병규 재무장관은 새 지폐의 인쇄 장소를 생각하다가 영국에서 연수 중 가본 적이 있는 토머스 데라루(Thomas De La Rue) 조폐회사가 생각났다. 식민지를 많이 가졌던 영국에는 여러 나라들의 화폐를 인쇄해주는 업종이 발달해 있었다. 유원식과 천병규가 배석한 가운데 송요찬 수반은 駐韓(주한) 영국대사를 내각수반실로 불렀다. 송요찬이 입을 뗐다.
 
 “당신 나라에 화폐제조를 발주할 생각이다. 비밀 유지를 책임질 수 있는가. 우리의 화폐개혁 계획을 본국 정부에 꼭 보고해야만 하는 가.”
 
 “보고는 해야 한다. 기밀유지는 책임진다. 인쇄 가능 여부는 본국에 조회하여 이틀 후에 알려주겠다.”
 
 이틀 뒤 영국대사는 “작업은 가능, 비밀유지를 책임진다”는 답을 해왔다.
 
 새 화폐를 발주하자니 券種別(권종별) 인쇄 수량을 계산하는 문제가 남았다. 천 장관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자신이 직접 한국은행의 통계자료를 갖다놓고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냈다. 그리고는 서독으로 차관교섭을 위해서 떠나던 정래혁 상공장관에게 부탁하여 토머스 데라루社(사)와 인쇄계약을 미리 맺어두도록 했다. 천병규는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일행에 끼었다가 미국에서 바로 영국으로 가기로 했다. 기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기자들 앞에서 박정희 의장은 미리 짠 각본에 따라 쇼를 벌였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박 의장은 기자들이 들으라고 소리쳤다.

 
 
 

 

 
 
 “어이, 천 장관. 영국에서 초청을 받았다지?”
 
 “예, 각하. 이번 각하의 방미에 제가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영국 경제단체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4~5일간 영국에서 시찰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유원식은 통화개혁에 대해서 비로소 김종필 정보부장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박 의장 일행과 헤어져 영국에 도착한 천병규는 토머스 데라루社(사)에 들렀다. 천 장관은 먼저 다녀간 정래혁 장관과 이 회사가 화폐 인쇄비를 646만 달러로 책정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1961년도의 우리나라 수출액은 3800만 달러였다.
 
 토머스 데라루社가 디자인한 소액권의 크기도 너무 작았다. 거의 우표만 했다. 그런데 이 크기를 늘리면 인쇄비가 더 먹히게 되어 있었다. 고액권의 장수를 늘리고 소액권의 장수를 줄이면서 크게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천병규 장관은 이렇게 하여 인쇄비를 450만 달러로 깎았다. 이때 발주한 지폐는 최고액권이 500원으로 그 아래로 100원 권, 50원 권, 10원 권, 5원 권, 1원 권이었다. 위조방지를 위해서 500원 권에는 金屬線入(금속선입) 특제지, 100원 권 이하는 色絲入(색사입) 특제지를 썼다.
 
 울산공업센터 起工
 
 박정희 대장이 이끄는 혁명정부는 산업자본을 동원하려는 통화개혁을 극비리에 추진하는 동시에 울산공업센터 건설계획도 밀고 나가고 있었다.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울산이 工團(공단) 건설의 適地(적지)로 떠올랐다고 했다.
 
 “철강, 석탄, 석유 등 중량물들은 바다로 운송되어야 하고 공업용수가 있어야 합니다. 울산은 바다와 태화강을 함께 끼고 있고 일제시대에 이미 이곳에 정유공장을 옮기는 등 공단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곳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일본의 콤비나트 같은 개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종합제철, 정유공장, 비료공장 등 큰 시설들을 한 군데 모아서 연관효과를 높이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對韓(대한) 원조기구 유솜의 책임자인 킬렌 처장은 한국 측이 너무 서둔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에 일본은 조선축항주식회사를 통해서 울산을 인구 50만 명 규모의 공업도시로 건설하기로 하고 築港(축항) 공사를 시작했다. 경제기획원 산하의 국토건설청은 이 조선축항주식회사의 계획서를 입수하였다. 이 문서를 토대로 자체 조사팀을 편성, 울산이 대규모 공단으로 적합한지를 검증했다. 조사팀장은 뒤에 울산공업센터 건설본부장이 되는 安京模(안경모)였다. 조사팀은 울산이 적지란 판단을 내리고 보고했다. 
 

 
 

 

 
 

 1944년 일제는 원산에 있던 정유공장의 일부를 뜯어 울산으로 옮기던 중 패전을 맞았다. 6·25 전쟁 때는 유엔군의 유류보급기지가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1954년엔 三養社(삼양사)가 製糖(제당) 공장을 이곳에 건설했다. 조선축항주식회사 사장 이케다(池田佑忠)는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 철도국 海陸(해륙)연락시설 담당이던 안경모를 자주 찾아와서 울산공업도시 건설계획을 털어놓고 한 사이였다. 6·25 전쟁 중에도 안경모는 유엔군의 유류보급기지 공사를 지휘했고 철도 부설을 해준 인연이 있었다.
 
 안경모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도 울산을 공단 적지로 추천했다고 한다. 1962년 1월2일 박정희 의장은 부산 해운대에서 이병철, 李庭林(이정림), 鄭載頀(정재호), 南宮鍊(남궁련), 金周仁(김주인) 등 기업인들과 만나 대규모 공업단지 건설계획을 토의했다. 이 자리에서 울산이 團地(단지)로 확정되었다. 당시 정보부 경제담당 고문이던 金龍泰(김용태·뒤에 공화당 원내총무 역임)도 기업인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울산공단 건설에 관계한 인물이다.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빨리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던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혁명주체들은 울산공업지구 건설을 그런 상징적 사건으로 삼았다. 1962년 2월 3일 경남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 동해의 푸른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나중에 油公(유공)의 정유공장이 들어서는 자리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박 의장, 송요찬 내각수반, 최고위원, 이 공단조성 계획에 반대했던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를 비롯한 주한 외국인 사절들, 그리고 국내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마산까지 특별열차를 타고 왔다. 구경거리로 알고 몰려드는 주민들을 위해서 장생포─울산 사이에 놓인 녹슨 철로에도 임시열차가 쉬지 않고 군중을 나르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포근한 날씨였다. 
 
 
 
 

 

 
 

 오후 1시15분부터 시작된 기공식에서 박 의장은 울산공업지구 설정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연관 산업을 건설하기 위하여 울산읍, 방어진읍 등지를 공업지구로 설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들어설 공장들의 건설주체나 부지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기공식을 올린 것이다. 박정희 의장의 이날 축사는 그 내용이나 열정에서 그가 한 여러 번의 역사적 연설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는 신라의 榮盛(영성)을 재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민족 再興(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寶庫(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니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 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 5·16혁명의 眞意(진의)는 어떤 정권에 대한 야욕이나 政體(정체)의 변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로지 이 겨레로부터 빈곤을 驅逐(구축)하고 자손만대를 위한 영구한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할 경제재건을 성취하여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궐기했던 것입니다. 이 울산공업도시의 재건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雄圖(웅도)이며 그 성패는 민족 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니 온 국민은 새로운 각성과 분발, 그리고 협동으로써 이 세기적 과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하여 奮起(분기) 노력해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날 기공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경주 불국사 호텔에서 연회를 가졌다. 同席(동석)했던 김용태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미국의 유솜(USOM·미국의 對韓 원조기관) 처장 킬렌은 “자본, 기술, 자원이 모두 부족한 한국이 이런 대규모 공단을 조성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라며 축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울산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해왔던 김용태는 ‘평소에도 반대하더니 이런 자리에 와서도…’라는 생각에서 순간적으로 울분이 치솟아 킬렌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고 한다.
 
 그 3년 뒤 김용태가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월남을 방문하니 킬렌은 그곳의 원조기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킬렌은 반갑게 손을 내밀면서 말하더란 것이다.
 
 “울산공업단지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다면서요? 그날 기공식 때는 내가 失言(실언)을 했습니다. 사과합니다.”
 
 김용태는 미국이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반대한 것은 개발도상국을 시장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혁명정부의 의욕적인 자립경제건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