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천 장관. 영국에서 초청을 받았다지?” “예, 각하. 이번 각하의 방미에 제가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영국 경제단체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4~5일간 영국에서 시찰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유원식은 통화개혁에 대해서 비로소 김종필 정보부장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박 의장 일행과 헤어져 영국에 도착한 천병규는 토머스 데라루社(사)에 들렀다. 천 장관은 먼저 다녀간 정래혁 장관과 이 회사가 화폐 인쇄비를 646만 달러로 책정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1961년도의 우리나라 수출액은 3800만 달러였다. 토머스 데라루社가 디자인한 소액권의 크기도 너무 작았다. 거의 우표만 했다. 그런데 이 크기를 늘리면 인쇄비가 더 먹히게 되어 있었다. 고액권의 장수를 늘리고 소액권의 장수를 줄이면서 크게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천병규 장관은 이렇게 하여 인쇄비를 450만 달러로 깎았다. 이때 발주한 지폐는 최고액권이 500원으로 그 아래로 100원 권, 50원 권, 10원 권, 5원 권, 1원 권이었다. 위조방지를 위해서 500원 권에는 金屬線入(금속선입) 특제지, 100원 권 이하는 色絲入(색사입) 특제지를 썼다. 울산공업센터 起工 박정희 대장이 이끄는 혁명정부는 산업자본을 동원하려는 통화개혁을 극비리에 추진하는 동시에 울산공업센터 건설계획도 밀고 나가고 있었다.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울산이 工團(공단) 건설의 適地(적지)로 떠올랐다고 했다. “철강, 석탄, 석유 등 중량물들은 바다로 운송되어야 하고 공업용수가 있어야 합니다. 울산은 바다와 태화강을 함께 끼고 있고 일제시대에 이미 이곳에 정유공장을 옮기는 등 공단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곳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일본의 콤비나트 같은 개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종합제철, 정유공장, 비료공장 등 큰 시설들을 한 군데 모아서 연관효과를 높이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對韓(대한) 원조기구 유솜의 책임자인 킬렌 처장은 한국 측이 너무 서둔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에 일본은 조선축항주식회사를 통해서 울산을 인구 50만 명 규모의 공업도시로 건설하기로 하고 築港(축항) 공사를 시작했다. 경제기획원 산하의 국토건설청은 이 조선축항주식회사의 계획서를 입수하였다. 이 문서를 토대로 자체 조사팀을 편성, 울산이 대규모 공단으로 적합한지를 검증했다. 조사팀장은 뒤에 울산공업센터 건설본부장이 되는 安京模(안경모)였다. 조사팀은 울산이 적지란 판단을 내리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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