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는 식사를 끝내고는 집으로 갔다. 잠든 처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자정 직전 전화가 울렸다. 공장에서 온 전화였다. 그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내에게 “오늘
야간작업이 있어 공장에서 밤샘을 해야겠다”면서 자식들 얼굴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는
공장으로 향했다. 야간작업 인원들을 파악한 다음 그는 김종필이 오기를 기다렸다. 민간인 참여자 가운데 張泰和(장태화)는 박정희와 직통으로 정보 수집, 상황 분석의 일을 하고 있었다. 5월15일 낮에 육영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가 전화를 받으니 육영수는 박정희를 바꾸어 주었다. 박 장군은 “집으로 좀 와주시오”라고 했다. 장태화는 점심을 먹고 신당동으로 갔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 그리고 좀 늦게 합류한 이낙선 네 사람은 안방에서 어제 끝내지 못한 혁명 공약, 포고령, 정부기구표 등의 문안 검토 작업을 계속했다.
김종필이 써 온 혁명 공약에 박정희는 나중에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제6항을 추가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조항은 박정희의 입버릇이 된 ‘버마식 군부 통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군대는 병영으로 들어가 大兄(대형)처럼 정치를 감독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정치에 개입하여 정리를 해주고 들어가는 식의 군부 통치 구상은 장구한 문민 통치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먹힐 리가 없었다. 박정희나 김종필이나 국가 근대화를 혁명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舊(구)정치를 청산한다는 한시적 정치 참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필은 이 6항의 첨가에 반대했으나 박정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혁명 공약의 발표자 명의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김종필은 반발했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가 모셔야 합니까” 하고 대들다시피 했으나 박정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가 문안을 검토하여 수정한 것을 이낙선이 淨書(정서)했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1호는 출국 금지, 집회 금지, 언론 검열, 직장 이탈 금지, 통금 시간 연장,
영장 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포고령 제2호는 16일 오후 5시를 기해서 일체의 금융 거래를 동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16일 아침 9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것과 맞추어 오전 9시로 수정되었다.
은행에서 예금 인출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포고령 3호는 공항과 항만 폐쇄, 4호는 국회(민의원, 참의원)와 지방 의회의 해산, 정부 인수, 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 활동 금지, 국무위원 체포를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포고령 5호는 금융 기관으로부터의 예금 인출을
1회에 10만 환, 한 달에 50만 환으로 제한하는 내용. 6호는 물가 동결과 매점매석자에 대한 극형,
포고령 7호는 외국인 재산에 대한 보호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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