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29) “장 장군, 내일 거사야”

淸山에 2011. 2. 23. 10:15

 

 
 
“장 장군, 내일 거사야”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9)/
혁명 공약에 박정희는 나중에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제6항을 추가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

趙甲濟    
 

 

 
 
광명인쇄소 李學洙 사장
 
 5월14일 오후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에선 이상한 풍경이 벌어졌다. 육군 방첩대 산하 서울지구대(506부대)
대장인 이희영 대령과 육군본부 직할 제15범죄수사대(CID) 方滋明(방자명) 중령을 박정희가 집으로 부른 것이다.
 
 서울 지역의 두 군 수사기관장은 박정희의 혁명 모의를 알고 있었다. 이희영은 전날 밤엔 박정희 소장을
구속하느냐 마느냐로 검찰총장과 참모총장 사이를 오가면서 논의까지 한 사람이다. 방첩대는 그 순간에도 박정희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었고 미행조를 편성해 놓고 있었다. 그런 판에 박정희는 두 사람을 불러다 놓고는 김동하 소장을 태연히 소개시키고 쿠데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한 해 전 이희영 대령이
2군 방첩부대장이었을 때 하던 그 이야기였다.
 
 “군이 한번 나서서 깨끗이 쓸어버린 뒤 병영으로 돌아간 다음에 정치를 감시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또 나오면
되는 거야. 이게 버마 네윈式(식)이지.”
 
 박정희는 날짜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거사가 임박했다는 냄새를 풍겼다. 장도영 참모총장에게도 충분히 설명했다는 암시도 주었다. 방자명이 들으니 박정희는 자신과 이희영을 혁명 동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방자명은 속으로 ‘무슨 배짱으로 저러나’ 하는 반발심이 생길 정도였다. 육사 8기인 방자명은 몇 달 전까지 2군 범죄수사대에서 근무하여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많이 받고 있었다. 박정희로부터 “뒤엎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노골적인 동참 권유를 받은 적도 있었다. 방자명은 장도영 총장에게 ‘박정희 쿠데타설’을 직접 보고한 적도 있었다.
이날 방자명은 박정희의 능수능란한 술수에 뭐가 뭔지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5월14일 오후 박정희는 바빴다. 이낙선 소령에게 친서를 지참시켜 1군 사령부의 장교들에게 전달하도록 보냈다. 대구에 있는 이주일 2군 참모장에겐 “모레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 못 내려간다”고 전화로 연락을 했다. 모레,
즉 16일에 거사한다는 뜻이었다. 박정희는 전화로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은 메모하여 전속 부관
김성구 중위를 시켜 직접 이주일 소장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14일 밤 박정희는 신당동 자택에 머물면서 늦도록 김종필이 가져온 혁명 공약, 各界(각계)에 보내는 호소문,
포고령 따위의 문안을 검토했다. 자정을 넘겨도 끝나지 않아 다음날 다시 하기로 했다. 밤늦게 문재준 6군단 포병사령관이 방문했다. 지방에 내려갔다가 오전에 있었던 작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뒤늦게 박정희로부터 지침을 받으러 온 것이다.
 
 이날 밤 공수단 대대장 김제민 중령 집에는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 등 11명의 팀장(대위)이 모여 장면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 점령 계획을 논의했다. 엘리베이터조, 비상구조, 층계조, 정문조를 편성,
약 70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다음날(15일) 오전에 김제민, 박종규, 차지철, 그리고 다른 세 대위는 반도호텔 건너편 중국 음식점 아서원으로 갔다. 박종규가 비스듬히 옆면이 보이는 반도호텔의 외부 구조에 대해서 설명했다. 건물 양쪽 면에 난 철제 비상계단의 하단은 접혀 있었다. 위에서 비상 탈출할 때 펼칠 수 있게 된 것인데 밑에서 오르려면 로프가 필요할 듯했다. 이들은 이어 반도호텔의 내부를 정찰키로 했다. 먼저 1층에 있는 바(Bar)로 들어가서 맥주를 한 잔씩 했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맥주잔이 떨어져 깨졌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나는 파열음은 그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누군가가 “장면 정권이 깨지는 소리야”라고 했다.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위를 오가면서 8층에 있는 장면 총리의 집무실과 숙소를 공격할 행동 계획을 짰다. 
 
 
 

 

 
 

  5월15일은 월요일이었다. 청파동 숙명여대 근처에 살던 김종필은 아침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신당동 처삼촌
집으로 향하면서 만삭의 아내 박영옥을 향해서 한마디했다.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이 거사에서 죽더라도 그놈만은 잘 키워주시오.”
 
 김종필은 언덕배기에서 내려오다가 뒤돌아보았다. 박영옥은 문 앞에 서 있었다.
 
 5월15일 오전 11시쯤 서울 종로구 안국동 광명인쇄공사 李學洙(이학수) 사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쓴 김종필이었다. 李 사장은 일본에 주문한 인쇄기 구입 건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김종필은 안경을 벗더니 “내일 未明(미명)을 기해서 거사하기로 하였소”라고 했다.
이학수는 “제가 맡은 일은 완수하리다. 염려 마시오”라고 했다.
 
 “이 형, 제가 안내할 테니 박 장군한테 갑시다. 이 형을 만나자고 합디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신당동으로 달리는 차중에서 김종필은 이 사장의 손을 잡더니
귀엣말로 “오늘처럼 시간이 안 가는 날도 처음이오”라고 했다. 신당동 박정희 장군 집에 들어가니 키가
큰 한웅진 육군정보학교장이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있는데 박정희가 안방에서 나왔다.
 
 “이 형, 잘 오셨소.”
 
 인사를 나누는데 노란색 스커트를 입은 육영수가 들어왔다.
 
 “여보, 인사하시오. 이분이 이주일 장군의 친척 되시는 이학수 씨요.” 
 
 
 

 

 
 

 박정희는 이학수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옷장 깊숙이 넣어둔 공책 한 권과 서류를 꺼냈다. 혁명 공약과 혁명 취지문, 포고문 초안이었다. 박정희는 이 서류들을 내놓고 이학수의 의견을 구했다. 이학수는 32절지 크기로 35만~50만 장을 인쇄하면 자정부터 시작할 경우, 다음날 아침 6시에 끝날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포고문의 인쇄는
혁명군이 서울 시내로 진입한 뒤에 시작하라”고 했다. 확정된 혁명 공약, 포고문의 인쇄 원고는
김종필이 밤에 전해 주기로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당부했다.
 
 “이 사장, 事前(사전)이나 작업 중에 경찰이나 수사 기관에 붙들려가는 일이 있더라도 15시간 만은 입을 열지
마시오. 공장 직원들이 작업하는 동안에 기밀이 누설되지 않게 잘 해주시오.”
 
 박정희는 옆에 앉아 있던 김종필에게도 지시했다.
 
 “경호원 3, 4명을 데리고 가서 직접 작업을 감독하게. 그리고 순찰경관이 오거든 입을 막고 잡아 둬.”
 
 이학수가 안방을 나오니 응접실에 김동하 장군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 잘 아는 사이이고 모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이학수는 김동하에게 “나 먼저 갑니다” 하고는
광명인쇄소로 돌아왔다.
 
 혁명 공약 제6항
 
 광명인쇄소로 돌아온 이학수 사장은 공장장을 불렀다.
 
 “오늘 밤 공보실에서 급한 원고가 나와서 철야 작업을 해야 하겠으니 야근할 사람들을 뽑아 대기시키시오.
저녁 식사도 모두 공장에서 하도록 이르시오.”
 
 이학수는 그날 저녁 친구 세 사람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곤 정색을 하고 말했다.
 
 “며칠 안으로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내가 불행해지면 자네들 세 사람이 힘을 모아 내 공장을
 경영해 주고 내 자식들도 클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해.”
 
 친구들은 “농담이 지나치군” 하고 웃어넘기려 했다.
 
 “진담이다. 절대 흐지부지하게 듣지 마.”
 
 “혹시 收賂(수뢰) 사건에 걸려든 것 아냐.”
 
 “아니야.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 
 
 
 

 

 
 

 이학수는 식사를 끝내고는 집으로 갔다. 잠든 처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자정 직전 전화가 울렸다. 공장에서 온 전화였다. 그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내에게 “오늘
야간작업이 있어 공장에서 밤샘을 해야겠다”면서 자식들 얼굴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는
공장으로 향했다. 야간작업 인원들을 파악한 다음 그는 김종필이 오기를 기다렸다.
 
 민간인 참여자 가운데 張泰和(장태화)는 박정희와 직통으로 정보 수집, 상황 분석의 일을 하고 있었다. 5월15일 낮에 육영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가 전화를 받으니 육영수는 박정희를 바꾸어 주었다. 박 장군은 “집으로 좀 와주시오”라고 했다. 장태화는 점심을 먹고 신당동으로 갔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 그리고 좀 늦게 합류한 이낙선 네 사람은 안방에서 어제 끝내지 못한 혁명 공약, 포고령, 정부기구표 등의 문안 검토 작업을 계속했다.
 김종필이 써 온 혁명 공약에 박정희는 나중에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제6항을 추가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조항은 박정희의 입버릇이 된 ‘버마식 군부 통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군대는 병영으로 들어가 大兄(대형)처럼 정치를 감독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정치에 개입하여 정리를 해주고 들어가는 식의 군부 통치 구상은 장구한 문민 통치의 역사를 가진 한국에 먹힐 리가 없었다. 박정희나 김종필이나 국가 근대화를 혁명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舊(구)정치를 청산한다는 한시적 정치 참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필은 이 6항의 첨가에 반대했으나 박정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혁명 공약의 발표자 명의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김종필은 반발했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가 모셔야 합니까” 하고 대들다시피 했으나 박정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김종필, 장태화가 문안을 검토하여 수정한 것을 이낙선이 淨書(정서)했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1호는 출국 금지, 집회 금지, 언론 검열, 직장 이탈 금지, 통금 시간 연장,
영장 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포고령 제2호는 16일 오후 5시를 기해서 일체의 금융 거래를 동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16일 아침 9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것과 맞추어 오전 9시로 수정되었다.
은행에서 예금 인출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포고령 3호는 공항과 항만 폐쇄, 4호는 국회(민의원, 참의원)와 지방 의회의 해산, 정부 인수, 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 활동 금지, 국무위원 체포를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포고령 5호는 금융 기관으로부터의 예금 인출을
1회에 10만 환, 한 달에 50만 환으로 제한하는 내용. 6호는 물가 동결과 매점매석자에 대한 극형,
포고령 7호는 외국인 재산에 대한 보호령이었다. 
 
 
 

 

 
 
 
 5월16일 이후 김종필은 열 건이 넘는 포고령 문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차례로 발표하였다. 포고령 15호부터는 혁명 이후에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혁명 이후의 정권 안정과 권력 구조의 대강을 결정한 이날의 문건 검토 작업이 이뤄진 작은 안방은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 産室(산실)이기도 했다. 방 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장태화는 팔멀을, 김종필은 켄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박정희가 말했다.
 
 “이 담배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김종필이 받아서 말했다.
 
 “실컷 피웁시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뀌니 양담배를 葬送(장송)하는 셈 치고 마음대로 피웁시다.”
 
 내일 쿠데타에 실패하면 양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될 것이고 성공해도 지도층의 입장에서 양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차피 양담배는 이것이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이날 육영수는 몸조심을 하였다. 박정희가 부르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았다. 육영수가 차려온 저녁을 먹는데
 김종필이 한 문필가에게 집필을 부탁해 두었던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사람은 글을 돌려가며 읽어 보았다. 내용이 너무 유약하고 박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보류하기로 했다.
 
 이날 신당동 자택에는 혁명파 장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오전엔 진해 육군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육사 8기 鄭文淳(정문순) 중령이 찾아와서 ‘민주당사 점령’이란 임무를 받아 갔다. 광주 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 보병학교 참모장 崔載明(최재명) 대령도 찾아왔다. 박정희는 이원엽에게 “전국 주요 도시에
혁명의 취지를 알리는 전단을 뿌려라”고 지시했다.
 
 하루 전 박정희의 친서를 지니고 1군 사령부의 혁명파 장교들을 찾아갔던 이낙선은 전달을 마친 다음 오후 1시쯤 신당동으로 와서 문안을 깨끗이 옮겨 쓰는 일에 매달렸다. 혁명이 성공한 다음 장도영에게 전달할
박정희의 편지 초안도 이낙선이 썼다.
 
 점심 무렵엔 박종규 소령이 와서 김종필에게 반도호텔 작전 계획을 현장에서 점검한 결과를 보고했다.
박정희는 국방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尹泰日(윤태일), 宋贊鎬(송찬호)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5시까지
와 달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이 나타나자 박정희는 이낙선이 작성한, 장도영 앞으로 보내는 자신의
 편지를 건네주면서 거사가 시작된 이후 장도영을 찾아가서 편지를 전하고 군사 혁명에
가담하든지 아니면 방해는 하지 말도록 설득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육본 교육처장 張坰淳(장경순)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까지 와 달라고 했다. 장경순은
왜 자기를 불렀는지 모른 채 신당동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장 장군, 내일 거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