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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8) 방첩대, 5월12일부터 朴正熙 24시간 감시

淸山에 2011. 2. 23. 10:03

 

 
 
방첩대, 5월12일부터 朴正熙 24시간 감시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8)/
장도영 총장이 박정희를 끝까지 비호함으로써 장면 정부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趙甲濟    

 

 

 
 
검찰총장, ‘박정희 체포 건의’
 
 토요일인 5월13일, 혁명 주체 장교들은 저마다 점검과 확인으로 바빴다. 부산의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 김용순 준장은 작전참모와 본부사령을 불러 거사 계획을 털어놓고는 “혁명 방송이 나가면 본부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1군 사령부의 李鐘根(이종근·국회의원 역임) 중령은 서울로 올라와서 유승원 대령을 만났다. 유 대령은 “2~3일 안으로 거사할 것이고 인편으로 알려줄 것이니 밤차로 귀대하여 대기하라”고 말했다. 대구 2군 사령부에서 이주일 참모장은 논산훈련소 崔泓熙(최홍희)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 대령을 내일 중에 대구로 보내 달라”고 했다.
 최홍희는 일찍부터 혁명 주체 세력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이원엽 육군항공학교장이 광주에서 날아왔다. 이주일은 박정희가 써놓고 간 편지를 이 대령에게 건넸다. 펴 보니 ‘조국의 장래와 민족의 운명을 건 이 유신대업에 동참하고 수일 후 서울에서 감격의 악수를 나누자’고
적혀 있었다.
 
 박치옥 공수단장도 김제민 대대장과 차지철 대위 등 중대장들을 불러 거사일이 임박했다고 통보하고 정부 요인 체포 계획을 알려 주었다. 해병대도 이날 김동하 장군 집에서 회의를 했다. 김윤근 해병여단장과 출동 대대장
오정근 중령을 부른 김동하 장군은 거사 날짜가 16일로 확정되었음을 통보했다.
 
 5월13일 저녁, 서울 옥인동의 ‘백양’이란 요정에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 민주당 金在淳(김재순·국회의장 역임)
의원, 선우종원 조폐공사 사장, 송원영 총리 공보비서관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송원영의
기억에 따르면 김재순은 단도직입으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박정희라는 소장의 쿠데타 음모설이 있는데 참모총장은 총리께 보고했는지요?”
 
 “오늘 낮에 총리께 보고드렸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나의 꼬붕입니다. 형님, 참모총장을 못 믿겠습니까?”
 
 “하긴 참모총장을 못 믿고 누굴 믿겠소? 옛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했지만 현재의 군인은 헌법에 충성해야
하지 않겠소. 합헌적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 기도를 총장이 책임지고 분쇄해야 합니다.” 
 
 

 

 

 송원영이 보니 장도영은 매우 당황한 듯 보였다고 한다. 그날따라 장도영은 무슨 고민이 있는 얼굴을 하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도영은 방바닥에 벌렁 눕더니 “형님, 정말 못 해먹갔어요”라고 했다. 송원영은 일주일쯤 전에 윤병한 의원으로부터 들은 김덕승 건을 상기시켰다. 장도영은 “그에 관해선 총리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하더란 것이다. 이들은 이날 일찍 자리를 떴다. 장도영 총장이
 “어디 갈 데가 있다”면서 총총히 일어서 나갔기 때문이다. 장도영은 선우종원에게
“내일 골프나 칩시다”라고 했는데 선우종원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장도영은 장면 총리의 ‘박정희 쿠데타 기도설에 대한 조사 지시’에 대하여 “낭설이다”라고 보고했으나 같은 지시를 받은 검찰은 제대로 수사를 하고 있었다. 이태희 검찰총장은 서울지검 金洪洙(김홍수·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역임) 부장검사에게 수사를 맡겼다. 김 부장은 박정희로부터 500만 환의 거사 자금을 마련하도록
부탁받았던 김덕승에게 미행을 붙였다.
 
 김홍수에 따르면 김덕승이 박정희 집에 출입하는 것도 확인했다고 한다. 검찰은 5월12일 오전에 김덕승을
체포했다. 김홍수는 김덕승이 조사를 받고 있던 남대문 근처의 한 호텔로 가서 김을 만났다. <5·16 혁명실기>에는 김덕승이 수사관의 문초를 받고도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고 적혀 있으나, 김홍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죄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홍수는 내란음모죄로 그를 구속하면 사회에 너무 큰 충격을
줄 것 같아서 우선 사기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고는 이태희 검찰총장을 찾아갔다. 김홍수는
‘박정희 쿠데타 음모설은 사실로 판명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총장은 보고를 듣더니 ‘내가 이미 아무 일도 아니라고 장면 총리에게 보고했다’고 합디다. 저는 ‘아닙니다. 이번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앉으라고 하더니 이 총장은 장도영 총장한테 전화를 걸더군요. 이 총장은 장도영에게 ‘검찰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한 15분쯤 앉아 있는데 장도영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장도영은 이 총장에게 대략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대구의 박정희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는데 전혀 그런 뜻이 없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저는 이 총장과 장 총장이 쿠데타 모의 문제를 신중하지 않게 다루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홍수 부장검사는 5월13일엔 경찰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경찰에서 군부대 사이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었는데 부대의 움직임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김홍수는 이 정보를 가지고 이태희 총장실로 달려갔다. 이태희 총장은 김 부장의 보고를 받더니 얼굴이 확 붉어지더라고 한다.
이 총장은 장면 총리가 머물던 반도호텔로 달려갔다.
 
 총장의 긴급 보고를 들은 총리는 장도영을 불러들였다. 이태희 변호사의 기억에 따르면 장도영은 손을 저으면서 “내가 알아보았는데 군에는 별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태희 총장은 “나는 군에 관련된
권한이 없으니까 당신이 조치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육군 방첩부대 산하 506서울 지구 대장 이희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저녁 506방첩대장실에서 ‘박정희
체포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철희 방첩부대장, 이희영 대령,
그리고 이태희 검찰총장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태희 총장은 그간의 수사결과를 설명하면서 “박정희는 지금 서울에 올라와 있는 모양이니 빨리 잡으시오”라고 재촉했다. 이희영은 “장성 체포는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의 내락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철희는 이날 밤 참모총장 공관으로 장도영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태희 총장의
구속 요구를 전달하자 장도영은 “좀더 두고 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희영은 박정희가 대구에서 상경한 5월12일부터 방첩대의 4인 1조 미행 팀을 박정희에게 붙여 놓고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었다. 거사일이 12일에서 15~16일경으로 연기된 것도 알고 있었다. 모의 장교들 속에 방첩대
 협조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도영 총장이 박정희를 끝까지 비호함으로써 장면 정부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합동 작전 회의
 
 해병대는 거사 준비를 모범적으로 하고 있었다. 김포 해병여단장 金潤根(김윤근) 준장은 출동 부대로 내정한
吳定根(오정근·국세청장 역임) 중령의 대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5월 초에 步戰砲(보전포) 협동 훈련을 실시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작전참모는 “보전포 훈련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고 반대했다. 김윤근은 “군단장과 인접
사단장을 모시고 훈련 시범을 가지려는 것이니 비좁더라도 여단 지역 내에서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보전포 훈련이 오정근 대대 중심으로 끝나자 김윤근 여단장은 이 대대에 대해서 야간 기동 훈련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장교들은 훈련이 오정근 대대에 집중되는 걸 보고는 기합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정근 대대는 중대 단위의 도보 훈련만 해오다가 대대 규모의 차량 이동 훈련을 받게 되었다.
 
 김윤근 여단장은 김포 가도를 현지 시찰했다. 비포장에다가 노면이 울퉁불퉁하고 웅덩이도 있어 야간 기동에
장애가 될 것 같았다. 그는 해안 중대와 공병 중대를 동원하여 길을 보수했다.
해병대가 5월16일에 모범적으로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5월14일은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이날 아침, 영천에서 상경한 韓雄震(한웅진) 육군정보학교장이 신당동 박정희 집에 들렀다. 한 준장의 임무는 거사 당일 박정희의 경호와 수행이었다. 이때 이틀 전에 경찰에 연행, 구속된 뒤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에 대해 추궁을 받고 있던 김덕승의 처가 찾아왔다. 남편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한웅진은 “며칠 참으면 절로 해결될 터이니 기다려 주세요”라고 달래 보냈다. 박정희, 한웅진 두 사람은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웅진은 박정희의 호위병으로 데리고 올라온 부하들이 묵고 있는 화신 옆
미화호텔로 돌아갔다. 박정희는 집을 나서 약수동으로 향했다.
 
 서울 약수동 김종락(김종필의 형)의 집에 아침부터 평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검은색 안경을 낀 이들이 많아 장교들임을 짐작케 했다. 은행 간부이던 김종락은 집 안의 아이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보냈다.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 늦을까 봐 일찍 출발했는데 회의 시간 10시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한꺼번에 오면 이웃에서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근처 다방에서 3, 4명씩 모였다가
들어오곤 했다. 참석자들은 박정희 소장과 김동하 예비역 해병소장, 김종필을 비롯하여 25명.
 
 공수단: 단장 박치옥 대령, 대대장 김제민 중령.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6군단 포병단: 6군단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대대장 신윤창 중령, 대대장 具滋春(구자춘) 중령,
대대장 白泰夏(백태하) 중령, 대대장 鄭五敬(정오경) 중령, 대대장 金人華(김인화) 중령.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김포 해병여단: 여단장 김윤근 준장, 대대장 오정근 중령, 부연대장 趙南哲(조남철) 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특수 임무 담당자: 오치성 대령, 옥창호 중령, 김형욱 중령, 이석제 중령, 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 

  
 박정희가 간단한 인사를 했다.
이어서 쿠데타군 출동 계획의 입안자인 朴圓彬(박원빈) 중령이 각 부대의 임무와 출동 시간을 설명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원래 박원빈은 한강 서쪽에 위치한 부대가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순서를 해병여단, 공수단, 33사단으로 제의했으나 김윤근 해병여단장이 반대했다. 그는 해병여단이 가장 먼 곳에 있으니 공수단 뒤로 해달라고 했다.
 
공수단 김제민 중령은 공수단에 차량이 부족하다면서 스리쿼터 수송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스리쿼터 한 대에
공수단 1개 팀이 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박원빈 중령은 6관구의 차량들을 15일 밤 10시까지
공수단 연병장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김종필이 신문지에 싼 돈을 돌렸다. ‘집에 양식이라도 사주자’는 취지였다.
해병대 몫은 30만 환이었다. 이 합동 작전 회의가 끝난 뒤 해병대의 네 사람은 따로 모였다. 오정근 대대장 등
세 영관 장교들은 여단장에게 불평했다.
 
 “왜 한강 인도교 통과의 선봉을 양보했습니까.”
 
 김윤근 준장은 찬찬히 설명했다.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소? 우리가 선봉이 되었다가 실패했을 경우, 해병대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소. 또 성공한다 하더라도 해병대가 선봉이었다고 하면 누가 집권해도 해병대를 경계하고 푸대접하게 될 것이고, 육군 측의 시기와 中傷(중상)이 첨가되면 해병대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으니 피해야지요.”
 
 합동 작전 회의를 마친 뒤 김종필과 이석제, 민간인 김용태는 남아서 문안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혁명 공약,
포고문은 김종필이 작성했다. 유승원 대령과 이석제 중령은 국민, 학생, 재향 군인, 국군, 유엔군 장병 및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이런 문건들을 검토한 뒤 김종필 중령이
박정희에게 가져가 최종 검토를 받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