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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7) 5월16일 새벽 3시, ‘D데이 H아워’

淸山에 2011. 2. 23. 09:47

 

 
 
5월16일 새벽 3시, ‘D데이 H아워’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7)/
“장도영 장군이 동의하든 안 하든 계획대로 한다. 그러나 장도영 장군 명의로 혁명한다.”
趙甲濟    

 

 

 
 
 擧事 자금
 
 박정희로부터 ‘혁명 자금 500만 환만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에게서 얻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황용주 주필이 김 사장에게 그 뜻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쿠데타가 발생했다. 김지태가 그런 부탁을 전달받았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는 알 수 없다. 김지태 사장은 5·16 직후 밀수 혐의로 구속되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운영권을 빼앗긴다. 협조해 주지 않은 데 대한 혁명 주체들의 보복이란 주장이 있다. 협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는
김지태 측으로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혁명 모의 자금을 마련하러 다닌 것은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민간인으로 참여한 김용태(공화당 원내총무 역임)였다. 김종필이 혁명 성공 후에 실토한 거사 자금 총액은 985만 환. 박정희가 네 차례에 걸쳐 총 40만 환을 냈다. 김종필이 제대비 90만 환을, 이주일 2군 참모장이 50만 환, 유원식 대령이 10만 환, 길재호 중령이 40만 환,
길 중령의 친구인 高鎭泳(고진영) 예비역 중령이 구멍가게를 판 돈 45만 환, 김용태가 150만 환,
실업가 南相沃(남상옥)이 550만 환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만 8,000환, 금 한 돈쭝이 8,000환이었다. 거사 자금 985만 환은 요즘 가치로는 1억 원 남짓하다. 그런 거사 자금으로 나라를 얻었으니 가장 효과적인 투자였던 셈이다. 박정희의 지도력과 민심·군심의
뒷받침 때문에 돈으로 누구를 매수할 필요가 없어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간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자금을 댄 사람은 중견 실업인 남상옥(뒤에 타워호텔 소유자)이었다. 그는 4·19 후에 유원식 대령을 통해서 박정희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박정희가 구상하는 혁명에 대해서 조언을 할 정도로 서로 믿는 사이로 발전했다. 1961년 3월28일 김종필이 박정희의 私信(사신)을 갖고 삼화빌딩 309호실로
남상옥을 찾아왔다. 남씨는 편지를 펼쳐 읽어 보았다.
 
 <국내 정국은 日益複雜(일익복잡)과 多難(다난)을 조성하고 있고 사회 풍조는 혼란과 허탈 일로를 줄달음하고 있을 뿐 조국과 민족의 前途(전도)에 암담한 憂愁(우수)가 뇌리를 去來(거래)할 뿐입니다. 然(연)이나 上帝(상제)께서 헐벗고 가난한 이 나라 이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는 한 또한 우리들 자신이 자립 갱생하겠다는 개척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한 낙심과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이런 시기일수록 大義(대의)를 위하여 大勇(대용)을 분발해야 할 시기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금일 이 서신을 지참하는 김종필 군은 弟(제)와 모든 것을 상의할 수 있는 知己之友(지기지우)이며 또한 弟의 姪壻(질서·조카사위)입니다. 目下(목하) 弟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위하여 金 君편에 자금을 좀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情長紙短(정장지단)하와 이만하고 拜眉之機(배미지기)로 미루고 더욱 保重(보중)하시고 건투하시기 祈望(기망)하오며 閣筆(각필)하나이다.
 
 朴正熙 拜上>
 

 

 

 
 
 이날 남상옥은 김종필에게 120만 환을 건네주었다. 4월4일엔 박정희가 직접 남상옥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남 씨는 또 100만 환을 주었다. 그 뒤 두 차례 김종필에게 100만 환씩 주었다. 5월13일 박정희는 남상옥을 집으로 불러 “5월16일에 결행하기로 했으니 마지막으로 부탁한다”고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갑자기 돈을 구할 수 없었던 남상옥은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서 400만 환을 구해서 김종필 편으로 보냈다. 남 씨는 월요일인 5월15일에 다시 100만 환을 보냈다. 5월14일 혁명 주체들의 마지막 작전회의 때 김종필이 “식구들에게 양식이라도 사 줍시다”
라면서 돌린 돈은 남상옥이 낸 것이었다(이상의 액수는 <5·16 혁명실기>에 기록된 것인데
김종필이 기억한 액수와 다소 차이가 있다).
 
 돈을 만드는 재주가 없었던 박정희는 대구에서 김덕승이란 민간인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1961년 3월, 박정희는 그에게 200만 환만 구해 달라고 했다. 김덕승이 며칠 뛰어보다가 구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이번엔 다시 300만 환을 구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5월1일 김덕승은 다시 빈손으로 박정희를 찾아가서 자신의 무능을 호소했다.
박정희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는 “여보 김 형, 무슨 수를 써서라도 500만 환만 마련해 주시오”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김덕승은 서울에서 한양산업주식회사란 건설업을 경영하는 吳仁煥(오인환) 사장이 떠올랐다. 박정희의 양해를 얻어 ‘군 불하물자가 있으니 급히 내려오라’는 요지의 전보를 쳤다. 김덕승은 대구로 내려온 오인환을 박정희에게 인사시켜 준 뒤 ‘혁명 자금을 보태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말에 겁을 집어먹은 오 사장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아는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쿠데타 음모를 제보하고 장면 총리한테까지 이 정보가 들어간다
 
 
 

 

 
 
 5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준비 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4월 말, 4·19 학생 데모 유치공작을 맡았다가 실패한 박종규 소령은 그 일의 뒤치다꺼리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4월24일 포섭했던 한 대학생이 박종규를 찾아왔다.
 
 “경찰이 우리가 시위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탐지하고는 쫓고 있습니다. 어디 좀 숨겨주십시오.”
 
 박종규는 2만 환을 건네주고는 보냈다. 이때 이낙선 소령이 오더니 “김종필 선배가 좀 보자고 한다”고 했다.
 따라간 곳은 명동 사보이호텔의 객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신경질을 냈다.
 
 “아직도 학생들과 손을 끊지 않았나?”
 
 “간부급과는 계속 접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만났어?”
 
 “한 30분 전에 만났습니다.”
 
 김종필은 동화통신에 난 기사를 보여주었다. 

 
 
 

 

 
 

 ‘모 예비역 육군 중령이 조종하는 정부 요인 암살단 간부 학생 한 명이 치안국에 체포되었다’는 기사였다. 김종필과 박종규는 자신들이 포섭했던 학생 중 한 사람이 경찰에 붙들려 진술한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박 소령은 다섯 명의 간부급 대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경찰에 붙들려 갈 때는 각자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배후 조종자라고
대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동화통신에 보도된 기사의 주인공은 과대망상증 환자로 밝혀졌다.
 
 4월26일, 김종필은 박종규 소령을 대구로 보내 반도호텔 내 장면 총리 사무실의 정찰에 필요한 자금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 박 소령은 박정희 소장의 관사를 찾아갔다.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하나 내놓고 장면 총리를 감시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덕승한테 부탁을 해놓았는데 오늘 오후에 오더니 어렵겠다고 하더군.”
 
 마침 그때 영천에 있는 육군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이 박 장군을 찾아왔다. 박정희는 한 준장에게서 3만 환을
빌려 차비에나 보태 쓰라면서 박 소령에게 주었다. 박종규는 그날 밤을 박정희의 관사에서
보내고 다음날 빈손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延期
 
 박정희 2군 부사령관에게 자금을 얻으려 대구로 내려갔다가 4월27일 빈손으로 올라온 박종규 소령은 상경 즉시, 명동의 자유중국 (대만)대사관 앞에 있던 왕실다방으로 갔다. 김종필과 김용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딱한 이야기를 듣고는 김용태가 나서서 돈을 구해 보겠다고 했다.
 
 다음날 박종규는 신당동의 박정희 장군 집으로 갔다. 상경한 박정희가 혹시 돈을 만들어 가져왔는가 싶어 갔더니 해병대의 김동하 예비역 소장이 와 있었다. 세 사람은 장면 총리 체포 계획을 의논했다.
 
 그 다음날 김종필은 박종규 소령을 데리고 김동하 장군 집을 찾아갔다. 반도호텔 안에다가 무역 회사 사무실을 하나 내고서 자연스럽게 총리를 감시하기로 했다. 무역 회사 사장으로는 김동하가,
전무로는 박종규가 위장하기로 했다.
 
 반도호텔 내에 사무실로 위장한 거점을 마련하여 장면 총리의 거동을 감시한다는 계획은 결국 돈을 구하지 못해 그만두었다. 박종규는 그 대신 호텔 내부의 정밀 정찰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가짜 사진기자 신분증을 소지한 채 카메라까지 메고 다녔다. 덕분에 호텔의 엘리베이터, 비상계단을 이용하면서 지형 정찰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장면 총리가 쓰는 808호실로 올라가려면 승강기와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7층에서 8층으로 통하는 문은 잠겨 있으나 쉽게 돌파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건물 양쪽에 붙은 철제 비상 사다리는 밤에는 지상에서 2m쯤
높이에 들려 있었다. 박종규는 808호실 부근의 복도를 배회하다가 사복 경찰관에게 두 번이나
검문을 당했다. 박 소령은 그때마다 기자를 사칭했다.
 
 총리는 방 4개를 쓰고 있었다. 그 옆방을 무턱대고 두드려 보았다. 일본 기자가 투숙하고 있었다.
박종규는 “전화 좀 씁시다”라고 말한 뒤 방에 들어가 내부 구조를 살펴보았다.
호텔 2층 모퉁이엔 통신실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5월3일, 대구 박정희 소장의 관사에서는 중요한 모임이 있었다. 5·16 쿠데타 작전의 작전참모역을 하던 박원빈 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수도권에 위치한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이 박정희와 머리를 맞대었다. 4월 말부터 2군 사령부에서 있었던 비상 훈련에 참여한 세 장교들은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찾아본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원빈은 “거사일을 5월12일에서 5월16일로 연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건의했다. 그는 “제가 5월13일부터 16일까지 주번 사령으로 근무하기 때문에 출동 명령을 내리기가 좋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생각해 보자”고 했다.
 
 5월6일, 박정희는 안동 주둔 36사단장 尹泰日(윤태일·서울 시장 역임)과 宋贊鎬(송찬호) 준장을 대구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윤태일이 “지금 결행하는 것은 다소 빠른 느낌이 든다”고 했더니 박정희는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박정희와 거의 일심동체처럼 움직이던 이주일 2군 참모장은 통신참모 박승규 대령에게 “5월 중순에서
늦어도 하순 사이엔 거사한다”고 암시를 주었다.
 
 5월8일, 박정희는 부산으로 내려가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 김용순 준장을 만났다. 거사 날짜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부산 지역을 책임져라. 방송이 나가면 부대를 동원하여 상황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5월9일,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 오전에 김종필은 이종태 대령의 발설로 방첩대가 5월12일 거사 계획을 알게 되었다는 판단을 했다. 이날 밤 10시 아스토리아호텔 객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박정희 장군을 비롯, 김종필, 오치성 대령, 김동환 중령, 김형욱 중령, 신윤창 중령, 이낙선 소령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박정희는 일단 5월12일 거사를 중지하기로 결정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5월12일, 박정희는 다시 대구에서 상경했다. 이 무렵 최경록 2군 사령관은 미국으로 장기간 출장 중이었으므로 박정희의 행동은 자유로웠다. 대구를 떠나기 전, 박정희는 광주의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구로 와서 이주일 참모장을 만나라’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를 태운 경비행기는 고향인 선산과 금오산 위를 날았다. 박정희는 이것이 고향을 마지막으로 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경비행기를 5군단 비행장에 내리게 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5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비행장에 나와 있었다. 박정희는 “이제 준비는 끝났다. 곧 연락을 줄 것이니 출동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
고 지시하고는 서울로 향했다. 
 

 
 

 

 
 

   박정희는 서울에 도착한 뒤 주체 장교들과 잇따라 만났다. 일본 음식점 남강으로 김재춘 6관구 참모장, 박치옥 공수단장, 송찬호 준장, 김종필을 불렀다. 김재춘은 이날 오전까지도 이날 밤으로 예정된 거사일이 연기된 줄은 모르고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쯤 박정희의 전화가 왔다.
 
 “오늘은 틀렸어. 최종적으로 날짜를 잡고 의논도 할 겸 남강으로 나와요.”
 
 김재춘이 남강으로 들어가는데 방첩부대장 이철희 준장과 서울 지구 대장 이희영 대령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목격되었다. 김재춘은 ‘이들이 벌써 낌새를 차렸군’ 하고 박정희에게 귀띔했다.
 
 “별것 아닐 거야. 저희들끼리 식사하러 왔겠지.”
 
 박정희는 장도영 총장을 지도자로 모시려고 공작한 것이 잘 안 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송찬호는 “장도영 총장에게 다녀왔는데 도무지 이야기가 안 되던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말로 결론을 내더라고 한다.
 
 “장도영 장군이 동의하든 안 하든 계획대로 한다. 그러나 장도영 장군 명의로 혁명한다.”
 
 이런 증언으로 미루어 장도영 총장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권유엔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를 쿠데타 지도자로 모시겠다면서 일을 꾸미고 있는
박정희를 잡아넣을 만한 결단력도 없었다.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 5월16일 새벽 3시를 ‘D데이 H아워’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혁명 주체 장교들은 15일 밤 11시까지 6관구 참모장실에 모여 박 장군의 지시를 받기로 했다. 박정희는 12일 밤에 김동하 장군 집으로 갔다.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이 와 있었다. 박정희는 5월16일로 거사일이 확정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장은 이날 육사 8기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을 불러 모아 5·12 거사의 연기와 새로운 거사일에 대해
의논했다. 이석제 중령이 말했다.
 
 “각하, 거사일이 늦어지니 정보가 누설될까 걱정입니다. 동지들도 불안해져 잠을 못 자는 형편인데 언제
혁명하실 작정입니까.”
 
 박정희는 씩 웃으면서 이석제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손바닥에다가 손가락으로 5·16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