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장교들은 장면 정부가 민주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의 3대 내용물인 자유, 복지, 안보 가운데 3분의 2(복지와 안보)가 缺格(결격)인 장면 정부는 이들에게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이름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무능과 부패는 장면 정부에 대한 민심과 군심의 이반을 불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한림은 친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내가 야전군을 믿는 것처럼 서울도 그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과 기능이 있으므로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고록 《세기의 격랑》). 5월15일, 이한림 중장은 그동안 야전군에 대한 업무 파악을 위해서 미루어 두었던 1군 창설 기념식 행사를 원주의 사령부 연병장에서 성대히 거행했다. 야전군 산하 전 중대의 대표들이 수천 旗(기)의 중대기를 들고 참석한 기념식은 장관이었다. 이 행사에 온 5명의 군단장, 20명의 사단장 가운데 내일 새벽에 거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5군단장 朴林恒(박임항), 5사단장 채명신, 12사단장 박춘식. 박임항은 만주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서 박정희와 이한림보다는 한 기 선배였다. 채명신, 박춘식은 육사 5기 출신으로서 박정희를 참모장으로 모시고 참모로 근무하면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한림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20개 사단이 박정희의 음모를 저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으나 음모의 긴 손은 바로 그의 발밑까지 와서 굴을 파고 있었다. 15일 오전 박정희의 밀사 이낙선 소령이 친서를 품고 1군 사령부 작전처 曺昌大(조창대) 중령을 찾아왔다. 조 중령은 1군 내 혁명 조직의 중심이었다. 이낙선이 전달한 친서는 박임항, 채명신 장군 앞으로 된 것인데 저녁 식사 후 전달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조창대 앞으로 된 친서와 이낙선을 통해서 구두로 전달한 메시지에서 박정희는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거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박임항 중장을 통해서 이한림을 설득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또 육사 8기 중령들이 접촉하지 않고 있던 포병참모 鄭鳳旭(정봉욱) 대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정봉욱은 6·25 때 낙동강 전선에까지 내려왔던 인민군 포병장교(당시 중좌)였다. 국군에 투항해온 그는 박정희가 사단 포병단장일 때 부하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창대는 쿠데타 지도자의 친서를 받은 직후 이종근, 심이섭, 박용기 중령에게만 내용을 알려주고 다른 장교들에겐 ‘오늘밤 9시 작업복 차림으로 박용기 집으로 모여라’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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