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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1) “오늘 저녁에 쿠데타가 일어난다는데 알고 있소?”

淸山에 2011. 3. 11. 13:25

 

 
 
“오늘 저녁에 쿠데타가 일어난다는데 알고 있소?”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1)/ 장도영, 이한림, 그리고 많은 장성들이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이를 장면 총리에게 보고하여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장면 정부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의 결여를 보여준다. 
趙甲濟    
 

 

 
 
 1軍과 6관구 사령부
 
 쿠데타軍(군)의 지휘소가 될 영등포 6관구 사령부에는 김재춘 참모장과 박원빈 작전참모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김재춘 대령은 먼저 黃山雄(황산웅) 수송관을 불러 이틀 전에 지시한 사항을 확인했다. 스리쿼터에 기름을 가득 넣어 두도록 지시했던 것인데 그 사이 누가 기름을 빼내 팔아먹었을지도 모르고 타이어가 터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명 주체로 포섭된 황 대위는 20대의 트럭을 2개 중대로 편성하여 10대를 공수단으로 보내고 나머지 10대는 비상 대기시켜 두라는 지시를 받아 두고 있었다. 김재춘은 본부사령 桂忠義(계충의)
소령을 불렀다. 그도 포섭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혁명 대열에 참여할 장교들이 오는데 대부분이 무장하지 않은 상태일 거야. 그러니 우리 본부에 있는 총과 실탄을 준비해 두게.”
 
 김재춘은 한 달 전부터 이미 衛兵(위병) 교육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붙여 1개 소대 병력을 본부사령 지휘하에 두도록 했었다. 이날 다시 제10경비중대에서 1개 소대를 뽑아 본부사령 아래로 배속시켰다. 본부 무기고엔 15발들이 탄창을 끼워 단발 사격을 하는 카빈 M1과 30발들이 탄창을 꽂아 자동 연발 사격이 가능한 M2가 200여 정이 있었다. 계충의 소령은 이들 소총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15일 밤의 주번 사령은 비상 출동 명령을 내리는 데 관계하고 본부의 병력을 지휘하는 등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되어 있었다. 박원빈 중령은 자신이 이날 주번
사령이라고 착각하여 박정희에게 이날을 거사일로 하자고 건의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날 주번 사령은 공병참모 하 중령이었다. 그는 육사 8기로 박원빈과는 동기였지만 포섭되어 있지 않았다. 김재춘 참모장과 의논하였더니 능수능란한 참모장이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김재춘은 2군 사령부 공병참모 朴基錫(박기석) 대령에게 전화했다. 박 대령은 육사 5기로서 동기 사이일 뿐 아니라 혁명군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박기석에게 부탁하여 하 중령을 대구로 불러 내릴 구실을 만들었다. 김재춘은 대구로 출장을 보낸 주번 사령 대리로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부관참모 李京華(이경화) 중령을 근무하게 하였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또 한 사람은 1군 사령관 李翰林(이한림) 중장이었다. 1940년 박정희와 함께 新京(신경)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들어간 이래의 친구 사이였다. 그의 휘하엔 5개 군단 20개 사단이 있었다. 적어도 수치상으론 이한림이 반대하면 어떤 쿠데타도 성공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군 정보기관이 활동하고 있으므로 적절히 대처할 것’으로 믿고는 적극적인 음모 분쇄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장도영, 이한림, 그리고 많은 장성들이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이를 장면 총리에게 보고하여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장면 정부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의 결여를 보여준다.
 
 

 

 
 

 많은 장교들은 장면 정부가 민주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의 3대 내용물인 자유, 복지, 안보 가운데 3분의 2(복지와 안보)가 缺格(결격)인 장면 정부는 이들에게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이름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무능과 부패는 장면 정부에 대한 민심과 군심의 이반을 불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한림은 친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내가 야전군을 믿는 것처럼 서울도 그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과 기능이 있으므로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고록 《세기의 격랑》).
 
 5월15일, 이한림 중장은 그동안 야전군에 대한 업무 파악을 위해서 미루어 두었던 1군 창설 기념식 행사를 원주의 사령부 연병장에서 성대히 거행했다. 야전군 산하 전 중대의 대표들이 수천 旗(기)의 중대기를 들고 참석한 기념식은 장관이었다. 이 행사에 온 5명의 군단장, 20명의 사단장 가운데 내일 새벽에 거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5군단장 朴林恒(박임항), 5사단장 채명신, 12사단장 박춘식.
 
 박임항은 만주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서 박정희와 이한림보다는 한 기 선배였다. 채명신, 박춘식은 육사 5기 출신으로서 박정희를 참모장으로 모시고 참모로 근무하면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한림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20개 사단이 박정희의 음모를 저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으나 음모의 긴 손은 바로 그의 발밑까지 와서 굴을 파고 있었다. 15일 오전 박정희의 밀사 이낙선 소령이 친서를 품고 1군 사령부 작전처 曺昌大(조창대) 중령을 찾아왔다. 조 중령은 1군 내 혁명 조직의 중심이었다. 이낙선이 전달한 친서는 박임항, 채명신 장군 앞으로 된 것인데 저녁 식사 후 전달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조창대 앞으로 된 친서와 이낙선을 통해서 구두로 전달한 메시지에서 박정희는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거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박임항 중장을 통해서 이한림을 설득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박정희는 또 육사 8기 중령들이 접촉하지 않고 있던 포병참모 鄭鳳旭(정봉욱) 대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정봉욱은 6·25 때 낙동강 전선에까지 내려왔던 인민군 포병장교(당시 중좌)였다. 국군에 투항해온 그는 박정희가 사단 포병단장일 때 부하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창대는 쿠데타 지도자의 친서를 받은 직후 이종근, 심이섭, 박용기 중령에게만 내용을 알려주고 다른 장교들에겐 ‘오늘밤 9시 작업복 차림으로 박용기 집으로 모여라’고 통보했다.
 
 

 

 
 
 
 조창대는 창설 기념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던 축구 경기장으로 가서 박임항, 채명신 장군을 만났다. “오늘 오후 6시에 여관으로 찾아뵙겠다”고 했다. 조창대는 저녁에 두 장군을 찾아가 박정희의 친서를 건넸다. ‘이한림 사령관을 설득하여 혁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게 친서의 요지였다.
 
조창대는 밤 9시 박용기 중령의 집으로 향했다.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 중령이 모였다. 안찬희 중령은 이한림 사령관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조창대는 박정희의 친서를 낭독한 뒤 불태웠다. 이들은 밤 11시엔 조창대 중령의 관사로 옮겨 다음날 새벽 5시 방송을 기다리기로 했다. 후방 지역의 쿠데타軍 장교들에겐 KBS의 아침 5시 혁명 공약 낭독 방송이 행동 지시가 되게끔 계획되어 있었다. 
  

 漏泄(누설)
 
 서울 근교에 주둔한 30사단은 1개 연대 병력도 되지 않는 예비 사단이었지만 수도권에 위치한 때문에 중요했다. 5월15일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은 출근하자마자 ‘오늘 밤에 비상 출동 훈련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연대로 내렸다.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이 기안하여 4월 말에 육본─6관구 사령부를 거쳐 수도권 부대에 내려 보낸 폭동 진압 훈련 계획(비둘기작전 계획)에 의거한 지시였으므로 의심을 받을 리가 없었다.
 
 참모장 李甲榮(이갑영) 대령, 90연대장 朴常勳(박상훈) 대령은 이백일에 의해 20여일 전에 포섭된 혁명 동지였다. 오후 1시쯤 이갑영은 박상훈을 데리고 사단 내 야산으로 올라가서 이백일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오늘 비상 출동 대기 명령이 시달된 것을 보니 혁명을 위해 출동하는 것은 분명한데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상의나 통보도 해주지 않는 이백일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박상훈 대령은 출동 부대의 지휘관은 자신인데 한마디 의논도 없었던 이백일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박 대령은 이백일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오늘 출동한다는데 사실인가. 나에겐 어째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는가. 나는 못 하겠다.”
 
 대강 이런 요지의 불평을 했다. 이백일도 신경질을 냈다.
 
 “못 하겠으면 그만두십시오.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밤 10시에 육본에서 사람이 올 텐데 그때 모든 것이 알려질 것입니다. 전투단장으로서 행동하기 싫으면 오후 5시까지 확답을 해주십시오.”
 
 박상훈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갑영 참모장이 들어왔다.
 
 “사단장 각하께 이 사실을 보고하시오.”
 
 박상훈은 사실상의 密告(밀고) 권유인 이 말을 듣고는 “밤 10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이갑영은 李相國(이상국) 사단장실로 갔다.
 
 “각하, 박상훈 연대장이 사적인 일로 만나 뵙고자 원합니다.”
 
 “약속이 있어 퇴근해야 하는데 빨리 오라고 하시오.”
 
 

 

 
 

 부름을 받고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는 박상훈 대령을 마중 나간 이갑영 참모장은
“사단장 각하께 모든 것을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박상훈 연대장과 이갑영 참모장이 사단장실로 들어왔다.
 
 “박 대령, 사적으로 할 말이 있다는데 뭐야?”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공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하, 우리 부대가 오늘 밤 作命(작명)에 의하여 출동하는 것 알고 계십니까. 오늘 이백일 작전참모한테 들었는데 제가 전투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아니 내가 모르는 출동 명령이 어디 있나?”
 
 이상국 사단장이 화를 내면서 캐묻자 박상훈은 실토했다.
 
 “이번 출동은 훈련이 아니고 군사 혁명의 성격을 띤 부대 동원입니다. 그동안 B형 전투단이란 이름을 붙이고 훈련을 해온 것도 혁명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상국 준장이 더욱 화를 내자 이갑영 참모장은 “사단장님,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하시면서 말씀하시죠”라고 달랬다. 이상국은 자신이 운전하는 지프에 박상훈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이갑영 참모장은 뒤차로
따라오고 있었다. 차중에서 이상국이 말했다.
 
 “연대장, 1000명도 안 되는 우리 예비 사단으로 무슨 혁명을 한다고? 만고 역적될 소릴랑은 하지도 말고
지금부터 내 명령만 들어!”
 
 이상국 사단장의 지프차가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삼거리에 이르렀다. 뒤따라오는 참모장 차를 기다리기 위해서 차를 세우고 사단장과 연대장은 내렸다. 여기서 연대장 박상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혁명 계획을 사단장에게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뒤따라온 이갑영도 다가오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오늘 밤 혁명군이 사단장님과 6관구 사령관님의 자택을 포위하고 두 분을 감금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상국 사단장 일행은 밤 8시30분쯤 서울 중구 무교동에 있는 삼희정이란 음식점에 도착했다. 이상국은 수행한 본부사령 池東植(지동식) 대위에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켜 놓으라는 지시를 해서 내보냈다. 식사를 하고 나오는 육본 정보국 金判吉(김판길) 대령과 마주친 이상국 장군이 말했다.
 
 “여보 김 대령, 오늘 저녁에 쿠데타가 일어난다는데 알고 있소?”
 
 “저도 비슷한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만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입니다.”
 
 

 

 
 
   
 김 대령은 육군 방첩부대로 전화를 걸었다. 곽 모 소령에게 “빨리 이철희 부대장을 찾아 이상국 사단장을 대면시켜 주라”고 했다. 이날 부대장 이철희, 副(부)부대장 백운상 대령, 서울 관할 506대장 이희영 대령은 소공동에 있는 한국회관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곳으로 조석일 중령이 뛰어왔다.
 
 “각하, 이상국 준장이 부대 소요 관계로 각하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부대의 소요는 자기가 수습해야지 왜 나한테 와서 야단이야.”
 
 한편 이날 행동에 질서가 없는 이갑영 참모장은 그새 시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서 이백일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전참모, 혁명 계획이 모두 탄로났어. 나는 지금 방첩대에 붙들려 가니 자네는 어서 피신해.”
 
 이런 전화를 하고는 삼희정으로 돌아왔다. 이상국 사단장은 박상훈 연대장에게 “지금 즉시 부대로 돌아가서 출동 대기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상국은 이갑영과 함께 지금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506서울지구 방첩대 사무실로 갔다. 이철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국, 이철희 두 사람은 육사 2기 동기였다. 물론 박정희도 육사 2기 출신이다. 
 
 

 

 
 
 “이 준장, 뭔데 야단이야?”
 
 “이 사람아, 오늘 밤 불태우고 죽고 한다네.”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어.”
 
 “아니야 이 사람아, 나도 지금 가족을 피난시키고 온다네.”(이상의 대화는 <5·16 혁명실기>에서 인용)
 
 이상국은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 사단에서 반란이 났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철희 장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장도영 총장과 연락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이희영 대령은 대장실에서 이상국 준장에게 쿠데타軍의 지휘 체계도를 그린 정보 도표를 보여주었다. 한 체계도의 맨 위엔 박정희, 다른 도표의 맨 꼭대기엔 박병권(당시 국방대학원장) 소장이 적혀 있었다. 혁명 지도자 박정희 장군 아래 30사단을 포함한 4개 사단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희영은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30사단에서 반란이 났으니 이것은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혁명입니다. 참모장, 연대장도 다 포섭되어 버렸습니다. 사단장님은 빼고요.”
 
 방첩대 곽 소령이 덧붙였다.
 
 “이들은 지난 5월12일엔 실탄 사격 후 출동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단장님의 성향으로 보아 쿠데타에 가담할 분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국은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에게 이 급보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