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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3) 陸英修에게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 보오”

淸山에 2011. 3. 12. 05:55

 

 
 
陸英修에게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 보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3)/ 朴正熙의 당부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 것, 문제는 순리대로 풀 것,
시민들에게는 친절할 것.”
趙甲濟   
 
 

 

 
 
 결단
 
 1961년 5월15일(월요일) 육영수는 신당동 집에서 중대한 일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근혜, 근영 두 딸을 학교로 보낸 뒤 그녀는 집일을 거들어 주던 아줌마를 불렀다.
 
 “고향에 가서 2, 3일 쉬다가 와요.”
 
 “갑자기 고향은 왜요?”
 
 아줌마는 육영수의 고향 근처 마을에서 온 사람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쉬고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차비를 넉넉하게 주어 보냈다. 이날 박정희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잇따랐다. 김종필, 장태화, 이낙선은 안방에서 박정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종일 문건을 읽고 고치고 정서하고 있었다. 육영수는 이들에게 커피와 과일을 대접해 올리면서 틈만 나면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헌 옷가지와 빨래거리를 찾아냈다. 딸이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박정희와 결혼한 이후 줄곧 같이 살아왔던 이경령은 딸의 거동이
수상스러워 물었다.
 
 “이 바쁜데 무슨 빨래냐. 무슨 일이 있느냐.”
 
 “아무 염려 마셔요. 어머닌 모르셔도 괜찮으셔요.”
 
 
 

 

 
 
 
 밤이 되었다. 육영수는 근혜, 근영, 지만 3남매를 이경령이 데리고 안방에서 주무시도록 했다. 육영수는 빨래를 한 가지씩 다리미로 다려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있던 방으로 건너갔다. 박정희는 장태화,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일어나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영수는 “저 보세요”라고
 불렀다. 육영수는 남편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항상 “저 보세요”라고 했다.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
 
 박정희는 서슴없이 “어, 그러지” 하고 아내를 따라 나갔다. 박정희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국민학교 5학년생 근혜를 굽어보고,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영, 지만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왔다.
장태화가 “무슨 숙젭니까”하고 물었다.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
 
 장태화는 이 순간의 육영수와 박정희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남편이 지금 나가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녀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도록 한 육영수의 기지와 긴박한 순간에도 그런 여유를 보여준 박정희의 인간성 때문이었다. 지금 한나라당 소속인 박근혜 의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 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 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님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님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박정희는 아내가 작은 가방에서 꺼내 주는 권총을 찼다. 군화를 신은 채 마루의 의자에 앉았다. 김종필 전 총리의 기억으로는 이때 전화가 왔다고 한다. 박정희가 받고 끊었는데 내용은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로 몰려와서 혁명파 장교들을 체포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전화는 30사단에서 거사 비밀이 누설된 것을 처음으로 알린 김재춘의 전화가 아니고 그 뒤에 진행 상황을 누군가가 보고한
전화로 추정된다). 박정희는 전화를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라고 한다.
 
 

 

 
 

 이때 한웅진 육군정보학교장과 장경순 육본 교육처장이 나타났다. 원래 두 사람은 김포 입구에 먼저 가 있다가 박정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경순 준장은 한웅진 준장이 묵고 있던 청진동 화신백화점 뒤 미화호텔에 밤 10시쯤 나타났었다. 한웅진은 방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한웅진을 만났다.
 
 “아니, 한 장군. 이런 때 늑장을 부리면 어떻게 하오.”
 
 “박정희 장군이 연락을 했다는데 우리더러 집으로 오라고 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틀림없어. 육성을 내가 들었어요.”
 
 두 사람은 지프차를 타고 신당동으로 달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박정희는 키 큰 두 장군이 나타나자 “군화 신고 그냥 들어와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다 탄로났어”라고 말했다. 장경순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고 무표정한 편이었다고 했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일어서면서 “갑시다”라고 거의 동시에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도 따라 일어서면서 “갑시다” 했다. 모두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현관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 보오”라고 했다.
 
 김종필이 골목으로 나와 보니 아까부터 있던 지프 두 대가 한편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종필은 방첩대에서 미행용으로 배치한 지프차라고 짐작했다. 김종필은 거사계획이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마당에 어차피 오늘 하룻밤만 넘기면 된다는 배짱으로 이 지프차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두 대의 지프차엔 조장 김응서가 지휘하는 7명의 506부대(서울 지구 관할) 방첩대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물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 밖에는 승용차가 두 대, 안에서는 수명이 음주 중’이란 보고를 무전으로 해놓고 대문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이때 장도영이 ‘박정희를 체포하라’는 명령만 한마디 내렸더라면 이들은 큰 저항 없이 쿠데타 지도자를 체포함으로써 거사를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기 중이던 지프차에 탔다. 뒷자리에는 한웅진, 김종필이 올랐다. 장경순은 데리고 온 권천식 소령, 한웅진이 데리고 온 申東寬(신동관) 소령과 함께 뒤차에 탔다. 이때 한웅진은 “아차, 내 권총”이라고 했다.
권총을 미화호텔에 두고 온 것이다. 박정희가 탄 차는 청진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경순이
그 뒤를 따르는데 검은색 지프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서류를 불태우고
 
 장경순(국회 부의장 역임) 준장은 박정희 소장 차와 자신이 탄 지프차 사이에 끼어든 검은색 지프차를 앞지르도록 운전사를 재촉했다. 추월당한 검은 지프차는 금방 장경순의 차를 다시 앞질러 박정희 차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장경순은 문제의 지프차가 군 수사기관에서 미행으로 붙인 것임을 직감했다. 박정희가 탄 차는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던 미화호텔 앞 길가에 멈추었다. 미행차는 보이지 않았다. 한웅진 준장이
호텔 객실에 두고 온 권총을 가지러 간 사이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다가갔다.
 
 “각하, 미행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치하고 갈 테니까 빨리 가십시오.”
 
 한웅진은 두 자루의 소련제 권총을 들고 나왔다. 박정희는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소련제로 바꾸어 찼다. 박정희가 탄 앞차가 다시 출발하여 안국동 쪽으로 달리자 어느새 미행차가 나타나 따라붙는 게 아닌가. 안국동-중앙청-시청을 거쳐 서울역 쪽으로 가느냐, 소공동 한국은행 쪽으로 가느냐의 갈림에서 장경순은 미행차를 가로막고 박정희가 탄 차를 서울역 쪽으로 달리게 한 뒤 한국은행 쪽으로 유도하려고 소공로로 달렸다. 뒤돌아보니 미행차는 속지 않고 박정희 차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장경순이 탄 차가 다시 미행차를 추월했다. 장경순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아무래도 처치해야겠다고 서두르는데 미행차는 삼각지를 지나서 한강 인도교를 눈앞에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미행차에 탔던 김응서 대위는 이때 무전으로 “11시쯤 박정희 소장을 포함한 2~3명이 신당동 자택을 출발하여 지금 삼각지를 지나 한강 인도교를 건넜습니다”라고 506부대로 보고한 뒤 철수한 것이다. 한강 인도교를 넘기 직전 박정희와 동행했던 김종필이 내렸다. 김종필은 일이 잘못 되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처삼촌을 전송하는 기분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김종필은 내리면서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김종필은 뒤따라 온 자신의 지프차를 타고는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달렸다.
 
 장경순은 미행차를 따돌린다고 이리저리 차를 몰게 하는 바람에 한강 인도교를 넘었을 때는 박정희 차를 놓쳐 버렸다. 사육신묘를 지나 길이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곳에 갔더니 박정희가 지프차를 세워놓고
내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뛰어오는 장경순에게 “왜 늦었소”라고 한마디 한 박정희는 다시 차에 올라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이 시간 이석제 중령은 6관구 사령부 앞에서 애타는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李 중령은 집을 나올 때 45구경 권총은 허리에 차고 작은 리볼버는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불안한 만큼 권총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권총을 만지면서 하루 전날 마지막 작전 회의에서 박정희가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 것, 문제는 순리대로 풀 것,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친절할 것.”
 
 밤 10시 이석제는 지프차를 타고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 유승원 대령, 李亨柱(이형주) 중령 등과 만났다. 이석제만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행정반장인 이석제는 자신의 지프 뒷자리에 여섯 개의 서류 보따리를 두고 있었다. 집권 후에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부처별로 추진할 정책안, 민주당의 주요 정책안, 장차 기용할 인물들의
명단과 이들에 대한 자료, 혁명 초기에 사용할 각종 전단, 방송문, 성명서, 대외 메시지, 후진국 경제 자료,
 입법 자료, 혁명 법령 따위가 들어 있는 보따리 때문에 뒷자리엔 이형주만 탈 수 있었다.
 
 

 

 
 

 차가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무장한 헌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육본 검열단에서 왔다”고 해도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이석제는 차를 돌려 사령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세웠다. 차에서 내린 이석제는 정문 부근에 20여 명의 장교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박 장군 오셨나?”라고 물었다.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석제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 마지막 작전 회의가 생각났다. 혁명군 출동 계획을 짠 박원빈 중령을 향해서
이석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출동 부대의 지휘관들에 대한 조치 내용이 없습니다. 이들 지휘관들은 사전에 연금시키고 통신은 두절시켜야 합니다. 만약 反혁명 세력이 선수를 쳐서 부대를 장악하면 병력동원에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박원빈 중령은 “뭐 그럴 것까지 있나”란 태도였고, 박정희도 침묵을 지켜 이석제의 건의는 묵살되었다.
 이석제는 속으로 ‘박원빈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하는 원망이 생기더라고 한다. 이석제는 이 순간 정문의 병력이 쿠데타를 저지하려는 6관구 사령관 측에서 배치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박원빈 씨는 그때 정문에 배치한 병력은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友軍(우군)이었다면서 ‘작전참모를 만나러 왔다’고 했으면 통과시켜 줄 것인데 이석제 중령이 ‘육본에서 왔다’고 하는 바람에 통과시켜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한 이석제는 지프차에 실어둔 혁명 관련 서류들이 걱정되었다. 특히 혁명이 성공할 경우 기용하려는 인사들에 관한 서류는 엉뚱한 피해를 부를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석제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형주 중령에게 “형주야, 나를 좀 도와다오”라고 했다.
 
 “왜 그래?”
 
 “상황이 심상찮다. 우선 인사 서류를 태워야겠다. 좀 찾아줘.”
 
 이형주가 뒷자리에 수북이 쌓인 보따리를 풀어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바깥으로 던졌다. 이석제는 이를 받아 성냥불을 그어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는데 별판 달린 지프차 한 대가 정문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탄 차였다.
이석제는 서류 소각을 중지하고 자신의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는 박정희의 지프차 뒤에 붙었다.
 
헌병이 “누구야?”라고 했다. 2년 전 6관구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나야”라고 위엄 있게 말했다. 헌병들은 안으로 전화를 걸더니 김재춘 참모장의 명령을 받아 바리케이드를 치워 주었다. 이 순간 바깥 담벼락에 붙어서 숨어 있던 장교들 수십 명이 우─ 하고 박정희 장군 차의 뒤에 붙어 사령부 안으로 들어왔다.
장교들은 걸어서 가고 박정희, 이석제의 지프차는 사령부 건물까지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