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32) “각하, 폭로된 것 같습니다”

淸山에 2011. 3. 11. 14:34
 

 

 
 
“각하, 폭로된 것 같습니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2)/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 장병들이 귀대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 비상이 걸리니 우리 편이 아닌 장교들까지 소집되어 부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趙甲濟   
 

 

 
 
 張都暎의 주저
 
 5월15일 오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이철희 방첩부대장으로부터 “軍警(군경) 합동으로 김덕승 건을 조사했는데 이 자는 사기꾼이고 박정희 소장 거사설은 완전한 조작이다”는 요지의 수사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썼다. 그의 이 증언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배치된다. 경찰을 지휘하여 이 수사를 한 검찰의 이태희 총장, 서울 지구를 관할하던 506방첩부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 총장에게 ‘김덕승은 쿠데타 음모 그룹의 일원이며 즉시 박정희를 구속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장도영은 이날 이철희로부터 보고를 받고는 ‘박정희는 참 모략을 많이 받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장도영은 정보참모부장 金容培(김용배), 참모차장 張昌國(장창국)과 함께 교동에 있는 은성이란 한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퇴근했다. 김용배는 그동안 미국으로 장기간 출장갔던 최경록 2군 사령관의 대리로 대구에서 근무하다가 최 장군이 歸任(귀임)함으로써 돌아와 처음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저녁 8시쯤 은성에서 만난 세 사람은 술잔을 돌리면서 閑談(한담)을 하고 있었다. 세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총장을 찾는다는 전갈이 있어 장도영은 마루로 나갔다. 방첩부대 조사과장 조석일 중령이 댓돌 위에서 경례를 하면서 “급한 보고를 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라고 했다. 장도영은 “그래요? 그럼” 하면서 마루 건너에 있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조 중령은 “30예비사단에서 일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이상국 사단장의 보고가 있습니다. 이 장군이 지금 506에 와 있습니다”라고 했다. 장도영은 김용배, 장창국 장군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506부대 사무실로 갔다.
 
 이상국 준장은 좀 흥분된 어투로 총장에게 보고했다. 장도영은 그 보고 내용이 ‘이백일 중령이 부대 장병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야간 훈련을 빙자하여 부대를 출동시켜 사단장과 그 가족까지 살해하려 한다’는 요지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장군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순히 사단장에게 감정을 품은 장교가 일으킨 소요 정도란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국은 反혁명 사건 재판에서 자신은 ‘박정희 소장이 군사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고 이백일 작전참모도 거기에 가담하여 사단장 몰래 병력을 출동시키려 한다’고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장도영은 이상국을 질책한 다음 曺興萬(조흥만) 헌병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국 사단장이 거기로 가면 헌병 2개 중대를 차출하여 주고 대령을 한 사람 붙여 30사단으로 보내라.”
 
 장도영은 이어서 육군방첩부대 副(부)부대장 백운상 대령에게 “30사단에 가서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상국 사단장은 6관구 헌병대로 가서 1개 분대의 헌병을 호위용으로 얻어 30사단으로 향했다. 장도영은 30사단을 관할하는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을 찾았으나 연락이 닿질 않았다. 그는 이어서 육본의 주번 사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이 없는가.”
 
 “오늘 저녁 서울 지구 주둔 부대들이 야간 훈련을 하게 되어 있는데 총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장도영 총장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육본 작전참모부 당직 장교를 찾아 물으니 ‘이미 훈련 계획이 하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공수단은 한강 백사장에서 야간 낙하훈련을 하게끔 되어 있다고 했다. 장도영은 박치옥 공수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박치옥 대령은 “오늘밤 훈련은 비둘기작전 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미 하달된 육본 작전참모부 훈련 지시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대답하더란 것이다(회고록).
장도영은 “훈련 계획을 즉각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부평의 33사단장 安東淳(안동순) 준장에게도
훈련 취소 지시를 내렸다.
 
 이때가 밤 10시30분쯤. 장도영은 ‘자신도 모르는 야간 훈련을 취소시키는 명령을 내려 놓고도 아직 이 사태가 진행 중인 박정희의 쿠데타라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는 저녁 식사 도중에 급보를 듣고 506 사무실로 달려왔기 때문에 이때쯤 허기가 났다고 한다. 운전병에게 바로 옆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켜오라고 했더니 이미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은성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직도 김용배, 장창국 장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은성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에겐 여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야간 훈련 계획을 취소시킨 것만 언급했다. 두 사람과 헤어져서 귀가하는 길에 장도영은 다시 서울지구 506방첩대에 들어갔다. 자신이 명령한 사안의 조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때 조흥만 헌병감이 전화를 걸어 왔다. 육본 장교 20여 명이 야간 훈련을 감독한다면서 영등포에 있는 6관구 사령부로 모여들고 있다는 보고였다. 장도영은 이 보고를 듣고는 ‘속히 헌병들을 급파, 훈련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을 귀가시켜라’고 명령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즉, 장도영은 아직도 일련의 사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6관구로 모여들고 있는 장교들을 단순히 귀가 시키려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장도영은 이어서 6관구 사령관(서종철 소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빨리 귀관이 사령부로 나가 부대에 비상을 걸어 상황을 장악하라. 육본 장교들을 해산시키고 불응하면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때쯤 비로소 박정희 소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던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 장군을 찾아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말들이 사실이라면 장도영은 30사단의 반란 사건, 자신도 모르게 잡혀 있는 야간 기동 훈련 계획을 보고받고도 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런 일련의 사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가 된다.
 
 506부대장 이희영은 그러나 장도영으로부터 ‘박정희를 미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총장이 맨 처음 506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였다고 주장했다. 그 명령에 따라 金應瑞(김응서) 대위 이하 약간 명의 수사관들을 무전기가 있는 지프 두 대에 태워 신당동 자택으로 급파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집 바깥에 차를 세우고 안을 감시하고 있던 김응서 대위 측에선 “지금 옥내에서 수명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이희영 대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때 장도영 총장이 이희영 대령에게 “즉시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라”고 했더라면 무난히 붙들 수 있는 기회였다. 장도영은 너무나 당연한 ‘쿠데타 지도자 체포 명령’을 이날 밤 내리지 않았다. 박정희가 체포되었더라면
쿠데타는 불발되었을 것이고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황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이날 밤 거사 사실을 보고받고도 아주 한가하고 미온적인 대처를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는 우선 쿠데타의 지도자 박정희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쿠데타군을 저지하고 분쇄하기 위한 대규모 진압군 동원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 급박한 시간에도 마치지 못한 저녁 식사를 끝내기 위해서 식당으로 돌아가 한담을 하고 나타났다.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지휘소를 육본이 아니라 지구 방첩대
사무실로 잡아 여기저기 전화만 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의구심으로 발전한다. 즉,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설득을 여러 번 받아 왔던 장도영은 막상 쿠데타가 일어나자 어떤 미련 때문에 과감한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그것이다. 장도영은 쿠데타軍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 약 여섯 시간 전에 박정희의 거사를 알았으므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박정희 체포, 쿠데타軍의 출동 저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혁명군 작전의 기획자이던 6관구 사령부의 박원빈 중령은 이날 밤 저녁 식사를 바깥에서 마친 뒤 부대로 들어와서 초조한 시간을 빨리 보내려고 마작을 하고 있었다. 밤 9시30분쯤 주번 사령으로부터 “서종철 사령관이 전화를 걸어 와 박 중령을 찾았는데 모른다고 했다”는 귀띔이 있었다. 박원빈은 이 시간에 사령관이 찾는다는 게 꺼림칙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참모장과 연대장이 사단장에게 거사 계획을 밀고하여 자신은 피신 중이란 것이었다. 박원빈은 아까 온 사령관의 전화도 이와 관계가 있겠구나 하는 판단을 했다.
 
 이때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은 이상국 준장으로부터 급보를 들은 뒤 6관구 헌병대로 나와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서종철은 또 주번 사령한테 전화를 걸어 박원빈 중령을 찾았다. 없다고 하니까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빨리 헌병대로 나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원빈은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말했다.
 
 “어디서 전화가 걸려 오거든 사복으로 갈아입고 친구 아들 돌 잔치에 갔다고 하시오.”
 
 

 

 

  
 그 직후 서종철 사령관이 직접 박원빈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받아 남편이 시키는 대로 말하니까
서종철 소장은 “사복을 입고 나갔습니까, 군복을 입고 나갔습니까”하고 캐물었다는 것이다.
 
 “저도 외출했다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 뜸을 들인 뒤 그녀는 “사복을 입고 나갔다”고 말한다는 게 “군복을 입고 나갔습니다”고 말해 버렸다. 자신의 실언에 놀란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남편이 외출 나갔다가 오더니 서류 뭉치를 주면서 땅 속에 파묻어 두라고 했던 것이다. 그 서류는 5·16거사 작전 계획서였다. 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겁이 났던 박원빈 중령의 처는 서류를 불태우려고 아궁이에 넣고 성냥을 그었는데 손이 덜덜 떨려서 잘 되지도 않았다.
 
 박원빈은 본부사령 계충의 소령을 불렀다. ‘사령부 경계를 철저히 하고 내 허가 없이는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도록’ 지시한 뒤 그는 차를 내어 부평 33사단으로 달렸다.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과 전투단장 이병엽 대령을 불러냈다. 박원빈은 “30사단은 정보가 누설되어 희망이 없다. 33사단은 꼭 제대로 출동해야 한다”고
못을 박고는 돌아왔다.
 
 이날 밤의 혼란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에게도 이날(5월15일) 저녁은 지루하고 초조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려고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에 갔다. 커피숍에서 그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헌병 백차가 신세계백화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괜히 불안해졌다. 그는 호텔을 나왔다. 퇴계로를 거쳐 남대문 쪽으로 가다가 차를 세우고는 약방 앞 공중전화를 잡아 들었다. 6관구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박원빈 중령을 찾았다.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번사령을 바꿔.”
 
 “이경화 중령입니다.”
 
 “지금 시내에선 헌병 백차가 질주하고 있는데 사령부엔 아무 일이 없나?”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 장병들이 귀대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작전 참모 어딨어?”
 
 “안 보입니다. 비상이 걸리니 우리 편이 아닌 장교들까지 소집되어 부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알았다. 내 곧 들어간다.”
 
 
 

 

 
 

 원래 혁명계획은 사령관과 일반 장교들이 퇴근한 6관구 사령부에 주체 장교들끼리 모여서 쿠데타 작전의 지휘소로 이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출발에서부터 빗나가게 된 것이다. 김재춘은 다시 박정희 소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더니 바로 박정희가 나왔다.
 
 “각하, 폭로된 것 같습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 그럼 어떡할래.”
 
 박정희는 난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나가야죠, 뭘 어떡합니까. 빨리 6관구로 나오세요. 제가 나가서 우선 지휘할 테니까 하여간 빨리 나오세요.”
 
 “알았다.”
 
 박정희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5·16 거사에 대한 기록에는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박정희가 태연하게 “제2안대로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제2안이란 비밀이 누설되었을 때 지휘관의 감금 등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거사를 강행한다는 시나리오였다. 김재춘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고 ‘제2안’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춘은 후암동 집으로 갔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권총을 찼다. 아내에겐 “비상이 걸려 부대로 들어간다”고만 했다. 옷을 갈아입고 대문까지 나오면서 ‘두 번 다시 못 만날 길이 될지 모르는데 작별 인사를 해야 하나’하고 고민했다. 3남 1녀를 두고 있었던 김재춘은 이들에게 눈길을 한 번씩 준 뒤 아무 말 없이 거리로 나왔다. 지프차를 타고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는 벌써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헌병들이 통제를 하고 있었다. 김재춘이 큰 소리로 호통치듯 말했다.
 
 “나 참모장이다. 바리케이드를 걷어라.”
 
 이때 이상한 물체들이 차를 향해 몰려오는 것이 전조등 불빛 사이로 보였다. 주체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헌병들이 통과시켜주지 않자 어두운 담장에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김재춘이 나타나자 우─ 하고 몰려든 것이다. 김재춘은 “육본에서 온 비상 훈련 감독관들이다. 다 통과시켜라”고 헌병들에게 명령했다. 김형욱, 유승원 등 20여 명의 장교들은 6관구 사령부로 몰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