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선(酒仙) 10걸
고금을 통틀어 각계 인사들이 추천한 주선은 모두 140명,
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들을 망라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으로
1위-황진이가 선정됐다.
낙주종생의 기라성 같은 대장부들을 젖히고 가장 많은 17명의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이라 불리는 그녀는 여성으로서 일종의 당연직처럼
추천을 받은 셈이다.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란 시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시서음률과 술로 당대의 문인, 석유들에게 높이 샀다는 점에서 인정하였다.
말하자면 주선 중의 주선이자 '한국적 낭만파의 거장으로 떠올려진 셈이다.
2위-술과 시와 자기 이상에 취해 살다간 수주 변영로(변영노)가 차지했다.
두주불사의 기행을 담은 (주정) 40연>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 살 때 술독에 기어올라가 술을 품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다.
또 그는 성대 뒷산에서 오상순 이관구 염상섭 등과 함께
술에 취해 벌거벗고 소를 탄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그를 가리켜 '타이틀매치다운 타이틀매치를 위해 살다간 주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3위-조지훈 시인을 두고 '신출귀몰의 주선' 또는 '행동형 주걸'이라고 한다.
통금은 안중에도 없고 야밤에 주붕의 집을 습격,
대작하다가 새벽에 귀가하기가 예사였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해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4위-김병연은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인 김삿갓은 풍류가 넘치는 주선이다.
장원급제까지 했으나 자신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 방어사의 손자임을 뒤늦게 알고 일생을 방랑하며 술과 시로보냈다.
동가식 서가숙하며 시를 지어주고 술을 얻어마셨다는 '작시걸주' 등 많은 시를 남겼다.
5위-김시습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선이다.
그는 당대의 비리를 닥치는대로 조롱하며 중이 되어 산천을 누볐다.
당시의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쁜 놈, 영상이고 뭐고 집어치워라"하고
일갈했을 만큼 세상과 담을 쌓으며 한평생을 방랑으로 보냈다.
6위-백호 임제는 우리나라의 주선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진이 묘 앞을 지나다가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의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잘 설명해 준다.
일생을 술로 벗삼으며 봉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가운데
시문으로써 인간미가 돋보이는 '백호집'을 후세에 남겼다.
7위-김동리 소설가도 10걸에 속했다.
네 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댄 타고난 애주가로 알려진 그는 술이라면 청탁 불문의 주량 제일주의,
그러면서도 끝까지 주석을 이끄는 대주가로 명성을 얻었다.
8위-임꺽정은 신출귀몰의 의적으로 관가를 닥치는대로 부수고 재물을 털면서도
유유히 한양에 나다나 술을 마셔댄 임꺽정을 두고 '심장에 털난 주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정 출신이던 그는 조선조 명종 10년(1555년)에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12년간 황해도 일원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적으로 종횡무진 누볐다.'
9위-대원군은 왕권을 손아귀에 쥐기 전 막강한 세도가들을 의식,
철저히 파락호로 위장해 술로 야망을 불태운 술의 영웅이다.
세도가들의 잔칫집이나 시회에 나타나서 술을 얻어 먹고
대감의 품계를 가지고 여염집 상가를 버젓이 드나들었다.
때론 시정의 잡배들과 어울려 대작을 하는가 하면, 투전판에까지 끼어들기도 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난초 그림을 팔아 충당하면서 그는
술독에 파묻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세도가들의 정보를 입수했다.
후일 야망을 달성한 뒤에는 파락호 시절의 주붕인 심복들을 중용해
술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주선이다.
10위-원효대사, 연산군과 술의 신사로 일컬어지던 마해송,
술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 자칭하던 심연섭,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긴 박종화는
각기 5명씩의 추천을 받아 나란히 10위에 오른 주선이다.
주선의 추천 기준은 풍류와 품위, 주량이 뛰어나고
낙주종생(역사적 인물의 경우)의 일생을 마친 인믈들로 국한하였다.
원효는 고대의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주선의 반열에 올랐다.
화엄종의 고승으로서 신라 무열왕 때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눠 대유학자
'설총'을 낳은 승려이기도 하다.
화엄경을 노래로 지은 무애가를 부르며 시정의 술집에까지 출입, 기녀들에게 불법을 전파했다.
범사에 구애받지 않고 비파를 타며 '깊은 삶의 멋과 슬픔'을 노래한 행동형의 주선이다.
주지육림속에 묻혀 산 주선으로는 연산군이 단연 으뜸에 속한다.
채청사, 채홍사를 두고 8도의 미녀들을 뽑아 춤과 술과 노래를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주선이라고 불린다.
마해송은 '따뜻한 청주 한잔을 컵에 따라 1시간 동안 핥아 마시는
술의 신사요 선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南載熙 씨 등).
방안에는 늘 술과 안주를 준비해두고 주야불문
조금씩 마시는 선비풍의 기질을 지니며 술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컬럼니스트 심연섭은 일반적으로 술을 즐기는 것으로 소문난
언론인 중 첫손에 꼽히는 애주가였다(白承吉, 林升準 씨 등).
서울 명동, 무교동 일대의 단골 술집이 컬럼의 산실이었고,
스스로 '한국에서 술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며 술과 함께 살다 갔다.
월탄(月灘) 박종화는 한창 마실 때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기고 있다.
현진건(玄鎭健), 김기진(金 基鎭), 이상범(李象範) 등 당대의 모주꾼들이 모두 주붕들이다.
일생을 술과 원고지에 묻혀 지낸 주선으로 '댁에서 내놓은 술도 좋았지 만 알찌개 등
술안주가 별미였다'고 회고하는 인사도 있다. (宋志英, 鄭韓模 씨 등).
비록 10걸에 들지는 않았지만 술을 마시면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써주던
대주선'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李圭報)(李御寧씨 등) 와
집을 팔아 술을 마시며 '내가 네 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이젠 내 안에 들어와 보라'며
웃은 국어학자 권덕규(權德奎)(李興雨 씨)도 특출한 주선으로 손꼽힌다.
여성으로는 모윤숙, 최정희씨 등이 추천되기도 했고(趙敬姬 씨), '꿈과 정치,
환상과 현실을 술로 달랜' 여운형(呂運亨)이 주선의 후보에 오른 것도 이채롭다(李洪九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