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60 나의 이야기 학창시절의 사진 & 카메라

淸山에 2026. 1. 10. 07:06

지난 주에 감기로 약속을 하지 못한 한방 치료 오늘은 잘 받았다.

기온이 약간 추워 위 옷을 벋어 치료를 받는 일이 잘 될까 염려는 되었지만 잘 견디며 안마 침술 부황치료 모두를 잘 끝냈다.

 

그리고 지압을 늘러 안마하는 곳곳에 맺힌 근육의 통증이 잘 빠지며 시원하다할까 몸이 개운하였다.

 

아무튼 이런 한 시간 가량을 맞기에 그 시간 엎드려 별의 별 생각이 나래를 폈다.

 

오늘은 아침부터였는지 대학 때의 과 친구들 모습이 떠 올랐고, 또 교양학부에 함께 수업을 들었던 농학과, 임학과, 그리고 가정학과, 간호학과, 그리고 도예학과와 1년의 강의를 들었다. 이 중에 가정학과, 간호학과는 여성들로 당시에 꽤 선망의 여학생이라 다른 학과는 우리를 멈청 부러워 했었다.

 

대학학부 중 농과대학은 가장 선호가 되지 않던 대학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당당히 대학예비고사를 패스하여 막바지에 들어 온 과 선택이라 결코 꿀리고 싶지 않았고 대학교 전체 과 선택으로 학생들 취향에는 가장 떨어지기에 그 점은 감수해야 했다.

 

아무튼 교양학부 시절의 수강은 위 학과가 모두 참여하였으니 자연히 여학생들과 만나거나 대화는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각기 서먹하게 거리를 띄어 수업을 들었지만 어느 시간 흘러서는 각기 얼굴도 마주해야 했고, 그러는 중 각각의 취향에 따라 좋아할 타입은 생겼으리라.

 

아마도 여름 방학 후 후반기 수강 중이겠다. 여학생 중 노문자라는 귀여운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경기여고 출신으로 어찌어찌 소문을 들어 그 출신 고교로 볼 때 꽤 실력이 있던 것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어느 순간 나하고도 대화는 곧잘 하였었다. 한번은 대운동장에서 과 대항 운동 시합을 하였던가싶구나. 태양의 따스한 햇살 중에 둥근 운동장의 스탠드 층에 앉아 노문자 학생과 대화 하던 중 그 옆에 앉은 그녀 어머니라고 건네 받아 인사를 하였었다.

 

4년 대학 중 학생의 어머니가 대학에 찾아 왔다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겠다. 노문자는 보통 키(나보다 조금 작았다)에 보통 체력이었다(내가 보는 느낌으로). 그녀의 옆 어머니도 그런 타입이었으며, 당시 연령으로 50직전이겠더라. 아무튼 간단히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더 어떤 말 나누지는않고 그 위치를 떠났다. 당시가 1969년 혹은 1970년이라 55년 전의 일이다. 그후 지금까지 그 이상 어떤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그때를 떠올리니 새로운 내 생각에 휩쌓였다. 즉 그녀의 어머니가 그때 그곳에 찾아 온 것이 보통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노문자는 그녀의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고 보살핌에 경기여고에 들을 정도로 좋은 공부를 하였을터, 그 부모의 간섭 혹은 학구열은 좋았겠더라. 아울러 어떻게 자녀의 대학에 찾아 와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을까? 이것이 지금 나에게 새로 떠 오른 생각이었다.

 

첫째는

가정의 귀한 딸애가 다니는 대학에 관심이 되어 찾은 것은 다른 가족과 다른 남다른 관심과 자녀의 애증이 있어 찾았을 것으로 보였다.

 

둘째는

그 관심에 뜻이 상호간 맞으니 그녀의 어머니가 대학교를 찾았을터 거기에는 노문자가 무엇을 보여주려는 의도(계획)가 있지 않았을까싶다. 그것이 나의 만남이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오늘 생각에 들었다. 아니면 우연의 일이 었던가?

 

노문자의 소개로 그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었다.

그런데 그녀는 특별히 반가움의 표시 없는 모습에서 나는 더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었다.

 

만약에 그녀(그 어머니)가 더 다른 말을 건넸으면 나도 그 대답을 하느라 머물 시간이 더 있었을터, 그런 것이 없음으로 나는 스텐드의 다른 쪽 친구 찾아 그곳을 떠난 것이다.

 

오늘 갑자기 한방 치료 중 그 생각에 잡히자 노문자가 나를 한 단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을 심중에 그녀 어머니에 나를 소개하였었고, 그녀의 머머니 의견이 어떠할지에서 노문자는 나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던가 싶었다.

 

막 대학 교양학부 1년의 반을 지났으니, 이제야 각각의 선호도에 따라 이성 친구의 순서가 되는 시기였는데, 노문자나 나나 그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끝났다는 것이 되었다.

 

이때 그녀의 이름은 그때도 지금도 전혀 모르는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간호학과 생으로 쳬격은 평균으로 얼굴의 이쁨은 지금도 매우 좋게 보았다. 교양학부 1년 중 자주 그녀와 마주쳤었다. 그러나 특별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대학 1년 때 친구들과 대학 곳곳에서 사진 찍을 일이 많아 그때 앞을 지나는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였다.

 

당시 나는 Canon 35mm SLR Camera or Canon QL 35mm이 있었다.

 

https://blog.naver.com/hcsuk/222044351670

 

 

 

 

 

 

 

정확한 모델은 아직 자료에서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내 집의 깊숙한 방에 남아 있어 어렵지 않으나 아직 꺼내지 않아 생략한다.

 

아무튼 그 카메라을 누님이 가지고 있어 자연히 내가 주로 사용하던 카메라가 되었다.

나의 고교 학창 시절 그 카메라로 많은 사진을 찍어 인화하였다. 대학에 들어서도 이 카메라가 나의 가장 아끼는 기기로 대학 4년의 소중한 자료로 남은 사진이 되었다. 아울러 졸업후 군 시절 혹은 사회 생활 중에도 이 카메라의 작품이 나의 역사로 남았으니 그 흔적은 나의 삶 속에 비친 역사로 나의 이야기가 될 오늘의 글에 그 사진과 카메라가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의 노문자도 궁금하였지만 이름은 알 지 못한 그 간호학과 여학생은 얼굴 생김과 전체 체형 윤곽이 너무 예뻐 궁금한 관심은 빠지지 않는다.

 

또 친구 우헌기가 있다.

이는 동성  고등학교 출신?인가 1950년 생으로 그의 어버지는 당시 커다란 회사의 운영자로 알고 그 부모를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가끔 집으로 불러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그 동생(우두기)은 함께 보았지만 부모의 모습은 좀체 볼 수 없었고, 그 집의 가정을 돌바주는 아주머니가 있어 그것이 다였다. 또 그 집에는 벤츠 220이 있어 당시는 최고의 고급차로 눈길을 끌게 하였다. 어느날 그 친구와 그 차를 타고 장충동 거리로 나갈 때다. 앞에는 운전기사분이 운전으로 그 옆 자리는 친구 헌기가 앉았고, 나는 뒷 좌석에 앉았다. 차내는 하얀 시트로 덮여 깨끗했고, 검정색 차량은 윤기가 반짝하여 고급차 모습이 넘쳤다. 나는 뒷 좌석에 앉아 지나는 거리를 바라보며 무심코 내 머리를 손으로 긁었었다. 운전기사 분이 Back Mirror로 보았던지 차 안에 먼지가 떨어지면 본인이 청소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나에게 친구 헌기가 다시 설명한다.  이 차는 아무나 타는 차가 아닌 오직 그의 아버지가 앉는 차이기에 운전기사는 그 모든 차량의 점검 청소 들에 매일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하여 내가 머리 긁던 것으로 머리의 비둠 혹은 머리카락 떨어지면 그 기사가 꼭 청소해야 하는데 신경를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설명이 귀에 선하다.

그 회장의 아들과 친구가 차에 탔으니 기사분이 그런 말을 빙 둘러 예기 했지 아무나 이 차에 태우지 않는단다.그렇게 나는 혼자 웃고 말았다.

 

이 친구의 이야기를 정말 쓰려는 것은 위의 것이 아니라 다음에 나온다.

 

그 친구는 女色에 관심이 많았었다. 당시의 나이로 아직 이르겠지만 그 취향의 여학생에 관심을 갖고 결국은 그의 한남동 집에 데려 와 그 몇을 각각 잠자리까지 가졌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대학 교양학부의 여학생임을 말했으니 그 방면에 특별한 이야기로 나에게 비밀이 아니었다. 우헌기의 모습도 남자로서 부족하지 않은 용모였다. 하여 여학생이 싫어하지 않을터 또 그의 집까지 데려 오면 그만 기가 죽는 그런 대저택이라 이 친구의 그 배경에 여자들이 쉽게 마음을 풀었겠구나 보았다.

 

당시 1969 70년 대의 한남동 언덕의 저택은 당시의 최고급 주택으로 규모도 컸으며, 그 위치에서 내려 보는 한강의 전망으로도 서울 최고의 입지였었다.

 

대학 1년 시절 우연히 이 친구와 말의 대화를 하면서 그가 집에 가자는 말에 그와 버스를 타고 한남동에서 내려 그 고갯길 위로 올랐던 고생은 잠시 대저택의 규모와 그 안의 모습에 기가 질렸고, 때 마쳐 배고픔을 식사로 함께 먹는데 다양하지 않았으나 돼지고기 불고기와 함께 아무튼 잘 먹었다. 그리고 가끔 그가 불러 내가 찾아 갈 때는 고생을 감수하여 걸어 가야 하는 코스였다.

 

당시의 버스는 한남동 앞 길이 종점으로 한남대교로 직통하는 그런 단순 도로망에 버스도 그 길목까지였다. 하여 그의 집에 오르려면 고갯길로 홀로 300-400m를 걸어야하는 정상 부근을 염두에 둬야 했다. 혹은 고개 건너 넘은 옥수동 쪽에서 버스 종점 하차하여 또 위 고갯길로 걸어야 하는 등 이쪽 저쪽 어느 곳에서든 위로 걸어야 하는 그 길 고생이 컸다.

 

나는 북아현동에 살아 이곳을 가려면 대부분 한남동 버스 종점에 닿는 코스를 택했다.

이렇게 몇 차례 그외 인연이 되어 그 친구는 대학 2년 중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헤어졌다.

그리고 깜깜 무소식이 오늘에 이루렀다. 우헌기의 궁금증으로 여러 방면으로 찾아 보았지만 더 이상의 연결은 없었다.

 

내 가까운 여성으로 그 어머니를 본 일이 또 한 번 있었다.

나의 군 생활 마치고 군합참본부에 근무할 때 였다. 용산의 국방부 청사에 있어 소속 받은 과에 말단 여 직원이 있었다. 갓 여고를 졸업하여 들어 왔는데 키는 작으나 용모는 아주 귀엽고 예뻤다. 하여 과에서는 싹싹하게 좋은 인상을 받았었다.

 

가끔 과의 주요 업무가 끝나 종로에서 회식을 하게 되어 과 직원 11명 모두 참석하여 좋은 식사와 술을 마셨다. 그리고 회식이 끝나 각기 집으로 가는 시간 그 여 직원 미스 지ㅇㅇ 행선지 집앞까지 데려 주기로 함께 종로에서 동대문의 버스를 탔다. 관심이 되어 함께 버스를 탔으며, 몇 정거장  달려 동대문의 창신동 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 정류장 앞에 그녀의 어머니가 기달리다 우리를 발견하였고, 그녀의 소개로 간단히 인사 나누고는 나는 북아현동 집 버스를 타 집에 돌아 왔었다.

 

나는 그녀의 집 길목까지 걸어갈 동안 이야기 나눌 생각에서 정거장에서 갑자기 그녀 어머니를 만났으니, 그 미스 지와 어떻게 더 발전하지 못하고 나는 근무처를 옮기어 더 이상의 인연이 되지 못했지만.

 

아무튼 우리의 삶은 모두가 인연의 연결에서 이루어 지기에 위에 열거한 이름들은 거기까지로 시시때때 가끔은 그들의 생각이 떠 오르는 이유가 궁금한 연민이 있어 그렇지싶더라.

 

더 어려서는 박광숙 여수애의 꼬마 때 이름도 떠 오르지만, 왜 우리는 그런 그리움이 나이 들어도 떠 오르는 것인지 모른다.

 

이참에 내 주변 가까이에서 작은 인연으로 몇 명이 되는지 보았다.

 

초등학교에서 50-100여 명(200 여 명)

중학교에서 60-100여 명(300 여 명)

고등학교에서 50여 명(100 여 명)

대학교에서 100여 명(200 여 명)

군에서 30여 명(100 여 명)

사회에서 30여 명(300 여 명)

주위에서 10여 명(200 여 명)

일가친척에서 100여 명(200 여 명)

결혼으로 20여 명(100 여 명)

이민으로 50여 명(300 여 명)

교회에서 200-300여 명(500 여 명)

 

650-880여 명(2500 여 명)

 

내 삶의 76여 년 중 가까이 마주한 인원이 650여 명에서 880여 명에 이른다.

한국의 인구 5116만 명 중에서, 세계의 인구 82억 명 중에서 고작 천 여 명도 안되는 인연에 내가 살아 왔구나. 더 확대하여 넓게 잡아도 2500 여 명이다.

 

 

 

 

 

I can do everything in my power with determination, courgage, belief, and ambition to give me strength.

 

나는 나에게 힘을 주는 결단 용기 신념 야망을 무기로 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I can do anything with the determination, courage, faith and ambition that give me streng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