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59 나의 1972년 군 입대 직전

淸山에 2026. 1. 10. 06:52

새 아침을 맞으니

오늘의 날자를 익혔고, 또 날씨도 알아 보았다.

 

문득 내가 군 입대하여 막 신병 훈련하던 때가 떠 올라 그 6주 동안의 힘든 과정을 글로 써 볼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 My Story 글이 대부분 완성되어 내가 써야 할 것이 없다고 본 지금에 위에 적은 시절은 자세히 글로 적은 것이 없어 이참에 적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72 2월 나에게는 군 징집영장이 발부 되었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 없지만 대략 1972 5 22일 경이다.

양력 1972 5 22() 

양력 1972 5 22
음력 1972 4 10입니다.
평달이고 임자(壬子)입니다.

 

이 날로 잡은 것은 월요일이라 나의 6주 군 기본 훈련의 시작이 되지않았을까싶었다.

 

아무튼 대학 졸업 후 이 날 입대하기로 몇 개월은 무료하기도 하여,

신문의 일자리 정보를 찾아 독서 신문취업난에 눈길을 두었다.

 

종로 2가에 자리잡은 사무실에 이곳 취업에 응하려 온 취업자들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이 회사의 설명을 듣고, 작은 그릅으로 나뉜 곳의 담당자들이 실무적인 작업 내용을 주어 이에 따르는 과정을 밟았다.

 

즉 이 회사는 독서신문이란 신문을 발행하여 배급되며 아울러 도서 관련 책을 발행하여 판매하는 회사였다.

 

처음에 신문사라는 개념으로 알고, 이 회사에 문을 두드려, 결국은 신문 발행보다 책을 인쇄 발행하여 그 책을 판매하는 회사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나에게 5 22일 입대를 앞두어 몇 개월의 짧은 기간 받아 줄 회사로(노느니 염불이라고)는 이 기회는 안성맘춤이었다.

 

며칠 동안의 수습을 마치고 회사 경력자를 뒤 따라 그 날의 경험을 받으니, 그 다음 주부터 나의 실적에 따라 수당이 들어 와 내 실력으로 수입이 생기는 제도였다.

 

어찌하였든 다음 주부터 어디로 목표지로 정해야 할 지 쉽지 않더라.

 

그래서 내가 살던 북아현동에서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 사거리에서 내렸다.

그 때가 1972 3월의 중순 무렵이라 봄 기온에 약간 서늘한 날씨니 따스한 햇살이 그리울 때다.

 

걷는 방향을 독립문 쪽으로 북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영천동의 언덕 길목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 출근을 지났으니 오전 10시 경 쯤인데

그 동네 언덕 길에서 어느 집의 문을 두드려 주인을 만났다.

 

자녀가 있을 법하여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독서신문의 구독을 권하였다.

그들 자녀들이 이 신문에서 좋은 교육 학업과 또 꿈이 될 글을 읽어 보도록 부모가 자녀에 해 줄 좋은 과정이라고 설명을 하였었다.

 

비용도 과하지 않아 이 정도의 자녀 학업에 좋은 계기가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싶었다.

다행이 그 부모의 마음을 열어 그 계약을 얻었다.

 

이렇게 얻은 소득이 그날의 다 였으니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나는 현장이었다.

 

그 다음 날도 회사에 출근하여 어제의 소득을 보고하고, 오늘은 어디로 목표가 될지 아직 정하지 않던 때 건국대학교가 생각 났다.

 

특별히 그곳에 가 볼 일은 없었지만, 그 대학의 학생들을 상대로 독서신문을 권해 봐야겠더라.

 

넓은 대학내에 학생들이 많이 모일 곳으로 짐작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 광장에서 주위를 살피며 누구를 상대로 대화를 건네야 할까 궁리는 처음 말 걸기가 관건이라 직접 부딪치기까지가 뜸이 들었다.

 

어느 학생에 말을 건넸다. 간단히 인사 나누고 그들도 수업에 바쁠터 짧은 시간내에 나의 본론이 나오려면 그들은 나름의 핑게가 수업에 지금 늦는다고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기에 더 붙잡지 못하고 헛탕으로 몇 번을 거둡하였다.

 

서서 걷는 것도 피곤하여 운동장의 스탠드에 앉아 앞에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의 학창도 저런 모습이었음을 그려보았다.

 

점심 때 배 고프니 근처 식당에서 배도 불려야 했고, 그 날에 소득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어 또 다음 날을 기약하였으리라.

 

대학교가 쉽게 보여 이제는 단국대학교로 목표가 되었다.

그곳에는 큰 형수의 친정 오빠(말죽거리 큰 오빠)의 늦둥이 아들이 다니는 대학이라 그를 만나는 일로 잡았다.

 

그 전 해에 그가 그 학교의 무슨 학과에 들어 갔다는 것을 들었기에 그곳에 가면 쉽게 만날 것 같았다.

 

그 학과에 들어 그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서 축구하는 그를 만났다.

대강의 그 학교 생활 이야기 들으며 독서신문을 권하니 크게 마음에서 원치 않는 일임에도 그의 사촌 즉 인숙이 향숙이의 삼촌이 권하는 것으로 그 독서신문 구독을 받아 주었다.

 

이런 등의 어려운 구독 권유가 있어야 나의 수당이 생기는 이 회사에서 나날이 지나 어느덧 나의 입대 날짜가 가까워졌다.

 

그 회사는 월급이란 것이 아니 나의 수당에 따라 수입이 되기에 아직 그 수당 받을 일이 없었다. 하물며 이제 입대해야 하니 그 수당 달라는 것도 부끄러워 나는 그 회사에 찾지 않고 입대에 기다리는 시간 중이었는데 누님이 내가 그 회사에 다녔고 또 그 수입의 수당도 청구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직접 그 회사에 찾아 자초지총을 설명하고 내가 입대함으로 이곳에 직접 찾아 오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는 그에 대한 수당을 받아 왔더라.

 

얼마인지는 전혀 기억에 없었지만 아무튼 누님은 충분히 포기하지 않을 정당한 나의 수당이었기에 요청하였고 그 회사는 당연지사 그 금액을 주었단다.

 

나의 첫 직장에서 짧은 기간의 수당일지언정 지금 생각하여도 당연한 일이란 것을 나중에 깨닮았으니 그때의 나의 심사는 그랬었다.

 

이제 오늘의 본론 글로 들어 간다.

 

5 22일 며칠 앞둬 나는 서울에 누님과 형님에 인사하고 대전 집으로 왔다.

부모님과 또 형님 누님들에 군 입대 작별 인사도 해야 했었다.

 

이런 일은 흔한 일로 병역 징집으로 떠나는 아들 형제들이 있으면 의례 가족의 인사를 받으며

또 쉽지 않을 돈도 챙겨 그것을 속 옷 깊숙히 보관되도록 바느질하여 군에 보낸다.

 

나도 이런 준비가 끝났고 이른 아침 조치원 쪽으로 기차를 탔다.

그곳에서 징집영장에 써 있는 조치원 제 32예비 사단을 찾아 가는 길이다.

아직 머리가 사회 머리로 길어 근처의 이발소를 찾아 머리를 홀랑 깎아 내렸다.

 

아래는 참고로 그 예비사단에 관하여 올렸다.

 

32보병사단

 

32보병사단
第三十二步兵師團

활동 기간 1955 3 20 ~ 현재
국가  대한민국
소속  대한민국 육군
병과 보병
역할 향토방위
규모 사단
명령 체계 2작전사령부
본부 세종특별자치시
별칭 백룡부대(白龍部隊)
마스코트 남십자성
북십자성
지휘관
사단장  소장 김지면 (육사 52)

32보병사단(第三十二步兵師團, The 32nd Infantry Division, 상징명칭: 백룡부대) 대한민국 육군 2작전사령부 예하 지역방위 보병사단이다.

세종특별자치시 본부를 두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위수구역으로 맡고 있다.

탐색격멸작전을 펼치고 있는 제32보병사단 장병

역사

[편집]

1955 3 20 경기도 포천에서 창설되었고 이후 부대가 조치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충남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사단이 되었다. 1965 맹호부대 월남전참전을 위해 파월되고 32사단은 임무전환을 통해 전방배치되어 그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1972 6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었으나, 1973 2 맹호부대가 7 5개월 간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같은 3월에 부대를 맹호부대, 수도사단에 인계하고 충남 연기 지역에 있던 51사단 32사단으로 개칭하는 형태로 충청남도를 수호하는 향토사단으로 재편되었다.[1] 이후 지금의 대전시 서구 둔산동 일대에 주둔하다가 둔산신도시 계획으로 충청남도 공주군으로 재이전했다.

2008 12 1일자로 해체된 62보병사단 병합하고, 세종특별자치시에 주둔했던 62사단의 시설을 그대로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2017 12 28, 505보병여단 7대대가 특정 경비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를 방위하는 임무로 전환되면서 세종시 경비단이 되었다.[2]

사단 사령부 소재지는 원래 충청남도 공주시 관할이었으나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인해 세종시로 편입(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되면서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이 되었다.

2020년에 국방개혁 2020 일환으로 사단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편성

[편집]

·         사단 본

·         505보병여단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금산군) - 6개 대

·         97보병여단 (충청남도 보령시, 서천군, 부여군, 청양군) - 부여군과 청양군은 1개 대대로 편

·         98보병여단 (충청남도 서산시, 당진시, 태안군, 홍성군, 예산군) - 홍성군과 예산군은 1개 대대인 4대대로 편

·         99보병여단 (충청남도 천안시, 아산시, 공주시, 논산시, 계룡시)

·         세종시 경비단 (세종시)

·         기타 사단 직할

 

근처에는 나와 비숫한 머리 깎은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이곳에 모였지싶더라.

 

이때 나의 나이 23세 였으니 군 입대를 하기로는 많이 늦은 나이였다.

 

나는 1949 3 17일 생으로

1955 4월 경 대전원동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첫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때 내 나이 만 7살이 되지 않아 동급생은 주로 1948년 생이었다.

 

그리고 내가 서울의 서라벌고등학교에 다시 편입된 1967 11월에 그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나의 평상 시 동급 생으로 그들은 대학 2학년이 되어 있었다.

 

이것과 같이 나의 나이와 늦은 학창 시절 다 마쳐 군 입대도 따라서 늦은 늦깍이가 된 것이다.

 

이런 것에 내가 감당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단단히 각오하였지.

당시의 군 생활은 얼마나 열약하고 또 군 생활이 힘든지 이미 알고 있어 각오도 되어 있었다.

 

봄 기온이 확연한 따스한 5 22일의 입대 전 조치원에서 군 부대는 쉽게 버스를 찾아 32예비 사단 앞에 모였다.

 

별의별 신병 소집자들이 집결된 군 부대 정문 앞에

어느 오후 시간이 되자 인솔자의 구령에 따라 군 부대 초소를 통과하고 따랐다.

 

지나는 군 부대원들이 우리를 향하여 뭔가 회심의 미소로 지나가는데,

아마도 너희들 이제 사회물이 이곳 6주 동안에 완전히 베껴 질 것이란 말이었지싶구나.

 

그렇게 한참 걸어 가니 어느 넓은 운동장에 닿는다.

 

어느 목소리 강한 조교의 말이 들리니 모두가 그에 향하고 조금씩 행동이 빠르게 따라 진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라.

아직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되어 그 조교의 말이 잘 머리에 들어 오지 않았으니

그 조교의 언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었고, 조금 언성이 높아지더니 앉아 서! 앉아 서! 몇 번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 차차 구령에 맞아진다.

 

각 불러지는 이름 성명대로 따로 모이니 이것이 신병들의 첫 소대원이 된 것이다.

이때 불러진 이름에 나의 군번도 함께 알려 주었으니 6603 6212가 나의 군번으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난다.

 

아마도 매 주(이 시간 차는 잘 모르겠다, 매 주 인지 혹은 몇 주의 간격이 있는지) 이렇게 모인 신병이 되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그렇게 그 첫 하루는 앉아 서! 앉아 서!” 되풀이 되고, 군에 들어 오기 전 단단히 먹었던 점심도 배가 흘쩍 줄어 배 고플 때 준 첫 짠밥이 쉽게 입으로 들어 오지 않는기라.

 

아침 밥에도 배불리 흰 쌀밥으로 채웠던 것이 이곳의 첫 저녁은 제대로 우리의 입맛에 맞았을까?

 

또 어떻게 이 짠밥을 각 부대별로 가져 왔는지 신기했었다.

아직 군복도 지급되지 않은 사복 차림에서 소대의 조교가 몇 사람을 불러 저녁 식사 배급을 가져 오게 하였고, 또 소대내에 있던 식기류에 그 날의 저녁 식사 공급이 나눠졌으니, 그 그릇 상태며, 식사의 내용으로 우리 신병의 입에 맞기는 어려웠겠구나.

 

아무튼 저녁 취침 시간에 모두 소등을 하고 첫 날의 잠을 마루바닥 위에서 담요에 의지하고 새 하루 아침을 맞았다.

 

새벽 기상 나팔 소리에 모두 순식간 일어 났다.

옷을 입고 또 수돗가에 모여 세수를 하고 아침 조반을 실어 와 모두 아침 식사를 하였다.

조교의 말에 시작과 함께 잠시 후 그만에 먹던 동작 모두 멈쳤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식기들 모두 수거하여 각기 깨끗히 씻어야 하였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소집이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 훈련의 첫 날이 되었다.

 

우선 각 군복 장비 배급이 되어 커다란 군용백에 나눠 준 모든 장비를 모두 넣었다.

군복, 내의, 군화, 비누, 치약, 손수건 등이 었다.

 

군복은 그 크기에 따라 우리 체형이 맞는 싸이즈로 주었으니 그것에 몸을 맞쳐야 하느니라.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입게 되었다.

 

지금의 나의 체격은 작은 편이지만 그 당시는 보통의 체격이었고,

당시의 군 입대 채형 기준이 있어 키가 작은 사람과 몸무게 뚱뚱한 사람은 징집에서 제외하였었다. 하여 그에 맞는 표준 옷 규격이 몇 가지 있어 그에 따라 각 신병들에 공급되었을터,

당시는 이런 것에 불편하다 불평 할 수 없던 엄격한 군대 시절이었다.

 

즉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각기 군 국방색의 옷을 입고나니 모두가 한 차림의 군 초년병이 되었다.

 

군 조교의 한 마디 한 마리가 엄격하여 그 명령이 떨어지면 행동이 곧 뒤따라 오게 만들었다.

 

내가 오늘 이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이제 나온다.

아직까지 군불 피우는 격이었으니 내 글 솜씨도 이렇게 늘은 것인가?

 

더운 나날에 물은 엄청 마셔 오줌은 나오는데

그렇게 신병 입대하여 며칠 지나도 화장실에 큰 대변이 나오지 않는기라.

 

그런 훈련을 거둡하니 그 신병 조교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아직 짠밥 똥이 나오지도 않던 녀석들 훈련을 이 모양으로 할낀가? 겁을 주는 것이다.

그 말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었다. 며칠 지나니 허 화장실(변소간)에 갔어도 나와야 할 똥은 나오지 않고 소변만 줄줄 싸고 일어 났었다.

 

이런 나날이 며칠 거둡되는데 대변 마렵지도 않으니 그러했지 왜 안 나왔던 것인가.

이런 나랑이 거둡 이틀 삼일 사흘 지나 오일 쯤 변소간에 앉아 빨리 대변을 봐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흘러도 꿈쩍 않아 고통이 되는 시간 꾹 참았던 힘으로 내려 보내니 그제서야 단단한 덩어리 된 몇 가락이 뚝 뚝 떨어지는데 그 개운한 맛은 쉽게 느낄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그렇게 지나자 그 다음부터는 슬슬 대변도 나오고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도 먹선 식 습관이 달라지고 엄청 고된 훈련으로 인하여 대변으로 보낼 식사가 부족한 이유가 되어 그런 짠밥 똥도 나오지 않던 녀석들이란 말을 들었던 것이다.

 

군 신병 약 3주 즈음 일 것이다.

워낙 위생 먹거리 또 군 훈련이 고되고 힘들 때 내 귀 옆에 종기가 하나 생겼는데, 이것에 종기가 크게 발열되어 엄청 아프게 밤낮으로 통증이 심하였다.

 

지금 같으면 이런 일에 위무실 찾는 것이 순서일터이지만 당시의 군 훈련 규정에는 있는지 없는지 훈련 조교는 나의 상태를 알고도 아무 치료도 해 주지 않는기라.

혹은 치료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하여 나는 엄첨 걱정하며 이것을 해결하려 별의별 수단을 강구해야 하였다.

하여 훈련부대의 소대장에 말하여, 시중에서 마이시린 항생제 약이라도 구해 달라고 돈을 주고 간청해야 했다. 즉 내가 치료 받기 위해 위무 병원에 가게 되면 그간의 내 훈련에 빠지게 되어 군 기본 훈련 6주가 더 길어 지는 것도 내가 감수해야 하겠냐는 것에 나느 내 스스로 참고 이 기간을 꼭 채워 기본 6주를 마무리 할 것으로 결심하였다.

 

지금같으면 큰 일 될 것이 그때는 그런 이상한 논리가 군 생활이 되었으니, 나는 내 개인적으로 약을 구해 이 난관을 잘 보내려 하였다.

 

이 즈음부터 교회에 다니던 신병에게 교회 갈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사실 교인이라 할 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대열에 들었는지 순간에 손을 들고 그 교회에 갈 기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 주일에는 군 부대 바깥으로 나가 교회 예배를 보았고, 아울러 교회에서 제공한 음식으로 배 불렸는지도 지금 생생히 기억하도록 멋진 식사였다.

이에 얼킨 이야기는 이미 나의 이야기에 올려 더 자세한 글은 생략하고.

 

그렇게 비싼 약을 구하고 그 약을 먹음으로 크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는 중 그 종기가 터질 때가 가까웠고, 훈련 중 그 종기가 터졌다.

응급에 대비하여 준비한 휴지와 약제 솜으로 그 터진 종기를 닦고 훈련에 계속 임하였다.

 

그리고 그 종기가 서서히 아물도록 조심하였으니 6주의 그 훈련은 무사히 날을 채웠다.

 

그 어려웠던 6주 훈련이 어디간듯 이제 갓 마친 훈련병에서 기본 교육 마친 신병의 모습에 된 것이라.

 

6주의 마지막 날 아침 훈련 신병장에 모두 모였다.

부대 인솔자는 이날 불러지는 신병을 모두 각기 한 곳에 불렀다.

 

나는 그것의 첫 불린 신병자에 속해 그들 모두 모였으니 이 인솔자가 너희들은 모두 KATUSA”에 가게 된다고 알려 준다.   모인 모두가 함성으로 기쁘게 외쳤으며, 아울러 이번에 보급된 모든 장비를 반납해야 하니 지금 입은 옷도 낡은 군복으로 갈아 입고 간단한 더불백만 가지고 오늘 평택 8군 교육부대로 가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얼마나 신나던지 그때의 감사는 뭐로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이 당시 몇 주 전 귀 옆 종기가 터지도록 훈련에는 빠지지 않던 그 기간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가 오늘 이 글의 중심이 되어 적는 것이다.

 

즉 그 당시 종기 치료를 강력히 부대에 올려지고 들어 가면 그 빠진 훈련으로 말미암아 훈련 6주의 시간이 넘게 되어 따라서 6주 기본 군사 훈련이 끝난 시점으로 각 훈련병의 병과를 정리하게 되면 카츄샤 군 복무 기회도 없는 것으로 다른 병과에 소속 되지 않았을까 이찔했던 과정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지금이야 그 결과적인 나의 이야기대로 써 있듯 되었지만

그때의 군 훈련 중 생긴 종기로 인하여 그 치료 받는 것을 택하여 혹시 모를 훈련의 지체로 인한 과정에 내가 속하게 되면 그때의 KATUSA 교육 과정 기회가 나에게 없던 일로 될 수도 있었다.

 

이 생각은 그 후의 나의 인생 바뀜의 순간마다 자주 떠 오르던 일이었다.

 

오늘 새벽 눈 뜨고 무엇을 할까 궁리 중에 이 주제가 글로 쓰도록 마음에 잡혔던 것을 오늘 표현하였다.

 

모든 역사는 승리자의 글이라고 보았듯,

나의 이야기 즉 My Story 글도 산자의 글이니 이 글이 나의 삶 속에 자리 잡듯 그 과정을 거쳐 온 것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 글을 쓰면서 대부분의 모든 과정을 이 글 속에 포함하였는데 어찌 이 부분은 빠지게 되었는지는 글 쓰면서 생각에 잡히지 않아 그 기억이 없던 것이라 그렇게 되었다.

 

오늘 우연히 이 때의 순간을 찾아 그 시절의 회상이 되어 글을 쓰었듯, 또 다른 무엇이 기다릴 지 그 날을 맞아야 알게 되는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은 모른다.

어느 순간 무슨 일로 떠 오를 때를 기다림이니

기다림이 인생이란 프랑스 격언이 또 오르네.

 

"Attendre, c'est la vie!" is a French phrase that translates to "Waiting is life!" or "Waiting is what life is all about." 

 

It suggests that the process of waiting, the anticipation, is an integral and valuable part of living.

 

학창 때 이 글에 마음을 담고 살았었다.

 

기다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

 

오늘도 멋진 하루가 될 것을 믿는다.

주님께 오늘의 삶을 감사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