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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작은 땅덩어리에서 살던 우리 선조들의 우매함으로 일본에 합방당한 1910년 이래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에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의한 자유 대한의 광복이 있었다, 1948년 남한만의 재정 국회 구성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공산군의 남한 침입에 3년이 지났으니. 전 국토가 폐허에 쌓여 기아에 허덕이며 사장에 나온 산업 물자라해도 턱 없이 부족한 나라였었다. 하물며 종군기자였던 영국 더타임스의 한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할 만큼 정국도 어수선하였다.
목숨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들. 나는 대전의 문창동 허허 벌판에 세워진 문창국민학교에 1학년부터 학교에 입학하여 6년을 함께한 學友들이 있다.
4학년 때는 유우현 선생님, 6학년 때 구본문, 김두철 선생님의 이름자 기억이 지금도 남은 것 보면 우리들의 인연이 60여 년 이상 존재한 것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당시에 4반까지 있어 남녀 약 240여 명의 동창 중 지금은 25명 정도 서울, 대전의 각 모임에서 만나니 남은 90%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하기야 근래에 이규열, 김문범 친구의 떠남도 있었으니 그전의 떠난 친구들 나열하면 그 숫자도 꽤 될터(내가 듣던 명단에는 많지 않음으로) 이렇게 우리는 함께 나누웠던 추억을 가슴에 담아 누구는 너무나 빠른 이른 나이에 각각 세상에 이별하였고, 고향 그늘의 대전 땅에 혹은 서울 등 전국의 각지에 흩어지더만 몇 몇은 뉴질랜드, 카나다 등 알게 모르게 또 어디에도 있지 않던가?
어릴적 동네의 60환갑 잔치를 보면 그렇게 오래 사셨던가 우러러 보았던 우리들이 칠십을 훨씬 넘긴 하얀 머리카락 혹은 몇 출기를 달고 사는 처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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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건데 1959년이 사라호 태풍으로 풍작을 바라보던 농토가 쑥대밭되었던 시기 뇌염까지 창궐하니 물놀이에 혹은 전염병 뇌염에 죽지 않은 것으로도 다행이었으며, 배고팠던 하루 세끼 걱정 중 미국 구호물자 우유 배급 혹은 우유 한 잔씩 알루미늄 컵에 담아 마셨던 기억이 눈에 선하구나, 어느 때는 전교생 아침 식사 굶고 학교에 와 모두 회충약 얻어 그 자리에서 먹었고 일찍 집에 돌아 오면 어느 때 눈 알이 빙글빙글 노래지며 어지러웠던 적도 있었다.
아마도 6학년 시절이었나? 담임 선생님이 번호를 적은 종이 조각을 나눠주고 나중에 선생님이 부르던 번호에 당첨된 학생 누구가 원동시장의 가게에서 난닝구(사실은 런닝 샤쓰) 하나 얻었던 것에 당첨 못한 애석함에 나눠 주었던 그 가게 주위를 어슬렁했던 것이 엇그제 같이 지금 이역만리 떨어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집에서 그 옛날을 회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 동네 건너편에 살던 길금자는 말도 편히 건네지도 못하고 동네 울타리 문구멍으로 지나는 모습 쳐다만 보았던 나는 세월 훨씬 지나 금자는 캐나다에 이민 갔다는 말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겠구나. 아마도 지금 손자손녀 재롱에 허연 머리 날리는 꼬꼬 할머니 소리 듣고 있지 않겠나? (길금자 이야기 올린 것은 금자 오빠가 있었는데 주석이 누나를 엄청 따라다녀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기에 어린 우리들도 남녀 연애 이야기는 커다란 화제 중의 진미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자들은 왜 이렇게 여자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녔을까? 이 문제의 답을 찾느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나 혼자의 이야기는 아니것다. 특히 대전의 태영이 친구 맞지?)
그 옛날 이야기 올리게 되면 끝이 없을진대 나머지는 또 다음에 들려 주기로 하고,
나이들 차더니 각자의 대처 길에 들어서 남들과 경쟁을 하다보니 어린 시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는 각자의 삶 여정이 사정에 맞는 군 삼십 몇 개월의 의무 복무를 마쳤을 때 제대로 사람되었다는 주위 평을 들으며 사회에 들어섰다. 누구는 복 받게 일찍 장가가 이쁜 아내 맞았고 또 누구는 늦총각 소리도 아랑곳 없이 지내다 늦장가 갔을 친구도 있었겠는데 어찌 이 때의 각 친구 연락들은 뜸하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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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 정권 들어 체계적 산업 경제 개발이 자유 대한민국의 수출 정책까지 “잘 살아보세”새마을 운동은
우리 국민들 생각을 송두리째 바뀌게 하는 도전 정신에 월남 파병, 서독간호원 광부 파견, 중동 건설 붐 등 경제 도약의 발판을 이뤄 1960년대 GNP $100.00 전후 세계 최하위 순위에서 눈부신 발전의 거듭 됨에 1988년 24회 하계올림픽 개최는 세계가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잘 나가기만 할 줄 알았던 대한민국의 운명運明은 1997년의 IMF 사태로 모든 산업 기반의 구제금융 문제 해결 과정에 의욕을 상실한 국민도 엄청 많았다. 우리가 누구냐? 장롱 깊숙히 넣었던 금붙이 등을 꺼내 십시일반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바친 결과 몇 년 후 구사일생 살아난 세계의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도 이뤘겠다 교육, 국방, 외교, 산업, 무역, 과학, 문화, 체육 등 전방위 모든 분야에 세계를 향한 도전은 끝 모를 듯 부딪쳐 2020년 기준 세계 10대 무역국, 2022년 기준 군사 무기 3-4위 수출국? K-Pop, K-Drama 세계 진출 등 눈부신 결과가 뉴스를 오르내린다.
세계의 모든 분야는 눈부신 발달 발전에 오를 때 2019년 12월 3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환자가 발생한지 20일 만인 2020년 1월 20일, 한국에서도 첫 환자가 확인됐고 이후 전 세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속수무책으로 왕래도 못하게 나라의 관문을 걸어 잠구고 전대미문의 마스크 착용과 속출하는 사망자의 장례에 조문객 없이 기계적 방역에 의한 처리가 세상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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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이후 1,2차 세계대전 중의 전염병 발궐 예방 처리는 정보의 한계에서 또 의학의 접근 못한 한계로만 알아 왔는데, 이번 몇 년 간의 코로나 전염 확산과 전 세계 의학 예방 차원은 연구를 거둡끝에 진정의 기미가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주제의 글에 답할 차례가 되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의 스마트 폰 발전의 계기로 전 세계의 핸드폰 보급에서 보는 전세계의 정보 실시간 검색이 코로나 전염병에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떠 올랐다. 지금의 스마트 폰이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그 누가 생각 하였겠는가?
코로나 방역으로 이동에도 제한을 두었으니 가까운 가족,친지들의 근황에 얼마나 근심 걱정이었을까? 그런데 카톡 같은 SNS 대화 방식이 생겨 통화 비용도 무료로 실시간 길거나 짧거나 불문하여 또 거리를 뛰어 넘었으니 나 같은 뉴질랜드에서도 한국의 친구들과 이렇게 카톡방에서 별의별 소리 다 질러가며 칠십 넘은 우리들의 소통방이 되었던거라.
내가 보건데 이 스마트폰은 인간의 기록 역사 2000여 년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문명의 기기라 불러도 틀리지 않겠다.
이렇게 우리는 눈부신 발전의 IT 기기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2022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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