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35 코 흘리개 시절의 예배당에서 지금의 교회에 나의 위치

淸山에 2025. 9. 4. 12:44
 

 

 

 

이 글을 쓰기 위한 시간적 기간이 60여 년을 훨씬 넘나든다.

 

어린 시절은 예배당이라 부른 명칭이었고 조금 세련되었다면 교회당이라 부르던 시절이다.

한국의 6.25전쟁으로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어지며 곳곳에 예배당이 세워졌고 겨우 걸음이 되었을 여섯 살 경 누나 손에 끌려 원동 교회에 갔던 기억이 최초였고, 부사동으로 이사 오자 근처 동네에 두 개의 교회가 있어 누나는 친구가 다니는 한 교회에 다녔던 것이다. 당시의 교회당은 미국 관련 선교회의 영향에 따라 교회의 분위기도 사뭇 새삼스러웠고 또 교회당의 재정 상태에 따라 대접도 격을 달리하였었다.

 

당시의 내 관심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성탄절 즈음 무엇을 나눠 주더라에 따랐으니 발 길 닿는 곳은 과자 혹은 사탕을 많이 주는 곳이 관심에 올랐으니 나의 머릿속에는 이것 외에는 별로 뜻이 없었으리라.

 

누나의 학교는 Mission School 호수돈 여자 중.고등학교라 당시의 예배당 다니는 것에 자연스러웠고, 나의 자람에서는 예배당의 발 걸음이 서서히 두물었었다. 하물며 동네 친구들과 겨울철 밖에서 신나게 놀다 온 몸이 눈에 땀에 젖다 보니 따스한 곳이 끌렸는데 그곳이 동네 예배당으로 따스하고 몸 식히기 좋았었다.

 

평일의 저녁 시간이었지만 예배당 마루 바닥 위에 나무 혹은 톱밥을 뗄 수 있는 난로가 있어 제법 몸 식히기 좋은 곳이었다. 주일에 찾지 않았어도 평일 저녁의 예배당 분위기는 어떤 거부감 없이도 따스한 난로 옆에 우리 친구들 들러 앉았었다. 이런 일로 찾은 기억 외에는 나의 세월 삶이 훌쩍 크게 자라 그 시간대가 너무 길게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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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의 대학을 졸업한 1972 5월 조치원 육군 32 예비 사단에 입영하여 6주의 신병 훈련이 힘들게 진행되었다. 훈련 3주 차 쯤의 주일에 기독교인들을 위한 부대 안 교회 예배를 찾았다. 훈련소 기간병들이 함부러 가짜 신자이면 죽는다는 엄포가 있었음에도 나는 교회 예배의 자리에 발걸음이 끌렸고, 다음 주에는 밖의 마을 교회에 갈 기회까지 있어 고되었던 훈련 기간의 마음을 쉬는 짬도 되는 교회의 참석이 좋았었다.

 

   이 교회에서 만든 저녁 식사도 입맛이 기억될만큼으로 좋았다.

 

참석한 훈련병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들 참석병은 평소의 신자였지 않았는가 생각되었다(단 나만 빼 놓고). 이 때 예배당에서 불렀던 찬송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찬송이었다. 그 찬송이 나의 시름과 힘듬을 식혀주는 마음의 평안을 주었으니 그 노래는 나를 끌게하는 힘이 있었다.

 

힘든 6주의 훈련 과정을 잘 마쳐, 마지막 날은 각 예하 부대로 분류하여 떠나는 호출이 있어 첫 호출에 끌려 모였던 몇 인원은 인솔자의 설명을 듣고 모두 놀랐다. 그래서 첫 호출의 부름을 받았나 보는데 우리는 미육군 예하 카투사로 발령 받는다고 하였다. 하여 지금 입고 있었던 군복 등을 가장 나쁜 옷으로 바꿔 입고 새것 포함 모든 개인 장비를 반납하게 하여 우리들은 그야 말로 간단한 소지품만 가지고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부풀어 오른 기분은 활짝 펴져 평택 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군 추럭에 태워 평택 미 육군 교육대에 내려 주었다. 도착 후 임시로 각 침대에 무작위로 취침을 하여 다음 날 새벽의 기상은 그간의 부대 분위기 다른 신 풍경이 떠 올라 앞으로의 군 생활 여유를 보여 주는 듯 멋있었다.

 

평택 교육대 4주 기간을 마쳐 최종 동두천 미2사단에 배속을 명 받았다. 이 때는 군 통근 버스를 이용하여 서울 근교를 통과하여 의정부 그리고 동두천의 미 2사단 교육대에 입영하였다. 며칠을 머물어 가장 마지막의 예하 부대로 옮기는 작업이 있어 나의 최종부대는 미 육군 2사단 2여단 23보병대대에 배속되어 카투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시절도 주일에는 부대 내에 있는 한국인 교회의 예배에 참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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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안의 교회를 책임지는 선임자 박 병장은 2여단 본부의 필요한 인원이 비웠을 때 나를 선택하여 여단 부대에 옮겨 주었다. 여단 급의 본부가 되어 병참 부분의 물자 관리 등에 대한 영문 타자 서류 작성을 맡았으니 평소 해야 할 일도 편하였고 시간의 여유도 있었다.

 

내가 오늘의 주제에 넣어 글을 작성하는 것으로 이 부대의 생활도 참고가 되어 넣었으니, 군 훈련병 시절부터 주일에 교회를 찾는 시간을 가지고, 이곳의 카투사 부대 내에서도 주일에 교회를 찾는 시간이 나의 군 생활에 유익을 주었고 그 힘으로 좋은 부대와 직책을 받아 군 생활로 지내게 해 준 역할이 있었다고 믿는다. 내 팔자에 이런 호강을 받게 될 줄은 미처 몰았으니 내가 교회에 들어 감으로 이런 혜택이 되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군 생활 마처 사회 생활에서는 교회의 발 걸음이 막혔었는데.

 

이곳 뉴질랜드에 홀로 온 후 1983년에 얼마간 지난 날 어떻게 연줄 된 침례교회에 참석하게 되었었다. 이 교회의 목사님이 한국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영국 군인 출신이었다.

 

신학 대학 과정 유학으로 이곳에 온 장옥윤 목사를 만나, 그 가족과 함께 드네딘 장로 교회에 참석하여 우리 가족도 교회에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이 오클랜드로 이사하여 온 후, 1988 4 17일에 웰링턴의 김용환 목사님 주재로 열린 오클랜드 한인들을 위한 첫 창립예배가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이곳 교회 생활은 밀접한 연관에 따라 지금까지의 중추적 위치에서 현재의 한인교회 일원이 된 것이다.

 

이 교회의 첫 담임목사 청빙에 드네딘에 살던 장옥윤 목사님을 초청하였으니 2013 9월의 교회 파동으로 사임하기까지 긴 시간의 교회 운영은 오클랜드 지역 첫 교회의 사명으로 크게 발전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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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8월 경 이곳 오클랜드에서 재 뉴질랜드한인회 정기총회에서 차후 한인회장에 후보 등록하여 선거에서 낙선된 나의 위치가 장옥윤 목사를 멀게 하였다. 그가 목사로써 나에게 적극 협력하지 않고 타 후보를 도와 준 결과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의 나이는 40세의 젊은이였다. 타 후보 황찬준은 60을 바라 본 일본 교민 출신으로 이곳 뉴질랜드 1년 차 시작이 되는 분이었다. 연령상으로 나는 교민들을 위한 회장직에 너무 젊었었다. 나의 욕심이 컸기도 했지만 이곳 뉴질랜드 교민사에 나의 위치는 충분한 회장직 자격이 되었다고 믿었다. 하물며 연령상의 문제는 교민들이 볼 때 새파란 젊은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때부터 나는 나의 사업에만 전력하기로 잘 다디던 교회 생활도 점차 멀어져 사업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교회의 장옥윤 목사는 나를 끌어들이려 많은 노력에 다가왔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여 작은 손길도 물리쳐 지냈다. 어느 날은 나를 불러 한인교회에서 최초로 임명하는 장로직에 나를 선출하겠다는 의미로 말을 했지만 이 마저도 나는 흘러 버렸다.

 

나는 내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사업의 확장도 있어 시내 중심가에 선물Shop도 열어 운영하였는데,

1997 11월의 한국 IMF사태가 생겨 나의 사업 대부분을 닫아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결국은 남은 나의 사업체도 팔아 문 닫는 계기로 1999 8 1827 Oakley Ave. Auckland 의 주택을 구입하여 이사하면서, 이때부터 찾지 않던 한인교회로 다시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즈음의 한인교회는 시내의 뉴질랜드 장로교회의 교회당을 빌려 예배 보던 운영을 바꾸어 22 Edmonton Road, Henderson 의 건물을 구입하여 지금의 교회 틀을 잡았다. 이로써 많은 교인의 참석도 있었는데 교회의 교인들에 문제가 생겨 싸움으로 결국은 반대 그릅이 교회를 떠나는 그런 일이 몇 번 있어 교회는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과정을 몇 번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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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나는 초대 창립 교회 멤버의 역할에서부터 주 임무의 교인에서 2013 2월 교회의 장로직에 임직 되었다. 얼마 후의 교회 내부 문제가 생겨 장옥윤 담임목사와도 다투는 사이에 그와 떨어져 나는 교회에 남은 장로 직으로 2대 조충만 목사 청빙까지 지휘하여 교회의 주요 장로의 직을 수행하었다.

 

2020 2 29일 조충만 목사 사임으로 후임 목사 청빙 과정을 가졌고, 

2022 7 31일 제 3대 담임 목사 손기철 목사 임직식을 가졌다.

 

이 과정까지 교회의 관심에 어려움이 많았었다. 잘 겪은 나날에 지금에 이루렀으니 모두가 주님의 뜻에 감사한다.

 

이렇게 지내 온 긴 세월의 시간 중에 나에게 말 못할 큰 아쉬움이 있었다.

명색이 교회의 창립 멤버로써 또 주요 직분자 장로로써 교회에서 활동하기에 나름 열심으로 하였었다.

이 중에 나의 빈 자리는 처(Wife)가 교회에 참석하지 않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옆은 허허 빈 공간이 된다.

그 기간이 꽤 지나 왔는데 이런 일이 된 이유는 2005-2010 년 사이 교회의 내분 문제가 불거져 이런 일에 휘말리게 싫어한 처의 성격에도 있었고, 또 당시 처는 교회의 권사직에 피택되어온바 혼자 큰 상가의 식당가에 식탁을 깨끗히 닦거나 정리하는 사업을하여 주일에도 그 사업체에 근무하는 것이 권사직 피택에 걸림도 되어 결국은 권사직 임직이 되었어도 교회의 참석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무효가 되는 상황까지 지나간 세월에 자격지심의 부담에 교회와 거리가 멀어졌고, 또 이때까지의 장옥윤 목사의 교회안 문제 발생의 이유가 엮여 나온 일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교회의 참여에 거리감을 두고 마침내 교회의 예배 참석도 서서히 빠져 결국은 나에게는 혼자의 예배인이 된 긴 세월이 나에게 있어 가장 아픈 핸디캡이 되었다.

 

교회 내 혹은 외부에서 온 손님 중에 관심 있는 장로의 처(wife)가 교회에 참석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한 곳이 허전한 모습의 위치였으니 이 문제에서는 할 말이 없도록 입이 닫힌다.

 

나의 삶 중에 긴 교회의 역할 이야기를 써 넣느라 지금까지 써 올리지 못한 이 부분이 글에 실려, 과정의 흐름에 따라 내가 겪었던 예배당의 이야기는 계속 관심으로 수정 가감 작업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