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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 뉴질랜드에 이주하도록 운명적인지 모르지만 30대 초반에 왔고 처 그리고 아들 종효도 함께 합쳐 살던 중에 딸 원희도 태어 났다.
내가 처음 머물던 드네딘Dunedin은 뉴질랜드 남북섬의 땅덩이에서 남쪽에 있던 섬의 중하단부에 위치하여
지구 전체에서 보았을 때 중앙의 적도 아래 쪽 남반부에 가깝다 할 만큼 남위 중하반부에 위치하여 대한민국의 북반부 위도와 비교하면 더 위쪽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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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중 기온 강수량 등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수량이 많은 편에 기온마저 인간이 살기 좋은 온도대에 알맞아 년중 계절의 사시사철 변화는 별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며 지금은 52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다.
따라서 자연의 평원과 숲이 우거져 포유류에는 멧돼지, 사슴, 산양, 포솜, 산토끼, 등으로 이들이 살기 좋은 천연 자연 환경이 조성되었고 위험 위해 동물은 없다. 조류는 다양하여 새들의 보금자리 나라로 부를 만큼 그 종류도 많다. 지금은 낙농축산 산업국답게 소, 양, 염소, 말 등 가축은 살기 좋은 환경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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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나의 삶 초반은 사업의 활동이 바쁘도록 매진하여 눈코뜰새 없었는데 이제 은퇴의 육십도 흘쩍 넘어 칠십의 중반을 바라보니 수시로 자연의 변화와 텃밭에 관심은 한가한 여유 시간이 많아 주위에 산재한 동식물이 관심에 많아졌다. 사시사철 자라는 풀들도 성장 변화하며 꽃피는 그 색색의 다양한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져 본다. 우리의 먹거리 입맛도 더해 주는 여러 과일 열매도 집뜰에서 꽃 피워 향기 품고 작은 과일 맺히는 시작부터 자라 그 수확의 때를 기다리니 손꼽아 기다리는 세월의 흐름은 나의 삶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집 주위 곳곳에서 자라는 나무의 잎가지 숲은 자유롭게 날으는 온갖 새들이 머물기 좋아 그들의 새 소리 또한 가지각색이다. 이것 뿐인가? 키보다 높은 울타리도 흘쩍 뛰어 넘어 오는 이웃의 고양이들이 우리 집의 텃밭은 서로의 만남 장소인냥 5-6마리가 그 털 색을 달리하며 찾아 온다.
자신의 주 거주 지역이 아니기에 내 눈치를 멀리서 보며 거리를 두고 보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경계는 여전하다. 고슴도치Hedgedog는 어떻게 우리 뜰에 자리잡았는지 작년에는 이들을 잡아 멀리 공원에 돌려 보내느라 며칠을 바쁘게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제 모두 제거해 겠거니 하였을 때 한 마리 고슴도치 큰 놈을 잡아 저녁에 옮겨 주려 바구니 통에 넣어 둔 것에서 정작 저녁 때 확인할 때는 사라져 없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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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 녀석 분명 집뜰 어디엔가 숨어 살 것으로 봐 그 흔적을 조사하였는데 여태 찾지 못하고 왔었다. 이제는 마음을 열어 이들이 보여도 특별히 잡아 멀리 옮길 생각은 없어졌다. 예전에 크림이가 살아 먹던 먹이가 많이 남아 나는 수시로 곳곳 두 군데에 그 먹이를 내려 놓아 어느 녀석이 먹어 갈 것으로 기다리는 나날도 부풀었었다.
비가 많이 내렸던 어느 날 사용치 않는 수영장의 텃밭에 빗물 가득 채워졌더만 꽥꽥 오리 소리에 뒷뜰을 바라보니 야생 오리 한 쌍이 자유롭게 헤엄쳐 놀더라. 하여 그들의 먹이로 유인하여 진디 위에 뿌려 주니 조심스레 다가와 그 억이를 열심히 먹는 모습에 즐거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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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잘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 졸여 며칠 공양수발을 했건만 그 맘을 아는지모르는지 집 앞 거리로 이동하여 놀더니만 이웃 집 넘어 여기저기에서 머물었다. 하여 나는 이들 한 쌍의 오리에 Oakley Duck 별명을 붙였다. 내가 사는 도로에도 보이지 않아 결국은 그들의 삶이 되는 자연에 돌아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억에서 차차 멀어 질 무렵 집 뒷쪽 Daventry St.을 걸어 갈 일이 있어 지날 때 어디서 꽥꽥 소리가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 소리의 위치를 바라보니 얼마 전에 우리 집에 왔었던 오리 한 쌍이려니 반갑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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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공양수발 하였던 나에게 반갑다는 인사인줄 착각으로 보았는데 거기에는 한 쌍만이 아니라 십 여 마리 이상의 오리들이 울타리 없는 풀 위의 한 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상황판단하여 알기로 여기 가까운 곳은 자연 공원 숲이 있어 이들이 평소 그곳에서 머물러 살다 가끔 동네의 집에 출현하는 나들이에 우리 집의 뒤뜰도 발견하여 왔던 것이여 또 여기에 함께 머무는 것도 그런 나들이 길이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야생 오리도 쉽게 우리 가까이에서 놀던지 살던지 상주하는 모습은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오늘 아침 원희 일터 데려 주고 돌아 오는 길에 어느 상가 앞에 차를 주차하여 차에서 나오니 몇 마리의 오리 떼가 도로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주위도 자연 숲이 있어 머물다 이곳 상가에도 나들이 온 듯 한데 한 마리는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엎드려 있었다. 내가 그 가까이 지날 때 약간의 이동은 힘들게 다리를 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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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오리들은 더 몇 걸을 멀리 있는데 이 녀석은 거기까지 다가가지 않고 머물도록 그 녀석의 다리가 어째서 다쳤다냐? 그 애처로움을 더 해 주는 것은 다른 한 마리가 멀리 떼 지어 있는 오리와는 다르게 이쪽 아픈 다리의 오리 가까이에서 나의 눈치를 보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도 가까운 한 쌍의 짝 오리라 볼 수 있었다.
오리는 짝을 이뤄 숲에서 살아 간다. 그 주위에 여러 오리들이 함께 하지만 짝끼리 가까이 모여 먹이 찾는 등은 수시로 확인이 가능하다. 이들이 이른 새 봄 직전 여기서는 9월 경이 되어 열심히 짝짓기 알을 낳아 수 십개가 모이면 이들을 품어 오리 새끼가 10월 초 경에 부화하여 나온다. 이들의 어미가 움직이는 곳따라 졸졸졸 따라 다니는 삶의 여정은 큰 오리가 되도록 함께하여 어느덧 또 한 쌍의 오리가 짝짓기로 모여 사는 개체가 되는거라.
아까의 다친 오리 가까이 옆에서 홀로 이쪽을 응시하는 오리가 그의 짝임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알고 보니 참으로 정성이 예뻐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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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나에게 이런 감상이 짙은 연민의 정은 나의 나이 황혼이 깃들은 시절을 겪기에 그런 것인가?
오늘은 주말이며 한국의 설 명절 전 날이다.
이곳이야 그런 명절의 분위는 오래된 풍습인냥 나는 고국의 흐르는 뉴스 찾아 읽어 보는 것에 만족한다.
어제 보냈던 ‘나의부모 형제들이 겪었던 일본 거주 생활과 나의 이민 삶 비교’글을 모두 읽은 흔적이 나와 이미 인경이와 서울 작은 누님은 글의 감상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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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작은 누님은 잘 읽어보았다는 느낌의 글 보냈다.
내일의 고유 명절 설 맞아 옛 가족의 즐거운 만남일 것에 이번에 보냈던 나의 글에도 그런 형제들의 옛 추억이 든 글이라 각각의 회상에 젖었을 기회가 되었겠다.
어제 고향 친구 명선이에 안부 문자를 서로 나눔에 내가 지은 어제의 글
‘부모 형제들이 겪었던 일본 거주 생활과 나의 이민 삶 비교’을 함께 보내 주었더니
그도 옛 시절의 회상이 흐른 듯 잘 읽었다며 자기의 가족 이야기와도 흡사하다는 글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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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형수라는 고교 동창이 이곳NZ에 있다는데 아느냐는 물음에 모를리가 없는 이름이라 잘 안다고 답변을 보냈었는데 다음에 그를 찾으면 친구의 소식 알리겠다는량 이렇게 글을 나누고 혼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기억이 앞뒤 막 석혀 뒤죽박죽 혼선이 앞섰다.
설마하면서 핸드폰으로 그의 이름 검색하니 2년 전 죽었다는 기사 글이 떠 그것의 내 기억과 함께 그의 형제 이연수 이형수는 나에게 녹용 관계 일이라 모를리가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분들이다. 이연수는 크라이스트쳐치에 살아 내가 드네딘에 살 적에 몇 차례 만났었고 또 오클랜드에 이사하여서 몇 차례 이곳에서 만남이 다였는데 그의 형 이형수는 이곳에 큰 녹용관련 건강식품 공장을 지어 한 차례에 찾았던 일면식에 나머지는 한인신문에 오르내린 그의 동정으로 모르고 지났던 지날 일이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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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명선이의 고교 동창이란 이야기를 듣고 그가 그런 연령에 있었다면 나에게도 친구벌 일텐데 나는 그 이상의 연장자로 봐 왔고 그의 동생은 1950년 생으로 아무튼 나로써 녹용의 종사자여 이곳 사업자들과는 인연이 깊은 사이였다.
검색에서 찾은 그의 사진 모습도 보내 확인하던 명선이는 확실하다는 답에 그 오래전의 친구 근황에 죽었다는 내용에 충격인지 혼잣말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문자로 써 올렸다. 이렇게 인간 관계에 얽힌 일화로 생과 사의 소식은 언제 어떻게 또 인과관계를 볼지 모르는 삶에 가끔은 나타난다.
명선이로부터 이형수란 이름을 들을 때 귀에 익은 것에 감감했었는데 또 몇 년 전의 교민 소식에 그가 죽었다는 기사에 직접 장례식에 가지는 못했지만 이리저리 귀에 익었던 이름을 명선이의 문자에서 곧 상황을 혼동하여 막바지에 그가 죽은 사실을 찾아 앞뒤의 맥락을 모두 찾았을 때 나는 또 옛 회상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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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뉴질랜드에 왔던 1982년 11월에 김경준 사장의 녹용 사업장에 일꾼의 명목 노동비자로 왔었고 여기에서 결국은 가족 포함 영주권을 받고 곧 이은 해당 관련 회사와 김경준과의 재정문제 다툼에 회사는 동업역활을 파기하기에 이루뤘다.
하여 뉴질랜드 Wilson Neil Ltd. Manager 존은 나에게 제안하기로 공장의 운영을 맡아 달라했지만 나에게는 이미 김경준 사장님에 오클랜드로 이사하여 나의 새 사업구상에 대한 이야기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미 결정했을 때였다.
이 공장의 운영을Wilson Neil Ltd이 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김경준 사장 측에서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됨에 결국 김경준 사장님의 처 조카가 되는 박홍식 사장님이 이 회사의 다음 운영자로Wilson Neil Ltd과는 결별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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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뉴질랜드의 녹용 사업자들에 한국인 몇 몇은 서로 정보로 알고 지내기에 이성방, 이연수, 박정환, 안정실, 옥이킴. 박홍식 등이 녹용 사업의 주 사업자들이 되었다. 나에게는 밀어 줄 끈이 후 순위에 밀려 내가 선택할 사항은 나의 다른 사업 구상이 가장 현실적이기에 이렇게 되었고 당시에 나는 그 녹용계에 사업을 하는 자들을 몹씨 부러워 하였었다.
이 중에 이연수는 나의 연령과 비숫하여 남섬에서 몇 번 만났고 또 나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로 일찌기 선을 그은 상태였기에 나 홀로는 오클랜드의 이주와 나의 새 사업으로 근근히 들리는 소문은 이연수는 금산 출신에 대전에서 가족이 한약방에 종사하였더라는 것 등이 결국 뉴질랜드 녹용 사업에 연줄이 된 것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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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대전 출신이라는 연결의 고리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오르지 못한 나무의 한계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이들 대부분은 녹용 사업으로 부를 창조할 기회가 많아 수입이 좋았던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후 나의 사업의 한국IMF쓰러짐도 함께 겪었고 또 녹용 산업의 한국 입지도 줄었던 관계에 이후의 그들 사업은 많이 약해진 것은 맞는데 이후의 일들은 서로 알지 못해 잘 모르겠다.
이런 등등의 일화를 되새겨 보니 세상의 인간 관계는 몇 줄 안에 연계 관계 설정이 이뤄지는 삶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故 이형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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