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27 만약 1945년 해방 후에 우리 가족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淸山에 2025. 9. 4. 07:31
 

 

 

다음의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과학적 의학적으로 나 남창균(우리 가족은 1945년 조국 광복으로 모든 가족이 귀국하여 대전 원동에 터를 잡고 나는 1949 3 17일에 태어났다)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을 전제로 1945 8 15일 일본이 연합국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이후 우리 가족이 조국 대한민국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렀다면 우리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만약이라는 전재를 놓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나의 이야기 글은 앞 페이지 한두 장만 남고 나머지 글 모두는 없어지고 그것과 사뭇 다른 나의 이야기 글이 올려졌겠다는 추측이 떠 올랐다.

 

예를 들면,

부모가 1945년 귀국 전까지 일본 나고야名古屋 동부 쪽 옆 토요하시豊橋에 가까운 시골 간베神戶ガンベ 마을에서 귀국 1945년 후반까지 사셨으니 이제는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규모가 큰 나고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다음의 짧은 문장은 20217 5일 씨알의 꿈으로 일본문화사를 유튜브에 올린 박영규 작품 중 “파친코” 소설을 설명한 내용에서 1945년 당시에는 미국 비행기의 일본 본토 공습이 대대적으로 치열하여 큰 도시 군수 공업 분야 혹은 군사 시설에 집중적 폭격이 있어 왔는데 이때의 폭격 피해를 피할 이유로 시골 간베가 선택되지 않았는가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 오기 전까지는 가까운 도시 나고야 혹은 토요하시가 있어 그곳에서 오랜 시간 살지 않았을까 집어 본다. 그 맥락이 충분히 연관 되었다.

 

조국 조선반도의 남북이 6.25 전쟁으로 확산되자 이곳 일본은 유엔군의 병참 후방 기지 역할로 특별 수요의 혜택으로 지금까지 배운 고물상의 사업은 전후 폐허 일본의 곳곳에서 활발한 경영 실적이 되어 부모의 사업도 성장이 덩달아 활발히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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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3번째 큰 도시의 규모답게 조선인 동포의 규모도 많아 무엇을 하든지 경쟁이 심한 가운데 일한 만큼의 수입은 은행에 저축으로 쌓이는 맛에 살지만 조국 신생 대한민국의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산업과 집들을 보노라니 헐벗은 동포들의 배 고픔의 굶주림이 얼마나 불쌍한지 신문에 대서특필 올라오는 뉴스에 마음이 쓰리고 아픈 부모의 모습을 수시로 보면서 자랐다. 

 

조국 한반도 금수강산 삼천리는 남과 북으로 긴 시간 전쟁 피해에 죽어간 사상자도 많았는데 전국 곳곳의 폐허로 쓰러진 집이나 관공서를 뉴스 화제 삼아 재일 동포 사이에서도 서로 편이 갈리어 싸움하노라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일본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다 조총련의 재일 조선인 북송 사업 문제에 선전하는 열 올리는 정책에 재일거류민단에서는 주의를 환기 시킬 절대 반대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었다. 부모들은 우리의 뿌리가 대전에 있어 함부로 저 꾀임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고 형님 누님에 주의를 당부한다. 재일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연일 이 문제에 찬성, 반대 의견이 크게 대립하여 큰 도시 곳곳에서는 마찰이 자주 일어난 뉴스를 신문을 통해 읽었다. 1963년에 내 가깝던 친구 ㅇㅇ도 부모가 설득하여 가족 모두가 북송 절차에 따라 나가타 항으로 출발하였다. 등등 

 

내 어려서 집의 창고에 호기심 많은 구경으로 하얀 멜빵 헝겁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전표(17cm x 13cm 크기) 책에 일본어와 한자로 쓰인 덩어리 여러 다발 가득 찬 것을 보았었다. 가격이 각각 다르게 적혀 있던 것을 보고 무슨 은행의 입금장 같아 지금까지 보관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여러 생각을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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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965년 대일청구권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을 국가 간 맺은 것에 개인 간 우리 집에 있었던 전표의 어떤 금액의 청구권은 없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지나왔는데 지금에 꼴돌이 생각해 보니 필경 귀한 재산이 될 서류가 되어 부모님은 한국까지 귀국길에 가져오지 않았나 싶었다.

 

감히 부모에게 여쭈지 못해 그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집안 곳곳에 있던 물건을 보노라면 벽에 걸렸던 태엽 시계와 부엌 찬장 안에 있던 접시와 나무로 만든 찬합 그리고 방안 코너에 새워 있던 옷걸이는 일본 색이 풍기는 그림이 있어 1945년 해방 후 귀국할 때 가져온 것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귀국하여 대전 중심가의 꽤 큰 규모의 일본 집을 구입한 것만 보아도 자금 여력이 좋게 보였다. 하물며 귀국하지 않고 간베나 나고야에서 머물렀다면 더 큰 재산 형성의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을까? 또한 형님 누님의 활동 행동반경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부모의 뒷바라지는 컸을 것으로 믿어 본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센징이라는 따돌림에 차별이 없지 않았겠지만 어려서 어머님이 들려준 이야기에는 그런 차별 어려움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고 주위 일본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가며 살아왔다는 말은 수시로 들었었다.

 

집안에 어린 막내라고 어머니는 잠자리에 항상 나를 옆에 두어 나는 일본말을 배우는 질문으로 선생님! 안녕하세요(센세이 곤니찌와先生!こんにちは) 비행기 학교(히꼬끼 각교 飛行機  学校)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홉 열(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히찌 하찌 구 주) ! 구린내(해 쿠사이나) 도시락(벤또)등 가정 생활에 자주 쓰는 언어를 자주 물어 배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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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 한국은 6.25전쟁에 폐허의 늪에 빠졌지만 일본은 한국 전쟁의 후방 병참 지원의 특수 경기를 톡톡히 받아 산업 전반에 경제 대도약의 발돋움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굶주린 한국과 비교하기에는 일본의 산업 기반은 전력이 있듯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나의 대학 시절 가깝던 친구는 부모의 배경이 좋아 일본으로 유학 떠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 외국 유학 갈 경우는 매우 드물어 이런 경우는 가끔 한 명씩 있었다. 일본의 경제 규모가 널리 알려지며 우리는 일본의 산업 구조 따라가기 바빴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차이가 20년 이상 떨어졌다는 발표를 신문에서 읽게 되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본어 구사 능력이 사회 직장 진출에 도움이 된다고 너도나도 일본어 열풍이 일었다. 하물며 예술 분야에도 일본 문화가 잠식하려 TV에 보이는 드라마에도 경계의 눈초리가 컸었다.

결국은 오히려 우리 문화에 일본이 잠식당하였지만(나는 지금 그렇게 보고 있다).

 

일본의 조선 36년 지배로 그 후유증이 머릿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정권 탈취자들은 선동으로 표를 얻으려 권모술수의 온갖 수단을 다 보이는 정책에 나는 오히려 친 중국 노선을 경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를 보면 일본의 피해보다 중국의 피해가 훨씬 많았고 컸다. 더 많은 침략을 받았고 더 큰 피해를 우리에 입힌 인접국이 바로 중국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왜 외면하고 반일 감정에 혈안이 될까? 

 

우리나라를 지정학적으로 둘러싼 이웃 국경에 중국, 일본, 러시아가 있어 어느 편에 속해야 할지의 세계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항상 가까이 있는 인접국을 조심해야 함을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깨달는다. 호시탐탐 노리는 인접의 경계에 우리의 군사 안보를 강하게 하여 그 무력에는 자주국방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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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각 주변국이 추구하는 국가 이념 문제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북한 중국과 러시아는 공산 체제에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나라였음을 부정하지 말자.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면서도 남아 있던 해외 침탈의 탈이 없어졌다고 단정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한 편에 기반하여 자유 민주국의 한 틀에 있는 나라다. 

 

우리 대한민국은 6.25한국전쟁의 참상에서 자유 수호의 미국 주도 유엔군의 도움으로 지금이 되었던 것을 보면 미국이나 일본의 한 편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경우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역학 군사 외교 관계를 근거로 지금의 반일 감정 부추기는 문제는 결국 중국의 사주와 우리를 침탈했던 북한의 사주에 있는 음모라고 봐야 한다.

 

이 의미에 빠지지 않을 듯 해괴망측한 논리로 그들은 반일 감정 앞세워 결국은 반미 감정까지 일타이득을 보려 한 것으로 국민을 어리석게 몰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와 공존하는 자유 민주 국가로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이념이기를 나는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