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25 오클랜드 – 서울 – 이태리 – 서울 – 오클랜드 의 5개월 기간

淸山에 2025. 9. 3. 09:50
 

 

 

11년이 지난 모처럼의 계획을 가지고 찾은 2018 4 30일 서울 도착과 곧 이태리로 출국하는 준비에 일주일 가량 머물고 5 7일 이태리로 떠났다.

 

서울의 작은 누님만 만나고 함께 떠난 이태리는 12시간 30분 정도의 비행시간이 걸렸다.

인천 서해안 중국의 내몽골 지역 몽골 카자흐스탄 북쪽의 러시아 루마니아 항가리 크로아티아 로마  코스로 인천, 로마를 제외한 지명은  상공 부근으로 추측한다.

 

인경이는 십일 년 만에 만난다. 조카의 Roommate Jon Kellam도 함께 공항에 왔다.

도착한 이태리 수도 로마는 다소 기온이 높았고, 이제 주로 머물 Arezzo 220km 거리를 렌트한 차로 달렸다. 고속도로의 들녘을 3시간 정도 달려 저녁 늦게 도착한 인경이 살고 있는 곳은 로마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중심부 북쪽으로 향하는 위치에 자리하였다.

 

도착 다음 날 Assisi 로 차를 달렸다. 맑은 햇살이 뜨겁다.

 

이태리는 2000년 전의 고대 도시 국가로 지금까지 남겨진 유적을 보면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당시는 세계의 중심지 역활로 대단하였음이 틀림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누나, 인경, Jon, 그리고 나 함께 달리는 차 밖은 야트막한 평원에 올리브 혹은 레몬 농장들

Arrezo Siena Toscany Arrezo : 71.3km (1hr 3min) 71.9km (58min) 81.9km (1hr 3min)

 

Siena & Tuscany 지역으로 중세 도시 가돌릭의 유명 성당이 있는 곳이다.

평원에서 높은 구릉을 올라 중세의 성당을 바라보니 주위 산세와 함께 이런 모습이 이태리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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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일의 일정은 Poggio Covili.

5 10일은 Arezzo 근교를 찾아 그리고 인경이 직장 

2018 05 14일 맑음 - 로마에 도착하여 바티칸 관광

2018 05 14일 맑음 - 로마 콜로세움 Napoli Saleno Padula Falerna Scalo Mortilla  

 

또 며칠 과정의 남쪽 지역 로마와 나폴리 등의 코스를 잡았다.

 

우선 수도 로마는 볼거리가 많았다. 옛 로마 시대의 고적 중에 콜로세움은 그 규모가 응장하였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전), 트레비 분수, 로만 포럼, 판테온,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등이 하루를 잡았다.

 

다음 날은 바티칸 방문인데 절차가 까다롭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조각상 등 단체관광 안내를 받으며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누님이 사용한 보조 의자를 반납하기 위하여 맨 처음의 입구까지 가는데 반납 후 돌아 오는 코스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관리자가 막는다. 사실의 자초지종을 영어로 설명했는데 못 알아듣는 척 실강이가 길어지더니 결국은 입장을 허락하여 인경이 머물고 있을 코스에 도착하기까지의 귀로에 닿아서 다행이었지 잘 못 했으면 이 근처에서 서로 헤맬 뻔한 일이 되었었다.

 

이제는 차를 더 남쪽으로 향하여 나폴리 쪽으로 달려 내려간다. 그 외의 지역은 기억에 없고 지중해 서해안은 보는 해안 도로였다. 우리가 하루 머물 곳에 닿았는데 그 마을 이름은 기억에 없다, 그러나 해안 높은 곳에 자리한 숙소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광경이 이채롭고 아름다워 남쪽 이태리의 면모가 새로웠다. 다음 날의 아침 식사 메뉴도 훌륭하여 사진에 여러 장 남겼다.

 

주인장 부부의 접대도 좋아 인상 깊어 함께한 사진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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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출발의 차는 더 남쪽의 해안가를 돌아 이태리의 전형적 풍광을 기억하며 돌아오는 코스 이름을 일일이 기억 못 해 (추후 인경이에 문의하고 정리 예정) 남쪽의 여행은 이 정도의 글로 돌아온다.

 

이제 장거리 여행 코스 일정을 잡아 아레쪼에서 북쪽 밀라노의 긴 여정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간 지점 휴식처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누나와 함께 휴게소 건물 밖에 나왔는데 주차된 방향을 찾아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 인경이와 렌트 Car 생각에 정신이 벙벙하였다. 

 

잠시의 시간이 지체되어 헤매던 모습을 본 어느 분이 우리를 향하여 의례 짐작이 된 듯 말을 해 주는데 영어가 아닌 이태리어라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내용인 즉 우리가 지금 나온 방향은 하행선의 주차장에 오지 않았는가였다. 

 

즉 우리는 상행선에서 주차하고 휴게소에 들어 왔던것이라. 내 생전 이런 경우는 처음 겪기에 아레쪼에서 상행 방향으로 올라가다 휴게소 건물에 들어섰고, 화장실 용무를 마치고 나올 때는 하행선 출구로 나왔으니 주차된 방향쯤에 있어야 할 차가 없던 것은 당연치사였었다. 우습지 않은가?

 

휴게소 건물이 상하행선 위에 설치하여 생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이태리의 특성을 하나씩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남유럽의 이탈리아반도가 기다랗게 뻗었고,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기다란 반도의 양쪽에는 지중해의 바다가 둘러쌓였다. 면적 302,068.26 km2 6000여 만 명의 인구가 된다.

 

기원 700년 경부터 도시국가가 세워지고 기원전 509년에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 공화정을 수립하여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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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로 로마 제국 황금기의 서막을 열어 Pax Romana라 불리는 200여 년에 달하는 번영기가 “모든 길은 로마로!”의 최대 제국으로 기원후 300년 경까지 1000여 년을 지속한 대제국의 역사에 14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바티칸 교황청이 로마에 있어 세계인의 방문자가 년 중 넘친다.

 

이탈리아는 20개의 레조네(regione)로 이들 중 5개는 특별자치주이며, 20개의 레조네들은 총 107개의 프로빈차 Provincia, 7,960개의 코무네 commune로 나뉜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의 예술 전 분야에 골고루 특출하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농작물이 발달되었다.

 

또 도시 경관이 예전 것을 허물지 못한 이유로 현대식 건축물은 거의 없는 모습이었다. 한국 같으면 6.25 전쟁의 폐허로 다시 새롭게 변한 도시 경관으로 모든 면모가 새롭고 보기도 좋을 듯한데. 로마를 찾는 국제 공항 건물도 오래 전 서구 사회 시작 무렵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좁고 불편하게 낡았다.

 

일찍부터 서구 사회의 발전에 따라 큰 도시의 도로 등은 폭이 좁아 불편한 정도로 취약하다. 그래서 큰 차보다는 소형 차량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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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어 왔던 밀라노는 패션과 디자인이 유명하고 이태리 두 번째의 큰 도시가 된다.

밀라노에서 존 Team의 연극 발표는 출연 배우들의 열정으로 관객의 호응이 좋았다.

 

다음 날 인경이. , 누님 셋은

Milano  - Busto Arsizio 을 넘어 스위스로 살짝 들어갔다가 다시 이태리로 나왔는데 통관 절차도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경을 향하여 Aosta La Salle 이태리 & 프랑스 국경 Tunnel du Mont-Blanc Chamonix-Mont-Blanc

프랑스 몽불랑 터널을 통과하여 샤모니까지 달려 들리고 돌아오는데, 프랑스로 넘어 갈 때는 별로 여권 조사가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이태리 국경에서는 검문이 심하여 여권 검사와 소지품 검사까지 시간이 지체되었었다.  양쪽 국경 근처는 해발 산세가 높아 대부분 깊은 눈으로 파묻힌 계곡으로 가까운 거리에서의 경관 설경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인경이가 운전한 하루 종일이 밤도 깊은 시간 속에 또 Arezzo로 돌아오기까지 강행군은 새벽 2시경이 되어서 집에 도착하였다. 모두 잠에 든 우리는 낮이 훤하도록 돼서야 깊은 잠에서 일어났다.

 

5 28일은 로마 - 인천으로 돌아 왔다.

이때부터 일산 형님 만나고, 강화도의 장모님, 처제를 만나 며칠 지내며, 대전 누님도 뵈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가지고, 또 대전에 내려가 60여 년 만에 대전 모임의 초등 동창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어려서의 모습들이 엿보이는 친구들이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들로 얼마나 달라졌더냐. 그래도 활짝 웃는 모습이 그립구나.

 

다시 서울로 올라 온 얼마 후 갑자기 눈이 안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핸드 폰의 글씨도 읽지 못하고 막막한것이라.

 

누님은 위험을 직감했는지 급히 대학 병원을 찾아가도록 재촉하였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가까운 곳의 흑석동 중앙대 병원을 찾았다. 응급실에 들어 한참 기다린 중 안과 전문의의 진찰과 검사를 받기로 하였다. 절차에 들어가기 전 병원 수납과에 검사 비용을 입금하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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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기에 병원 내는 조용하였고 당일 근무 전문의의 소견에 오른쪽 망막 뒤에 파혈이 생겨 이로 인한 증상이라 적절한 치료가 지나면 시력에 실명까지 생긴다는 설명을 듣고 내일 월요일 아침 진료에 오도록 권유를 받아 최종 수납과에 진료비로 거의 300, 000 원 가량 지불하였다.

 

다음 날 아침부터 서둘러 병원에 도착하여 진료 대기를 하였다. 어제의 검사 차트와 함께 새로운 검사까지 진행하는데 그 과정마다 병원비 수납 결재를 요청하였다. 최종 담당 전문 교수의 설명에 망막에 생긴 피 터짐을 아물기 위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몇 차례의 시술을 요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에 대한 의료 비용이 꽤 높아 건강보험 혜택이 되지 않는 나에게 그 부담을 걱정한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을 취해야 함으로 내가 건강 보험 혜택이 되는 조건은 한국 체류 3개월이 되어야 하기에 그날까지는 8 30일이 되는 것이라.

 

시급히 필요로 하는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망막 주사는 혼자만 받는 이유로 그 비용이 높았다. 

 

이런 경우 처음 겪는 나에게 눈 망막에 주사를 놓는 것은 아찔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또 시술 주사를 받아 보기로 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그 비용이 백여 만원을 넘었다.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우며 누님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피 터진 망막이 얼마나 잘 아물어질지 기다려야 하고 또 다음 날은 주사 맞은 눈이 곪지 않고 잘 견디어질지 눈 검안 절차도 필요하여 대학 병원을 또 찾았다. 검사 소견이 좋도록 되어 다행으로 지켜보기로 하였다.

 

한편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치료비로 누님에게만 의지할 수 없어 뉴질랜드의 처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현재의 사항을 자세히 설명하여 급히 눈 치료비로 약 500만원 정도 필요함을 알렸다.

 

평소 핸드폰을 열어 웹사이트 검색하는 일도 못 하고 하루의 24시간은 지루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은 며칠 지나 핸드 폰으로 겨우 웹 검색하여 나온 글을 사진 캡쳐하여 이것을 꺼내 확대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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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시를 다시 찾아 암송하기 시작했다.

 

01 진달래꽃 김소월金素月  1902-1934

02 광야(曠野) 이육사李陸史  1904-1944

03 나그네 박목월朴木月  1916-1978

04 사랑 한용운韓龍雲  1879-1944

05깃발 유치환柳致環  1908-1967

06초혼(招魂) 김소월金素月  1902-1934

07 The Lords Prayer 

08춘망(春望) - 杜甫  712-770   

09귀천(歸天) 천상병千祥炳  1930-1993

10 바위 유치환柳致環  1908-1967

11 숭무(僧舞) 조지훈趙芝薰  1920-1968

12 국화옆에서 서정주徐廷柱  1915-2000

13 김수영金洙暎  1921-1968   

14 서시(序詩) - 윤동주尹東柱  1917-1945

15 님의 沈默 - 한용운韓龍雲  1879-1944

16 Back to Heaven (歸天) 천상병千祥炳

 

이 중에 진달래꽃, 광야, 나그네, 사랑, 깃발, 초혼, 춘망, 귀천, 바위, 승무, 주기도문(영문)등은 이미 암송하였던 글이라 다시 점검으로 확실히 익히는 복습이었고, 국화 옆에서, , 서시, 님의 침묵, Back to Heaven귀천은 이 기회에 확실하게 암송을 하였다. 암송된 글은 차례 고유 순번을 매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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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외출이 쉽지 않은터 아파트 안에서 내려 보이는 한강의 흐름이 유일한 가시거리의 희미한 모습으로 위안 되었으니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밖을 나다니기 힘들어 집안에만 누워 지냈다. 시력을 잃으면 남아 있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허망할까? 별의별 걱정으로 삶의 의욕마저 떨어져 평생 이런 생각이 든 적 없던 망망한 나날 중에 겨우 가까운 바깥출입은 운동으로 해야 하였다.

 

집의 귀염둥이 루카를 데리고 한강 변 나들이가 새 활력을 넣어줌으로 점차 버스를 타고 바깥 경치 구경도 지루함을 벗어나게 도와준다.

 

정기적 안과 진료에 의료비 지출은 늘고 담당 의사의 검진 결과는 처음 상태에서 좋아지고 있다는 소견이 희망이었다. 가능하면 8 30일이 빨리 닿아 의료비의 절감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비행기 출국 8 29일 비행편을 10 1일로 연기 작업도 하였다.

 

처는 강화의 작은 처제에 연락하여 내 통장에 500만 원 입금을 해 주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는 말하지 않아 모르지만 내가 결혼 후 처가의 슈퍼에 근무할 때 가까운 흑석동의 요충지 중국 식당 건물을 처 이름으로 구입하였던 것에 매달 들어 온 월세가 처가의 살림 비용 충당이 되었는데 아마도 이 중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장인 장모님은 그 식당 건물을 구입하였을 때 처가 시집 전 직장 생활의 월급을 모아 처갓집의 여유 자금함께 충당하지 않았나 싶고, 40 여 년이 지난 지금의 부동산 가치가 엄청 올라 지금(2021)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후속 절차에 따라 있기에 요즈음 보내는 서류를 볼 때 재개발에 참여한다는 의사 뜻에 관계된 서류 같다. 아마도 향후 이 재산의 처리는 여러 형제자매(4남매)의 몫으로 나누게 될 것 같다.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헤매듯이 다녔다. 전철 이용은 노인 무료권이 있어 수도권 지하철 노선을 매일 검토하여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누나가 살고 있는 용산은 전체 구도상 중앙부에 위치하여 교통 연결이 편리하여 내가 지불하는 교통비는 아파트에서 용산역까지의 버스 비용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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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으로 인천 구로 -서울역 청량리 도봉산 동두천- 소요산 & 온양온천 천안 수원 금천 구로

2호선은 서울 중심 둘레를 내선 순환, 외선 순환으로 운행

3호선은 일산 - 대화역 구파발 경복궁 종로3 옥수 고속터미널 수서 오금

4호선은 당고개 노원 미아 동대문 명동 신용산 사당 과천 안산 오이도

5호선은 방화 김포공항 까치산 영등포구청 신길 공덕 광화문 왕십리 천호 하남검단산

6호선은 독바위 불광 응앙 월드컵경기장 합정 공덕 삼각지 보문 태릉 신내

7호선은 장앙 도봉산 태릉 상봉 건대입구 반포 대림 철산 부천 석남

8호선은 암사 천호 잠실 남한산성입구 모란

9호선은 개화 김포공항 신목동 여의도 노량진 흑석 고속터미널 신논현 봉은사 종합운동장

우이신설선은 신설동 보문 성신여대 정릉 화계 솔샘 북한산 가오리 4.19민주묘지 북한산우이

경춘선은 광운대 석계 중랑 상봉 퇴계원 금곡 천마산 마석 청평 강촌 김유정 - 춘천

 

청량리에서는 춘천으로 가는 노선도 연결되어 무료 탑승이 얼키설키 섞여 있는 노선으로 달려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때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도록 때로는 다시 찾아갈 때도 있었다.

 

내가 자라던 학창 시절은 감히 엄두도 못 하였는데 서울 근교 온 곳을 빠지지 않았으니 시간 세월의 흐름으로 눈 시력의 회복만 기다리기에 무엇을 주저하랴!

 

학창 시절의 단골 답지인 금곡 천마산 마석 청평 강촌을 지나기도 수 차례에, 군 시절 복무한 동두천은 눈에 선하여 소요산도 찾아 가 보았다. 처갓집을 찾느라 안산 오이도 방면 그리고 당시는 강화로 이사하여 김포공항에서 버스 연결하며 오고 간 노선도 있었다. 일산 형님을 찾으러 3호선을 이용하기도. 각 노선의 종점은 두루 섭렵하여 이제는 그 외곽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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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이신설선이 보여 이 경전철에 올랐다. 솔밭공원에서 내려 주위를 걸어보니 장기 두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30-40여 명이 모여 장기 바둑으로 여가를 보내는 곳이 놀이터로 괜찮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지만 관전의 구경은 재미가 솔솔해 두 번째 찾았을 때는 그중의 한 분과 장기를 두었는데 내 실력은 영 처져 싱겁게 두 번 패하여 뒷맛이 구렸는데 변명의 여지 없이 눈에 잘 들어 오지 않는 장기판이 가물거린 이유가 첫 번째 패한 이유로 올랐다. 또 상대의 장기 실력이 뛰어 남도 인정한다. 나도 한때는 장기로 주름 잡았었는데.

 

더 멀리로도 떠나고 싶었다. 

우선 용산 천안 까지의 전철을 무료 운용하여, 천안 장항의 표를 구입하였다.

천안 아산 온양온천 도고온천 예산 삽교 홍성 대천 판교 서천 장항에 내렸다. 역 앞이 비인 듯 조용하다. 가까운 상점이 하나 있어 앉아 쉬었다. 마침 바닷가에서 잡은 정어리를 숯불에 굽는 중에 익어가는 냄새는 홀로 쉬고 있는 나에게도 한 마리 넘겨준다. 양념 없이 구워 소금으로 간을 하였지만 나름 맛은 괜찮았다. 돌아 갈 시간을 염두에 두어 더 달려가지 못하였지만 내가 가 보지 못한 서해안 지역이라 정어리 한 마리의 입맛으로 그 느낌을 남겨 놓았다. 대학 때의 이 ㅇㅇ 친구가 서천에 사과 농장을 하였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함만 느껴보며 늦은 밤 용산으로 돌아왔다.

 

830일이 되자 건강보험단에 들러 재외국민으로 건강보험에 가입 등록을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중대 병원 안과의 진료를 받으니 앞전 치료에 선불로 지불한 금액 중 과다 청구로 몇십만 원을 돌려받았고 황반변성 시술 주사 비용도 대폭 줄어 시름이 놓이기도 하였다.

 

이제 출국할 준비의 10 1일로 비행 티켓 변경 되였으니 남은 일정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올 기약도 쉽지 않아 꼭 가보고 싶은 곳의 안동을 찾기로 하였다.

 

청량리 양평 용문 양동 서원주 원주 제천 단양 풍기 영주 안동

대학 사회 시절에 지났던 중앙선의 모습이 새롭게 펼친 주위 경관에 흠뻑 빠지며 이번의 긴 여정도 기대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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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고을의 명칭과 유교 문화의 고장인 이곳은 조선 500년 역사에 이름 높인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 이현보 김성일 등 문인.학자와 이육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오늘 찾아갈 곳에 하회마을 지역이었다.

시내버스 노선이 있어 특별히 묻지 않고도 보이는 흐름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애 유성룡의 종가 마을은 흐르는 강물 줄기가 굽이 돌아 주변 논밭을 적셔주는 풍요의 땅이었다. 또한 외부의 침입 방어에 적합한 지형의 영향을 오래도록 받아 온 곳으로 보인다.

 

해는 늬였하게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나는 안동으로 나와 비빔밥으로 배를 채웠다. 하루를 더 묶고 내일 올라갈까 뭐할까 생각 중에 오늘 밤 올라가는 편을 택하여 밤 기차에 올랐다. 객차는 깨끗하고 편안하여 등 기대고 앉은 자세가 편했다. 

 

열차 바퀴의 규칙적 진동 소리만 귀에 소근될 뿐 고요한 밤 불빛 경치를 뒤로하며 11시경 청량리에 도착하였다. 전철과 버스를 이용하여 집에 돌아온 늦은 하루는 스르르 깊은 잠에 빠지게 하였다.

 

하루하루의 나날은 빠르게 지나가고 피 터졌던 망막 상태가 조금씩 완화되니 글 보이는 시력이 완전 회복은 아니더라도 좋아졌다.

 

강화의 처가집에 장모님은 거동이 불편하여 자주 뵙지도 못했지만 며칠 동안은 처제네 함께 거주하기에 새로 지운 주택에 머물기로 하였다. 접근 교통이 불편하여 자가용 없이 닿기 어려운데 긴 시간의 버스 타기와 강화 종점에 닿아서는 택시를 잡아 주소를 알려주고 찾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다.

 

처제와 처 함께 노후 삶의 터를 계획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놓고 처제는 커피 Shop을 위한 건물을 지어 옆자리에 장모와 둘째 처제 그리고 옆에는 이모님(세 분) , 그리고 또 건너에 작은 처제의 살림집을 지어 놓아 처갓집 처제 모두가 이곳에 올인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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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밭 토지였기에 새 건축 가옥 옆으로 무성한 잡초가 자라, 나는 틈틈이 노느니 운동 삼아 이 풀들을 뽑아 주었다. 또 가끔은 동서의 차를 이용하여 근처 맛집 찾는 일도 있어 눈이 갑자기 아퍼 의기소침했던 분위기를 벗어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 근처의 교회당은 오래전 처가 이곳에 머물 긴 시간 동안 찾던 교회라 주일 날 나도 예배 참석의 시간이 있었다. 예배 후에는 십여 명 참석 교인 모두의 예찬 점심도 가지고 장모님과 함께 돌아 오기도 하였다.

 

장모님도 연세가 있으셔 웃으며 사위()를 바라보고는 행복해하시는데 어눌한 말소리와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기라.

 

3호선의 전동차와 버스를 타고 일산 넘어 파주 임진각을 찾았다. 통일 전망대에 올라 북쪽의 DMZ 지역을 향한 남북 분단의 긴 세월에 가로막힌 분계선 철망 너머의 북한 땅이 보인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철길의 마지막에 끊어진 다리의 교각이 사이사이 남아 있어  흐르는 강물로 얼룩진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해방 전 서울 신의주 연결의 경의선 철로인데 6.25의 전쟁 폐허로 막혔구나. 전쟁으로 인한 인명, 건물, 국토의 손실은 다시 원상 복귀될 경제 희망이 까마득하였는데 기어코 자유 대한민국은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로 말미암아 일어섰다. 

 

하면 된다는 격려가 작은 부분의 수출 전략에서 경공업, 중화학 기업의 눈부신 발전이 각 분야에 총망라한 이제 2021년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무역 경제 국가로 변모한 오늘의 위상을 그 누가 알았을까? 감히 예상도 못 한 그 위업을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 대한민국! 나의 조국!

 

또 햇살이 뜨거운 여름의 기온을 맞으며 춘천에 닿았다. 역 앞에 오고가는 버스 노선을 보노라니 소양강 댐 노선이 보인다. 이곳을 찾아보기로 기다린 버스는 지체 없이 도착하여 나를 태우고 출발하였다.

 

춘천 시가지를 벗어나 강다리 건너 달리며 강변을 사이에 둔 버스가 목적지에 닿아 내린 앞 전망은 경치의 아름다움과 펼쳐진 강줄기의 무게에 압도당한다. 전망대에서 기념사진 몇 장 찍고 소양강 댐의 여력이 담긴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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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4 15일 착공하여 1973 10 15일 완공된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3대 국책사업으로 꼽혔다. 처음 도안은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설계되었는데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그 예산의 3분의 1로 낮추면서도 훨씬 튼튼한 사력砂礫식 공법을 제안하여 일본 측 회사의 무식쟁이 소리까지 들었지만, 공사비 절감, 전쟁 위협 등을 염두에 둔 박정희는 정주영의 편을 들어 준 최 난코스의 공사였다.

 

이 완공으로 생산된 전력도 컸고 수도권 인구의 1년 동안 쓸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게 되어 여러모로 적절한 다목적 댐 저수량 29억 톤 그리고 홍수 조절량은 5억 톤, 길이는 530m 높이는 123m, 총공사비 318 7000만 원, 시설 발전용량은 20 KW에 연 발전량은 353Ghw 의 큰 공사였단다. 당시의 완공 발표 뉴스는 군 시절 막사에서 TV로 시청하였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경춘선의 귀갓길은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될 초석의 시절이라 더욱 애착이 들었다.

 

당시 한국에 오래 머물던 큰 동서(양완모)도 가끔 만나 서울의 맛집 여행을 함께 했고 양평 용문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전철을 이용하여 양평에 닿으면 역 앞에 여러 교통 차량을 이용하여 관광객을 부르는 곳이라 이전에 한 번 찾았던 양평식당을 알려 주니 그 차량이 우리를 태워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에서 불고기와 막걸리 잔에 채운 술을 마시니 흥겨웠고 또 잠깐의 산행 코스로 용문사에 닿는다. 까마득한 옛날 1971년경 올랐던 곳이라 그 추억이 새롭게, 몹시 눈보라 일으킨 한밤중 들어간 절간 부엌의 취침이 떠오른다. 엄동설한의 추위에 부엌안의 깔침자리 멍석이 따스한 잠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 추억이 잊혀지겠는가?

먼 훗날의 회상은 교통편의도 열악하여 걸어서 힘들게 올라 온 용문사였으니 지금은 그 면모가 많이 변하여 입구 도로도 잘 정돈된 산책길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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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기회가 되지 않아 찾지 못했던 대구 형님 뵐 약속을 잡고 대구 기차에 올랐다. 미리 카톡으로 연락을 드려 찾아갈 집도 전철 노선까지 익혀 놓았다. 아파트 가까운 곳에서 통화를 연결하니 형님은 혹시나 하여 전철 역 앞에서 기다려단다.

 

밖에서 만난 형님과 함께 근처의 만두집에 들려 넓적 만두국을 주문하여 저녁을 먹었다.

 

형님도 많이 연세 들어 늙으셨다. 이제 여든둘이시니 어찌하랴!

다음 날은 조카가 원장으로 운영하는 병원에 들러 허리 아픔의 진료도 받고 물리치료와 처방 약을 받았다.

이렇게 형제간의 만남도 십여 년이 넘었는데 각자의 삶터가 여기저기로 흩어져 전화 연락의 안부가 유익한 통로가 되어 또 헤어짐이 다가온다.

 

인생족별리人生足別離 라 하니 또 이별이 아닌가?

 

대학 병원의 안과에 약속도 겹쳐 더 머물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형님의 배웅을 받으며 대구역에서 헤어짐이 또다시 회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예측이 쉽지 않은데, 우무릉의 권주 한시를 읊으며 열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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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酒 - 于武陵

勸君金屈巵 滿酌不須辭

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

 

Persuade Drinking - Yu Wuling 

Lets take this gold cup please. 

And don't refrain from it. 

When those full flowers season comes often storm and strong-wind. 

And, life is full of parting.

 

정부에서 무료 제공하는 보청기 서류를 제출하였고 일산에서 눈의 시력 보완을 위한 안경을 맞췄다.

출국 전까지 찾을 수 있도록 특별히 부탁하여 출국 이틀 전에 모두 확보하였다.

 

서울 누나의 살림 재정도 힘든데 나로 인한 지출 부담도 덜기 위해서라도 출국을 재촉한다.

무거운 짐이 될 것은 미리 우편 택배를 이용하여 여러 상자를 보냈었다. 

그러하여도 인편에 들고 가는 제한 무게를 충족하니 가방 가득했었다. 누님의 배웅으로 함께 한 택시로 인천 제2공항 청사에 도착하니 큰 동서는 전철을 타고 와 만났다,

 

이제 이들과 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5개월의 기간 누나와 함께하며 눈과 허리의 병치례를 거치는 동안 겪었던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터져 나온다. 몇 차례의 고국 방문에 이번 만큼의 힘든 시기가 없었는데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인생 삶의 의미를 불러일으킨 체류가 되었다.

 

각각 헤어져 비행에 오른 하늘에서 내려 본 서울의 모습이 뒤로 까마득할 때 앞으로의 계획이 여러 가지 떠 올라 그 정리 삼매경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