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26 배 주려 갈 때를 겪으며 자란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

淸山에 2025. 9. 4. 07:26
 

 

 

하루 삼시 세끼 식사란 말이 있듯이 1950년대 1960년대의 삶에서 먹는 문제가 매우 심각했었다.

 

하물며 일상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하셨나요?”의 첫마디 물음이었으니 굶지 않고 새 아침을 잘 맞았는가가 관심사의 생활이 된 시절이었지.

 

이때가 어린 시절이 되어 배를 항상 졸이는 주위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삶으로 자라 왔었다.

 

당시는 보릿고개란 말이 유행으로 해마다 3-5월이 될 때 비축된 식량이 축나 쌀독이 통통 비다시피 했으니 연명할 수 있는 식량이라야 봄에 나오는 보리쌀이 일찍 수확한 먹거리로 “보릿고개”란 말이 생겨 났구나.

 

보리밥이라도 형편이 괜찮은 편이고 겨우내 말려 둔 시래기 섞어 죽으로 만들어 먹을 때를 생각해 보면 1950-60년대는 한국 전체가 힘든 삶의 시절이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페허가 된 이후라 식량 증산이라는 정부의 농업 증산 계획은 국정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올라 왔었다.

 

개간 간척 경지 정리를 통한 농지 면적 확장과 지목 변경, 종자 개량, 경종법 개선, 비료 증시를 통해 단위 면적당 수량 증대를 도모하여 정부 시책으로 의욕을 복돋았으나 전쟁을 겪으며 결국은 실패가 되어  삼시세끼는 사회의 큰 문제거리였다.

 

이런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 제도가 1955년부터 시작할 때 농산물 출하 시기와 겹치는 정부의 비합리적 정책으로 식량 가격이 불안정하게 농가 경제의 침체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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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식량의 비축이 부족하게 되고 대규모의 피난민까지 겹쳐 군량 확보와 구호 양곡의 공급 문제는 1951년과 1952년의 보기 드문 수해까지 겪느라 쌀 생산의 평년작에 비해 각각 20 ~ 40%나 감수하는 굵어 죽지 않기 위한 정부의 식량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혼식 장려를 골자로 전국절미운동요강을 제정 실시하고, 이와 병행하여 양곡예배제와 교환제도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1963년의 흉작에 따른 식량 파동에 일부 소비자와 상인의 매점매석 현상은 곡가 등귀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때 식량 수입된 양곡이 약 800만 톤으로 역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

 

위 자료가 있듯이 내가 자라는 시기라 학교 점심 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꺼내기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형편이 괜찮은 친구는 허연 쌀밥에 계란 후라이 하나 얹어진 모습이 있고, 쌀에 보리 섞인 도시락은 보편적이었다. 쌀 보리 비율이 얼마나 되냐가 문제겠지만.

 

하물며 새카만 꽁보리밥이라도 배 채울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부끄러워 뚜껑으로 감추고 먹는 친구도 있었다. 이 마저도 없는 친구들은 교실을 나가 혼자 시간 때우고 들어 오기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나의 도시락도 형편은 좋지 않아 의기소침해지는 감수성 많을 때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사정을 잘 알기에 불평하지 않는 체념이 일찍부터 몸에 베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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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부엌의 커다란 검정 가마솥에 끊여진 시래기 보리죽이 솥 가득히 있어 한 그룻 씩 떠다 먹던 기억은 먹고 싶지 않아도 배 채우기에 더 다른 것이 없으니 물 마시 듯이 목에 삼키고 나면 우선 배는 가득차 일어서 나간다. 

 

그런데 왠 방귀는 참지도 않고 뿡뿡 뽑아지는지 어느 때는 챙피하여 참고 싶으나 이 놈의 방귀가 내 뜻대로 참아지냐 말이다. 피식 풍겨 나온 것까지는 그런대로 알려지지 않아 다행이나 잠시 후에 코에 찌르는 냄새를 맡으면 슬그머니 그곳을 떠나 피해야 했었다.
 

이런 일이 한 두명이어야지. 모인 절반 이상이 이러할진대 피할 것도 없이 아주 낯짝 두껍게 뭉개기 로 강심장으로 변하며 자랐다.

 

소화는 왜 그리 잘 되는지 보리죽 먹고 몇 걸음 떼지 않아 또 배 고팠으니 말여.

 

큰 누님은 가끔씩 나에게 연락을 준다. 매형 안 계실 때 나를 불렀으니 찾아 가면 우선 식사를 차려줘 배부터 채웠다. 그리고 머물던 적당한 시간 지나 매형 돌아 오기 전에 밀가루 포대에 한 말 정도의 쌀을 담아 줘 이것을 어깨에 매고 돌아 왔었다. 당시의 어린 나이에 이 무게도 쉽지 않을터 먼 거리를 쉬엄 쉬엄거리며 온 것을 보면 짊어진 쌀자루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하얀 쌀밥이 힘 될 것을 미리 생각하여 발걸음이 쏟았을 것이다.

 

정부의 수입 쌀 중에 동남아산 안남미라 부른 Long Grain이 들어와 밥을 지으면 찰기도 없이 낯알로 남는 쌀이 있었는데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아 외면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의 토종 재래품종은 일제의 36년 기간 점차 사라져 1962년 농촌진흥청이 설립된 이후 정부 농업 쌀 증진 정책에 의하여 1971년 통일벼 다수확 품종이 나왔었다. 수확 품종으로 개량된 우수품종 임에 틀림 없었으나 찰기도 부족하고, 입맛에도 별로 신통치 않아 더 연구하기로 당시의 좋은 쌀은 일본의 연구에 따라 재배된 아키바레’(秋晴) 1969년 이후 일본에서 국내에 널리 퍼진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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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몇 년의 품종 개량을 거쳐서야 통일벼를 대신한 “낙동벼, 섬진벼, 동진벼”등이 적당한 키와 최고의 수준 품질로 병해충 저항성을 가진 품종이 나왔고, “일품벼, 오대벼” 품종에서 입맛도 더 좋은 “동진벼 1, 삼광벼, 운광벼, 고품벼” 등이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재배하게 된 우리 토양에 맞게 입맛까지 좋은 품종으로 개량을 거듭하였다. 

 

어느 날은 어머님과 함께 선화동 지나 용두동 근방의 작은 누나 호수돈여자고등학교의 자취방을 찾아 갔었다. 학교 끝나는 즈음이라 반갑게 만난 누나는 자취방에 돌아와 곧 밥을 지어 함께 밥을 먹는데 하얀 김 서린 쌀밥이 어찌나 맛 있었던지 그때의 반찬은 기억 없고 오로지 입에 넘기던 쌀밥의 수저 생각만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서 약 2.5km의 거리였지만 당시의 누나는 학교의 등하교가 힘들어 형편상 학급 친구와 함께 자취방을 얻었던 것이다.

 

어느 때는 외국의 구호 물자 배급에 우유를 나눠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날은 미리 예고하여 우유 가루 받아 갈 그릇 혹은 보자기를 각자 준비해야 했다. 집에 가져 온 가루를 적당히 물에 웅겨 쩌 먹던지 그냥 수저로 퍼 먹던 적이 있어 기본적 먹는 일에 세계 각국의 지원은 형편 닿는대로 년 1회 이상이 있었다.

 

한편 밀가루의 공급으로 시장에서 포대로 사와 수제비 만들어 먹던 일은 흔한 나날이 되었다. 개떡이라고 이런 밀가루 반죽하여 밭솥에 넣어 쩌 먹으면 당시의 간식으로 배 채울 큰 먹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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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는 국가 정책에 산림 녹화 장려를 부르짖을 때였다. 학교 별, 직장 별 단체로 주변 산 지역을 배당 받아 작은 묘목을 심었는데 심을 때는 무슨 효과가 있을지 가늠하지 못하고 정부의 강력한 시책이라 복종하는 그런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6.25의 전쟁 폭격으로 국토의 푸른 산림은 잿더미로 벌거승이 산이 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내려다 본 지상의 모습을 보고 산림을 주요 정책으로 각 시도 공무원을 격려한 덕분에 지금은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멋지고 푸르른 국토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 시작과 다르게 해가 지나 세월이 차니 그 효과는 엄청 크게 나타났다. 해마다 여름에 겪는 장마 홍수 피해가 줄고 이로써 농작물 쌀 수확 때 피해가 적으니 풍작의 쌀 증산이 되었던거라.

 

지금은 세계 산림 정책의 최우수 사례를 외국에 알려 주는 모범 국가로 선정되어 정책 성공을 가르치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요즈음 탈북민들이 만들은 여러 유튜브를 보며 대부분의 그들이 북한 삶에 굶주려 죽어 가는 동포들의 실상을 알려 줌으로 지금도 북녘 땅의 국민들이 굶주려 죽는 상황을 들으면 이것은 해도 너무 하다는 울분이 토해진다. 

 

또 밥 짓느라 땔감을 주위 산자락까지 올라 눈에 보이는 나무를 크나 작으나 가리지 않고 베어 떼니 북한의 전 국토는 허탈한 맨 벌거숭이가 되어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악순환 사회를 보면서 몹시 안타까운 넋 빠진듯 속이 탄다. 

 

우리의 1950 1960년대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배를 주리도록 힘들어 살던 것이기에 그들의 굵어 죽는 모습과 비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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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어떤 생각(Mind)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백성이 힘드냐 편하게 사는 것을 판가름 해주는 것이 되기에 같은 혈육 북한 동포가 불쌍하다.

 

우리 세대는 이것을 겪고 보면서 자라나니 1963년에 처음으로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에 보증으로 얻은 해외 차관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부흥을 위한 귀한 자긍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발전에 절대적 힘이 되었으니 아울러 5개년 경제 정책의 성공이 하면 된다는 의지를 불러 일으켜주어 그때의 모든 세대는 열심히 일하며 오늘의 대한민국 세계 위상에 올려진 계기가 되었구나.

 

김일성이 1962년 천리마 운동 당시 선언한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을 실현도 못한 놈들이 이제는 그 손자 김정은이가 되풀이 하는 말을 믿는가?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 누가 이렇게 초석을 만들어 놓았는지 그 과정을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알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하물며 대한민국 땅 안에서도 저 북녘의 수령님을 존경한다고 떠 벌리는 미친 녀석들도 있으니깐.

 

아무튼 저 멀리 뉴질랜드에 살고 있지만 자유 대한민국 조국을 우러러 사랑하며 그 자긍심이 무한히 높다.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 자격도 없는 권력이나 함부로 휘두르지 않기를 두 눈으로 지켜 본다. 이렇게 글이라도 써 놓고 보니 기분이 후련하구나.

 

같은 동족으로 1945년 남북으로 갈라지고 75년이 지난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자.

어떤 수치로도 비교가 되지 않으니 자유 대한의 대한민국은 세계 200여 국 중 상위 10위권 경제 대국에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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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식성은 참 좋았다. 일찌기 어머님(나의 할머니)을 여의어 당시의 조선 땅 사정에 먹거리도 힘들 때였는데 건강한 체질을 가졌을 것으로 천수의 95세를 넘겼던 것이 증명하였다.

 

부모님 덕분에 내 소화 위장은 A급이라 해도 괜찮아 큰 배탈 없이 자랐다. 없어서 못 먹었지 먹을 것 옆에 두고 먹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깐.

 

칠십이 넘은 지금도 내 몸의 다른 기능은 눈 시력도 약해졌고, 듣기는 애시당초부터 그랬지만 청력마져 않 좋은데 또 걷는 다리 힘도 부쳐 갈 때, 위장만큼은 홀로 상태가 양호하다.

 

이것도 감사해야 하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