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동안 나의 이야기 글을 쓰고 수십 차례 아마도 더 되겠는데 파일을 열어 보고 읽다 보면 추가 될 내용과 단어의 수정 오타 작업도 수 없이 병행하였었다.
이제는 써야 할 일들을 다 쓴 것으로 생각의 추억은 바닥이 텅 비웠을 때 그런데 이것 저것 곱씹어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의 영상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그 어린 시절의 의식주에 먹거리!
일제의 36년간 침탈이 될만큼 우리의 삼천리 조선 반도는 뭐 하나 산업이라는 생산이 거의 없었고, 약간의 산업 기반은 또 38도선 북쪽에 대부분 세워졌으니 조국 조선은 가장 기초적인 1차 농업 수산 분야 정도만 시장에서 거래가 되어 그 이외의 물품은 일본의 산업 발전에서 나오는 제품들이 겨우 신 생활용품이라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었다.
이런 중에 1945년 조국 광복이라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의 미 군정 기간을 조선반도 남북의 좌우 이념으로 갈라저 엄청 혼란한 사회 생활로 거둡되었다.
신생 대한민국의 수립과 나라 살림은 미국의 원조로 의지해야 하니 국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 ***
하물며 6.25 한국 전쟁의 3년간 커다란 피해까지 입었던 후라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는 어수선한 폐허에서 찢어지게 가난하던 삶으로 겪었던 일들이 나의 어린 시절이 되어 그때의 회상은 “그 어린 시절의 의식주에 먹거리!“내용이 되어 여기에 적어 보려 한다.
나의 첫 기억의 집은 시내 원동에 자리한 일본식 집으로 실내의 기억은 거의 없고 마당에 수도물이 나오는 우물가를 시멘트로 쌓아 미꾸라지가 살고 있었으며, 한편에 넓은 창고가 있어 찹쌀 모찌 떡이 놓인 자판 모습도 눈에 떠 오른다. 이사한 얼마 후 다시 이곳을 찾아 보니 양초를 만드는 공장으로 생산 시설이 된 것도 기억이 들어 전체 가옥의 모습은 검은 색갈의 목조에 입구 들어가는 문을 열면 현관에 신을 벗고 들어서는 마루가 있었다.
인동으로 이사할 때 내 나이는 여섯 살 무렵이다. 당시 하꼬방(箱(はこ)房) 집이라 불렀는데 6.25의 폐허에서 급히 지은 작은 목조 집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어 개인 화장실은 엄두도 못해 앞쪽에 커다란 공동화장실이 얼마나 비 위생적이었는지 가득찬 똥이 외벽에서 보이도록 땅바닥에서 거리를 두고 발판이 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울어 제끼는 커다란 소리에 마침 집에 놀러 오신 작은 집 형님이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 간 화장실에서 꺼낸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화장실은 어른들이 앉아도 조심해야 할 만큼 앉을 발판 나무 사이가 넓어 매일 변 볼 때는 매우 신경을 써야 했다.
한 여름에 파리 득실거리는 똥통에서 냄새 피우는 동네방네는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의 잣대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한 여름 장마 홍수가 있으면 그 똥수간에 물이 넘쳐 동네 거리에 흘러 내리는 길 바닥을 눈 찌푸리며 살았었다.
*** ***
대전 천 넘어 부사동으로 이사하니 새로 지은 신생 동네로 환경은 조금 나아졌지만 생활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마실 물이 적절하지 않은 가운데 이전에 논밭이 있던 곳이라 앞쪽에는 넓은 밭으로 오이 감자 상추 파 배추 등의 채소가 계절마다 심어져 자라고 여름이면 장마비에 땅이 질펀한 길을 걸을 때 신발에 묻은 흙을 집안에 실려 오는 경우가 허다 하했다.
또 집안의 부엌 설거지 끝난 물을 버리면 흘러가는 하숫물이 고랑을 타고 흘러 그 수채 하수구에 이글거리는 벌레들과 썩어 내리는 냄새는 얼마나 코를 자극했을까?
차차 후생 주택이란 이름으로 집들이 들어 서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설계로 집안에 화장실 겸한 주택이 있었다. 새로 지어야 할 집과 건축 그리고 토목 공사는 막 발전하는 경제의 큰 한 축이 되어 수 십년 후에는 외국의 제법 커다란 토목 공사를 수주하도록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는 입는 옷이나 덮고 자는 이불로 나가 보자.
당시의 면직 공장은 전국에 몇 개 손 꼽을 정도로 생산된 옷감의 질은 열악하였고 옛적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나온 모시 삼베 옷들이 평상복으로도 입고 다닐 때다.
다소 멋을 부렸다면 홍콩이나 일본에서 갓 들어온 직물이 고급 의상으로 언제나 입어야 했던 단벌 신사나 멋쟁이 공단으로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의 자랑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 ***
계절에 따라 입는 옷이 달라져야 했거늘 궁핍한 살림에 입을 옷이 몇 가지나 되었을까마는 년 중 한 두벌의 옷으로 여름이면 웃옷 벗어 지내고 겨울이면 옷깃 여미며 춥지 않게 목도리 천 들려매 지내면 다행이었다. 한 겨울은 또 얼마나 추었던지. 그럴 때 토끼 털 귀마개 혹은 여우 털 목도리 등도 추위를 이겨내도록 유행하였다.
양모 털실로 짠 옷이나 모자 장갑을 집에서 만드는 솜씨의 손 재주도 퍼지니 우리들 삶이란 언제나 머리가 번쩍이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새로운 생활에 자리 잡아 갔다.
집안의 두틈한 솜 이불은 몇 해에 한 번씩 솜틀집에 가져가 늘렸던 솜을 펴주는 작업을 거쳐 깨끗한 이불 천 안에 넣었다. 당시의 집에는 방이 몇 개 없어 한 가족 모두가 한 이불 깔개 덮개로 지내야 했다. 지금의 거주 건축에 여러 개의 방이 있어 혼자 방 한 개를 사용하지만 당시는 언감생심 모두가 힘들 때였다.
어느 추운 겨울, 큰 누님이 양말 장사하던 중 당시 유행으로 새로운 천 나이롱 양말이 있었다.
매일 밤 쥐불 놀이가 재미 있어 음력 대보름을 맞으면 그날 밤에 쥐불 놀이를 마치는 날에 불통을 하늘 높이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
큰 누님이 보내 준 선물의 새 양말을 신고 또 밖에 나갔다.
함께 한 친구들과 신나게 불꽃 피우고 막판에 불통을 던졌는데 땅에 떨어지는 광경은 요즈음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한강 변의 불꽃 놀이와 비슷하여 그 과정을 꼭 거쳤다. 멋진 모습의 피날레를 감상하고 집안에 들어 왔는데 방금 전에 신었던 양말에 여기저기 빵구가 났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쥐불 놀이 깡통을 하늘 높이 던지고 떨어진 불꽃이 내 양말을 스쳐 생긴 구멍들인거라. 헉 걱정이 되네. 이제 조금 있으면 장사에서 돌아 올 어머님이 물어 보실텐데 뭐라 대답해야 하나 끔찍하구나.
*** ***
구멍 난 양말을 깊숙한 곳에 감춰 놓고 나는 깊이 잠들은 척 잠을 잤다. 언제나 늦게 들어 오신 어머님이 나에게 줄 사탕이나 빵을 머릿맡에 내려 놓으니 저것을 먹어야 하는데 괜히 일어 났다가 낮에 누님이 보내 준 양말 이야기 꺼내면 난처하여 참고 참아 잠으로 하루를 넘겼었다.
사탕!
설탕으로 만들은 먹거리를 말한다. 입맛에 댕기는 사탕을 누가 발명했는지 괭장히 친근한 인간의 먹거리로 오래 전부터 자리 잡혔었다. 주 원료가 설탕이 되어 우리 나라는 없었으니 당시에 단맛의 경우는 엿기름 이나 꿀을 이용하였다. 혹은 과일의 단맛이 유일했다 할까.
우리가 피곤하여 쓰러지면 으례히 어머님은 집의 귀한 설탕을 한 두 수저 물에 타 주었듯 영양제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시절이다.
또 사탕 맛이 쉽게 목구멍 타고 넘지 말라고 돌사탕도 생겨 났다. 얼마나 딱딱했던지 성인의 이로도 깨지 못했으니 이름 붙이기도 적절하게 돌사탕으로 불렀다.
주 재료인 설탕이 비싸 사실 매 번 단맛을 설탕으로 내기는 힘들었다. 그 대체물로 사카린saccharin 혹은 당원이라는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 감미료는 인체에 해롭다하여 불매가 되었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했지만.
이외에 엿이나 쌀 혹은 옥수수 튀밥이 생겨 났고, 밀가루 혹은 쌀가루로 만든 과자류 빵 종류는 고급 다과 혹은 서양에서 온 다과로 양과류로 불러 왔다.
한편 우리 전례의 먹거리를 살펴 보자.
*** ***
해마다 봄이 오면 산으로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올라 칡을 찾아내 깊은 흙을 파 꺼낸 칡뿌리를 씹어 먹었다. 이것은 침샘을 자극하여 고픈 배를 채우기도 하였다. 나중에 칡이 위를 보호하고 갈증 해소, 혈액 순환 개선, 변비 개선, 등 여러 효능이 있음을 알았다.
다슬기가 거리에 좌판을 올린 솥에서 끓여 팔았다. 먹기 쉽게 꼭지 층을 펜치 Pliers로 잘라 줘 입구를 입으로 빨아 당기면 속살이 뽑아 나와 먹는다. 그 조그마한 속살이 배를 채워주기 어렵지만 아무튼 짭자롬한 맛은 길바닥에 버려진 그 껍질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었는지 알 수 있었다. 딱딱한 껍질이 입에 섞여 잘 골라 샘켜야 함에 주의를 해야 했지만.
한편 시장 혹은 학교 입구에 뻔데기 장사는 진을 쳐 나왔다. 교과서 책 혹은 날짜 지난 신문을 작게 잘라 만든 삼각 봉투에 한 봉지 가격이 10환 이었으니 지금의 위생면으로 보면 담은 종이나 그 번데기의 신선도를 믿을 수 없었겠지만 당시는 그런 것을 모른채 길거리에서 쉽게 사고 파는 것이 일상이었다.
엿 혹은 갱엿이 있어 년 중 집안의 고물과 헌옷 쇠붙이 유리병 심지어 마른고추의 씨앗도 엿하고 바꿔 먹었다. 구루마에 실린 엿이 있는가하면 지게에 얹어 다니는 엿장수가 있어 어떤 고물이라도 엿하고 바꿔주는 기준은 엿장수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생각보다 엿이 적으면 조금 더 달라고 실강이 벌이는 일이 길거리에서 다반사였다.
여름이 더워지기 전에 시장에는 찐 고구마가 매대에 올려 눈길을 끈다. 때를 맞아 채울 배에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밤고구마는 특히 맛도 좋아 해마다 이맘 때면 손님을 끌었다.
늦은 가을이면 가마니에 담은채 구입하여 풍성하게 식구들 먹도록 하였으니 이때는 주로 물고구마로
품종이 달랐고 오래 보관하기 위해 식칼로 얇게 짤라 지붕에 올려 말려 먹기도 하였다.
*** ***
육 칠월이면 비바람에 떨어진 익지 않은 작은 크기의 푸른 감을 먹기 위해 소금에 익혀 시장 바닥에서 팔기도 했었다. 떫은 맛이 있어 그냥 버려져야 할 것인데 먹거리 귀할 때라 어느 날 친구의 말따라 보문산 중턱에 감나무 골을 알아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감 주인 볼새로 몰래 감골에 들어 지나가는 길손인 척 걷다가 떨어진 감 몇 개를 주워 집에 와 먹던 기억이 있다. 먹고 나면 똥이 나오지 않는 변비로 고생하지만 지금 같으면 쳐다 보지도 않을 것에 왜 그때는 그렇게 집착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땅콩도 빼 놓지 못하는 길거리 먹거리가 되어 됫박 같은 것에 담겨져 팔리는 고소한 기름진 맛에 끌린다. 어른들은 술 안주거리가 되어 이판사판 먹지만 길바닥의 떨어진 껍질은 여기 저기 어지럽혀 볼상 사납다.
이제 철 따라 나오는 참외 수박 복승아 등의 과일은 집안의 형편이 되야 먹을 기회가 생겨 엄마가 사 주는 날을 학수 고대 한다.
가을에 접어들자 사과 배 밤 감 밤 등을 한 번씩 맛 볼 기회가 생기고 이제 해산물인 오징어 양미리가 숯불에 데워 먹힐 때 이제 겨울 맞는 것을 느꼈다.
이런 농산품 건어물류 등과 달리 허연 김에 쪄 나온 찐빵은 배 채울 식량 밥 같이 장소 좋은 동네 목에 꼭 있었다. 함께하는 풀빵으로 국화빵 붕어빵! 모양새가 국화꽃 혹은 붕어 같아 각각 그렇게 명칭을 불러 왔구나.
특별히 여름 더울 때의 아이스 케끼를 올리면 내 어린 시절의 웃긴 해프닝 글이 있어 웃음이 먼저 나온다. 찌는 듯한 더위 식힐 때 이것 만큼 입맛을 사로 잡혔을까마는 세월이 지나면서 맛도 upgrade 되어 해마다 고급 팥도 섞어 부드러움 함께 향상된 아이스 케끼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학교 근처에는 달걀 얼음 케끼 맛을 만들어 판매도 하였다.
즉 계란 크기의 둥근 철갑안에 색갈 섞은 단 맛 물을 넣어 얼음통 안에서 돌려 내면 그것이 얼어져 철갑을 열어 내용 얼음을 사 먹었었다. 때에 따라 잘 얼지 않아 쉽게 녹아 내린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커다란 얼음통 물안에서 계란 크기의 철제 도구가 넣은 물을 얼려 보려는 방법을 택했지만 능율이 좋지 않아 사라졌겠다.
*** ***
삼각형 모양의 비닐에 넣은 색갈 단물도 있었다. 먹어도 될 색소가 섞였는지는 모르겠고 사카린 섞은 색갈 물을 비닐에 담겨 놓았다. 얼음 띄운 물 속에 담겨 놓으면 함께 차가워 우리들 입속에 들어 질 때는 시원한 감이 들도록 하였었다.
또 빙수를 빼 놓지 않을 수 없네. 주로 제과점에서 함께 팔았는데 여름 철에 시원한 맛 찾으면 토막의 얼음 덩어리를 잡아 돌려 아래 밑판의 톱날에 걸린 얼음이 잘게 부서져 내린 것을 그릇에 담아 각각의 색소물을 뿌리고 달콤한 팥 앙금을 올려 주면 섞어 먹는 우리들 입맛으로 여름의 더위를 식혔던거라.
초등학교 시절 양계장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녀석은 매 점심 도시락에 찐 계란 반찬이거나 후라이 계란이 빠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 친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점심 시간에 나눠 주는 계란 맛 보느라 말동무가 된 것은 틀림 없었다. 하루는 그 친구가 집에 놀러가자는 제안을 하여 만사 제쳐 놓고 함께 찾아 갔다.
내가 살던 곳이 부사동인데 이 친구도 멀리 떨어진 보문산 아래의 부사동에 살았다.
방안에 들어서자 대 여섯 개의 생 계란을 바구니에 담아 왔다.
나에게 먹으라 하니 즉 생계란을 삼키는 것이다. 집에서 누님이 가끔 목소리 좋아지고 성대 보호한다고 생계란 삼키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기에 손에 한 개를 집어 벌린 입의 옆 이에 부딪쳐 양 끝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한 구멍을 입에 대고 쭉 빨아 주면 알 속의 노른자 덩어리가 입속에 찰싹 들어 와 이것을 목구멍에 삼키면 되는 것이라.
*** ***
마지막 흰자까지 아까워 쪽쪽 먹었는데 친구는 “더 먹어”하는데 감히 거절하랴. 한 개 더 집어 똑같은 방법으로 배에 넣었다. 약간 비릿하지만 달콤하고 엄청 배가 든든하다.
그리고 집안의 닭이 모여 있는 축사 구경을 하였다. 수 백 마리가 넘는 색색의 암닭이 꼬꼬 소리를 내려 움직인다.
당시는 계란을 열 개씩 벼 지푸라기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여 깨지지 않게 담겨 시장에 나왔었다. 또 귀한 가격에 팔릴 때 였으니 함부로 쉽게 반찬으로 올라 오지는 않을 때였다.
학교 소풍이나 운동회 때 찐 계란으로 나왔으니 소금가루에 묻혀 먹는 맛은 나의 이야기 글 서울행 기차에서도 실려 있어 언제나 감회가 새롭다.
일가 친척에서 혹은 동네의 어느 집에 잔치가 생기면 가까운 동네 혹은 친척의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고 또 그들의 품앗이가 잔치집을 돕는 경우로 이때의 먹거리 기회가 또 은근히 기대가 컸다.
친척집에서의 잔치 때는 당연히 출입이 가능해 찾는 즉시 먹을 거리가 쉬웠지만 동네 어귀의 잔치 집에서는 경우가 달라 약간의 앞뒤 손발이 맞아야 얻어 먹을 기회가 생겼다.
동네 잔치집의 소문은 말하지 않아도 동네방네 다 퍼져 적당한 시간에 잔치집에 찾아 들어 간다. ‘
잔치집 밖에서부터 그 날의 음식 만드느라 화덕 위에 부침개의 맛이 코를 스친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서면 알록달록 여러 채소를 섞어 삶은 당면에 올려 양 손으로 이리저리 잘 퍼지게 되면 마지막 맛 보기로 한 모금 입에 올려 입맛을 평하기도 한다.
*** ***
또 한쪽에서는 삶아진 국수를 더운 국물에 말아 한 그릇 씩 접대 상에 날라 가고, 또 누구는 고기 편육을 큰 칼로 자르느라 손놀림이 능숙하다.
과일의 껍질 혹은 크기를 여러 편으로 자르는 분도 있어 각 사람의 맡은 분담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기라.
하물며 사람에 따른 접대 대우가 달라 어른일 경우 큰 장독에 담근 막걸리 동동주는 휘휘 저은 됫박에 담겨 나온다. 이런 것은 수정과 혹은 식혜도 있었으니 이것이 우리네 잔치집의 분위기였었다.
일가친척이 아닐 경우는 기회를 잘 타야 눈총을 받지 않고 먹거리 잔치 음식을 얻어 먹는다.
잔치 시간이 무르 익을 무렵 어머니가 계신 쪽을 기웃하여 찾는다. 그러면 한참 음식 만들던 어머님이 나를 발견하고 “아이고 내 새끼 왔어” 하고는 맡았던 음식의 한 부분을 그릇에 담아 먹으라 내 준다. 열심히 먹느라면 어머니는 다른 음식의 기회도 찾아 맛 보도록 더 챙겨 주기도 하는 앞뒤 눈치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맞춘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옆의 눈치도 있어 어머니 친구가 대신 챙겨 주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이는 어디 있는가 찾아 보내라는 말도 빼 놓지 않았으니 나는 이곳을 빠저 나와 그 친구를 불러 온다. 그러면 어머니가 대신 먹을 음식을 눈치 않나게 그릇에 담아 주는 양쪽이 짜고 고스톱 치는 격이랄까 이렇게 서로 도와야 했으니깐. ㅎㅎㅎ.
전전회에 올린 “배 주려 갈 때를 겪으며 자란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에 있듯이 나의 어린 시절에는 이런 먹거리 이야기를 빼 놓으면 쓸 글이 없을 정도로 먹는 것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 왔었다.
'문학 & 예술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30 주석이 형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0) | 2025.09.04 |
|---|---|
| 029 그 때는 꿈에 자주 떠 올랐던 모습이 있었다 (0) | 2025.09.04 |
| 027 만약 1945년 해방 후에 우리 가족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0) | 2025.09.04 |
| 026 배 주려 갈 때를 겪으며 자란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 (0) | 2025.09.04 |
| 025 오클랜드 – 서울 – 이태리 – 서울 – 오클랜드 의 5개월 기간 (0) | 2025.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