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1982년 11월 1일 한국을 떠나 새로 살게 될 뉴질랜드로 따나 정착하며 가족 함께 근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삶, 정착. 사업, 폐업, 은퇴 등의 과정을 거처 지금은 72년 1개월의 나이가 된다.
부모 형제 조카들이 고국 한국에 살으니 때때로 그들 찾아 고향의 맛을 느끼고 싶어 찾았던 회수는
1986년 – 처음으로 가족 모두 함께 약 한 달가량 머물다.
1997년 – 피지에서 사업 중 김형주 문제로 변호사 공증하느라 잠시
1998년 – 모든 사업 정리 후 종효와 함께 한국.중국 방문
2003년 – 기간을 길게 잡고 N.Z 자주 왔다가 돌아가기까지(2005년 7월)
2007년 – 어머니 장례식에 몇 개월 체류
2018년 – 이태리에 인경이도 찾아보고, 서울에 체류 등 5개월
등 모두 여섯 차례가 있었다.
사람은 낳아서 타지, 타국을 떠돌지만 죽어서 고향에 묻히고 싶다 하듯 혹은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 감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살아 생전 고향, 고국에 자주 있고 싶다는 욕망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어머님이 늦게까지 생존하셨기에 2003년 체류 기간이 길게 잡혔고, 2007년 돌아가셨다 하여도 형님, 누님, 조카들이 있어 고향의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으니 지금도 그러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형제 중 큰 형님이 1995년 경에 돌아가셔 현존으로 큰형수님, 형님 2분, 누님 3분이 계신다. 물론 첫째, 둘째, 두 분의 매형도 돌아가셨지만.
*** ***
큰 형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1에 여자조카 5. 그들에 또 자녀들 5 이상? +
큰 누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2에 여자조카 2. 그들에 자녀들 5 이상? +
둘 째 형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1에 여자조카 2, 그들에 자녀들 5 이상?
둘 째 누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2에 여자조카 4, 그들에 자녀들 17 이상? +
셋 째 누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1에 여자조카 1, 그들에 자녀들 2 이상
셋 째 형님으로 조카는 남자조카 2, 그들에 자녀들 3
이러한데 ?의 표시는 특별히 그 조카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또 형님, 누님께 이들의 이야기를 더 질문하지 않은 관계로 위에 적어 놓은 기호 ?는 추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 는 또 결혼하여 자녀(나에게는 중손 뻘이 되는)
父親 南熙性과 母親 朴三善 휘하에는 자녀 7에, 손자,녀에 20, 증손자,녀에 37명 등 총 64명이 나온다. 그 가계도를 그려도 큰 지면이 필요하겠다.
내가 “나의 이야기 My Story”에 관심 갖고 글을 모은 것이 2018년 한국 방문직전으로 이태리의 인경이까지 찾아볼 계획일 때 왠지 갑자기 “나의 이야기”글 생각으로 소 제목에 12-3편 적어 남긴 것이 있었고(그 이전에는 단편적 나의 회상으로 적은 몇 편), 이 글들을 작은 누님에 카톡으로 보냈더니 누님의 큰 흥미가 되는 답이 나와 적어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는 이 글은 가족 형제들이 읽어 볼 만하다는 말에 자극을 받아 귀국 후 짬 나는 시간마다 내용을 보강하고 편집, 오타도 정리하여 오늘에 이룰 때,
편년체 서술 참고로 새로 소제목 단락하에 16항목을 만들어 남겨 있다.
*** ***
예전의 70세 나이라면 노인 측에 노인정 세대라 하겠는데, 이즈음의 나에게 72세 1개월은 정신적 마음만은 펄펄 끊는 청장년이라도 불리우고 싶다. 각 몸 기능 상태는 벌써 고장난 것이 여러 가지 임에도.
어떻든 “나의 이야기” 서술로 거창하게는 회고록이라 말도 하지만 지금의 이 글 쓰는 것에 큰 애착이 들어 고단함보다는 즐겁기까지 하다. 지금의 내 처지가 가장 이런 글쓰기 적합하니 이미 다 썼던 글도 다시 읽어보며 첨삭하고, 하물며 소제목도 하나하나 늘어감에 모여진 모든 나의 글은 내 가족의, 내 삶의 흔적이 될터 지난 추억을 되새겨 봄도 각 희로애락이 모두 다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1950년대의 조국 광복과 신생 대한민국의 남북 이념대립 그리고 6.25 한국전쟁의 피해 참상
1960년대의 격변기 사회 변화와 박정희 군사정부의 대 국가 경제 계획 수립
1970년대의 세계 유류파동을 겪으며 각국의 산업기반 구축과 미.소 혹은 미.중 대립
1980년대의 군사정부의 연장선에서 한국 경제 성과 그리고 대외 전략
1990년대의 중화학 산업기반에서 IT정보화 산업과 공산주의 소련 몰락에 따른 세계 변화
2000년대의 새 산업 기반에 의한 대한민국의 위상이 변화하여 올라가고
2010년대의 선진 세계로 등장하는 대한민국의 외교 국방 교육 사회 의식구조 변화
2020년대의 세계 10대 무역 강국이란 조국에 우리는 무엇을 변화해야 하나?
나의 삶은 늦은 봄 보릿고개의 배고픔에서 박정희의 정부 경제정책 수립이 적절한 타이밍을 세워 그 기반 시설의 발전으로 세월은 이렇게 대한민국이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듯 발전하였음에 감사한다. 그 누가 알았을까? 지금의 대한민국 위상을?
1970년대에 어머니는 나에게 빛바랜 종잇조각에 써 놓은 몇 가지 글을 매일 낭독하고 소중히 간직하라며, 앞으로(그 세월이 수십 년 흘러)의 대한민국은 세계의 중심 자리에 있다하였으니 당시에 나는 그 무슨 뚱딴지 말인가 의아 해 하였었다. 말하자면 그런 말에 씨도 먹히지 않을 어떤 그 징조도, 혹은 가망성도 전혀 없었으니 터무니없는 말로 터부시 하였었다.
*** ***
어머니가 그럴 때 나는 그냥 앞에서는 “알았어요”란 말로 뒤돌아서는 무시하였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는 뭔가의 낌새가 꿈틀거렸고, 2010년, 2020년대 지금은 세계의 위상에 그 자리를 우뚝 보인 대한민국으로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무엇을 근거로 그 당시 그렇게 말해 왔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어머니의 당시 그 예언적 선각에 전율을 금치 못한다.
어머니는 당시 외가의 마전 조그마한 촌 마을에서 가난하게 일제의 어두움 속에 배움마저 없었던 분인데 17세의 이른 나이에 아버지 만나 결혼하고 일본의 어디라도 잘 살 수 있다는 계획에 지혜롭게 선택의 길을 잡아 가족을 이끌었고, 또 삶의 터전을 이루었으니 용기 있는 분이며 생활력이 강하셨고 또 현명하였던 분이시다. 그 두 분 아버지 어머니는 또 남의 어려움과 불쌍함을 우리 가정의 어렵고 고달픔에서도 그냥 눈 감지 않고 한 숟갈도 나눠 먹는 마음씨를 나는 어려서 익히 옆에서 보아 자랐으니 인정도 많았던 분이시다. 난 그러하신 아버님, 어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 ***
2021년 5월 11일 화요일이다.
새벽 원희가 나를 깨움으로 하루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침의 카페 출근에 데려 주고 돌아오는 Motorway 의 익숙한 도로는 시원한 공기를 코에 맡기며 차는 달린다. 집에 돌아와 부족한 잠을 갖는다.
기지개도 확 펴 본다. 이리뒤축 저리뒤축 다시 눈 뜬 나는 오늘의 뭘 할까의 생각을 떠올리고 침대에서 일어났었다.
언제나처럼 컴을 켜 오늘의 일정이 진행되는데 이 일기의 첫머리를 쓰면서 오늘 해야 할 그것이 생각나지 않는거라? 참말로 나이 탓인가? 처는 아침 식사 준비하고 “식사하세요” 할 때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새로 지은 아침밥의 누룽지 밥이 고소한 숭늉에 섞여 있었다. 뱃속을 부드럽게 해 주는 아침의 음식으로 다 끝나갈 무렵 새벽 아침의 오늘 화두가 떠 오른다. “아! 그렇지. 나의 어려서의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 이것에 대한 것을 글로 쓰기로 했었는데 이제야 없어진 흔적에서 나타난 것이다.
나의 습관(성격)에 오래된 것도 나는 잘 보관(보존)함으로 자라 왔다.
이것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일 경우는 물론이지만 보이지 않는 생각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잘 간직하여 지금까지 “나의 이야기”글로 나올 수 있던 배경이 되기도 하거니와 나는 좀처럼 어느 헛것 같은 것이라 하여도 잘 남겨 두는 습관이 있는데 유독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지금의 내 수중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이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그것을 적어 놓으려 한다.
*** ***
나의 어린 시절은 대전 부사동 140번지의 집이다. 7살부터 17살까지 머물던 곳이니 나의 어린 추억이라면 그 모두가 이곳에 존재한다. 아울러 찍혀 남았던 사진도 함께 있다.
혹은 그 이전의 우리 가족 모두의 흔적 사진도 이곳에 남아 있었다. 때는 흘러 나의 서울 지역 고등학교 생활로 옮겨지고부터 청년기를 보냈으며 또 결혼하여 뉴질랜드에 이민의 길에 접어들고 지금까지 삶이 진행하는 동안에 이뤘으니, 이 중에 대전 고향의 어린 시절의 남아 있던 사진들은 미처 챙기지 못하고 서울과 뉴질랜드에 이르는 과정이 지금의 내가 된다.
당시의 서울 학창 시절에 어려서의 사진 챙겼더라면 지금의 아쉬움이 없을 터 그 당시는 전혀 그런 낌새의 생각이 없었던거라. 혹은 서울 생활에서도 대전 형님 집에 남은 사진 흔적을 찾아보았어도 남았을 아쉬움이 왜 그 당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아마도 가족 모두가 이사한 경우라면 당연히 집의 모든 짐으로 함께 사진도 가져갔겠지만 몸만 떠나는 서울 학교생활이라 얼마든지 아쉬을 건더기가 없었던 거라.
가족 형님 누님의 일본 살 때의 사진이 떠오르고
명승지를 배경에 올려진 가족의 사진도
나의 어린 꾀죄죄하였던 모습의 사진
또 소풍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 몇 점과 국민학교 졸업 사진도 있었는데
중학교 시절의 명함판 사진 그리고 중학교 졸업 사진 등
내 기억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위의 모든 사진이 지금의 큰 조카(큰형님) 집에 남아 있을까? 그 기대를 하지 못한다. 형님 작고하신 지도 오래되었고, 또 조카들마저 안정적 가정 생활 못한 것에 형수님마저 지금은 요양소 삶이니 정말로 오래된 가족의 흔적 중 그 사진이 잘 건재할까 의아해하며 처음으로 이 의중의 글을 남긴다. 너무 아쉽지만.
'문학 & 예술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24 내가 교회의 시무 장로직을 내려 놓는 계기와 한인회의 역활 (0) | 2025.09.03 |
|---|---|
| 023 장기 두는 것을 좋아하여 (0) | 2025.09.03 |
| 021 척추 허리의 아픔에서 회복되니 (0) | 2025.09.03 |
| 020 원희가 태어 난 1985년 5월 15일 (0) | 2025.09.03 |
| 019 한시를 익힐 때 생각나는 아버님 (0) | 2025.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