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20 원희가 태어 난 1985년 5월 15일

淸山에 2025. 9. 3. 09:26
 

 

 

이틀 지나면 원희의 생일이다.

1985 5 15일 드네딘 병원에서 낳았으니 36번째를 맞는다.

 

나 홀로 뉴질랜드에 온 1 4개월 떨어저 지내다 처와 종효를 합쳤으니 

그간 가족의 외로움 겪고 참아 온 세월에서 나날의 생활은 활력이 넘치고 즐거웠었다.

 

1978 6 17일에 결혼하고 몇 해 지나 1980 11 25일 종효를 낳으니 가족의 귀한 일원이 되어 생활이 행복을 만들어 주었으며 내 생각에서는 서넛은 더 갖기 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처는 단출한 자녀를 원하기에 생각만큼 생기지 않았으니 1982 11월의 출국에서도 이이들 문제는 더 거론할 겨를도 없이 훌쩍 지난 세월에 1984 2월에 가족 합류하였고 뉴질랜드의 생활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처의 입덧을 알게 되었다.

 

부모 형제자매들과 멀리 떨어진 이국 생활에 가족 형제들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며 체험하는 삶 중에 은근한 마음으로 아이를 더 갖고 싶다는 생각이 컸으나 처의 의중은 예전과 다르지 않게 지내 오다 어느 날의 낮설은 입덧의 느낌은 내 속마음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아이 임신으로 특별히 부부생활을 염두에 두지 않아 생긴 일이기에 자연스런 가족의 생긴 일로 간주하여 이제 새로 감당할 날을 기다리며 지나야 하는데 처의 입덧은 여간 심한게 아니었다.

 

한국과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이곳이라 입덧에 필요한 적합한 음식 구하기도 힘들고 오직 뉴질랜드의 음식, 채소, 과일 등이니 내가 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또한 이곳 생활은 걸어 다니는 것보다 작은 거리에도 차를 이용하여 차 운전 중 멀미가 겹치는 것이라.

 

***   ***

 

그러니 임신 증세 입덧이 1개월 직 후부터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하면 심했지 가라 앉을 기세가 없었다. 처도 이곳이 한국이 아니란 것을 알고 단념했으니 먹고 싶던 음식 등이 어찌 가까이에 있었겠는가 아예 말없이 정말로 어렵게 참아 지내었으니 차 타고 이동 중에는 필수적으로 비닐 봉지를 준비하여 차 문은 조금 열어 놓았고 증세가 생기면 급히 봉투에 입 대는 매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었다. 옆자리에 종효는 어린아이였으니 그는 전혀 이런 기색에 돕기보다는 천진난만한 바깥 세상의 흥미에 눈이 놓였으니깐.

 

어렵사리 음식 섭취하였어도 끝내 뱉어 버리니 산모의 건강 걱정은 근심 높기만 하였었다.

이때는 회사에서 Dovecote Avenue, Dunedin 지역의 2층 렌트 집을 얻어 줘 거주 공간은 좋았고 또 뒤 뜰의 텃밭도 넓어 필요한 채소로 깻잎, 마늘, 토마토, 근대 등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뱃속에서 땡기는 음식이 없었을까? 한 번도 이런 음식 타령하지 않았으니 이런 경우의 입덧이 무엇인지 알던 나에게 특별히 준비를 못 하고 옆에서 지켜보며 나의 아쉬움 한숨만  내쉬는 그런 상태였다.

 

딱 한 번 드네딘 항구에 한국의 배가 들어와 그곳을 찾아 선원들과 이야기 하는 중에 배 주방장으로부터 새우젓 약간과 단무지 등 다른 양념을 얻었었다. 처의 입덧 이야기를 들은 선장의 요청으로 받은 이것이 몇 년 만에 처음 갖는 귀한 한국의 양념이었으니 이것을 받은 처의 입가는 큰 기쁨의 미소가 활짝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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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랜드 친구의 조언으로 담당 의사를 소개받아 정기적으로 검진하였고 매사 처가 좋아할 과일들을 열심히 사와 주었지만 조금 입에 댈 뿐 긴 곤욕은 혼자 참아 지냈다.

 

가끔씩 장거리 운전으로 외딴 경치 감상이라 하여도 어느 때 무엇이 먹고 싶다면 곧 준비해 주어 잘 먹을 것 기대하였지만 몇 모금의 입맛 보고는 이내 더 먹지 못하였던 일이 다반사였었다.

 

좀좀 더 배 부르고 예정 분만 기일이 다가오자 병원에서 부부간의 대비 준비 상황 교육도 받으며

최종 분만 시일이 돼서 급하게 차를 몰고 Dunedin Hospital 6.3km 거리 십 여분이 지나 도착하였다. 이것도 사전 예행 연습하여 거리를 쉽게 빨리 가도록 익힌 덕분이다.

 

병원에서는 그 준비를 미리 하였기에 쉽게 입원으로 들어가 담당 의사는 오늘 중에 분만 예정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종효는 5살이 되어 집에 혼자 남겨 두지 못하니 언제나 항상 함께 있었다.

 

이날도 급히 차 몰고 도착한 병원에서 대기 중에 밤을 맞는데 넓은 병실에 처는 힘들게 누워 기다린다. 깊은 통증의 산고에 진통 소리 들리는 입원실 밖에서 아들과 나는 뜬눈으로 기다리는데

“응애, 앙”의 귓가에 스치는 소리가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짐작대로 병실의 분주한 소란 끝나니 담당 간호사의 반가운 미소 띄우며 실내로 나를 안내한다.

종효를 앞세워 들어가 힘들게 버티었던 처 옆에 딸내미는 새곤새곤 잠자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산모, 아기 모두 건강하다며 축하의 말해 주어 이제 집에 돌아가 쉴 시간으로 십 여분 이상의 운전 도로를 달렸다. 지쳤던 나도 종효도 정신없이 잠에 떨어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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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밝아 온 새벽 종효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닿았다.

어제보다 조금 안정된 처의 모습과 옆에서 소근거리는 아기의 모습에 마음은 싱글벙글 신났고

산후의 조리는 뉴질랜드의 서양식 습관이라 병원에서 주는 식사는 입에 잘 닿지 않았겠다.

 

아울러 담당 간호사의 설명에 산 후 얼마 후 곧 샤워도 산모가 하도록 권유하였으니 우리네의 산후 미역국 먹던 것과 감히 샤워 물 닿는 일 금하기는 엄청 다른 것이다.

 

삼일 만에 퇴원 수속하니 출생증명서를 받았고 이때 이름을 Wonhee Nam媛熙 로 올렸다. 몇 개월은 담당 간호사가 집에 방문하여 정기적 상태 점검한다고 알려 주며 아울러 정부로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아기 분유값 weekly 몇 십 $ 씩 통장에 입금해 준다고 알려 준다. 차를 몰면서도 서행 안전을 하며 가속도 없이 살던 집에 들었다.

 

물론 아기 침대도 새로 구입하였고 며칠 전에 방의 창문 틈 막기도 철저하게 하였지.

2층 살림집이라 위에서 내려 보이는 전망의 시선은 멀리의 경관을 보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아기 기저귀 갈기와 우유 먹이기도 익혀 아기 뒷등 두드려 트림까지 마치면 침대에 늡히는 시간이 있었고 또 목욕도 처와 함께 도와 주니 부드러운 면으로 물기 닦기도 잘하였다.

 

시시때때 울어 될 때는 잠의 부족함도 있었지만 함께 감당하는 가족의 사랑이라 당연하였다.

서서히 커 가면서 차에는 유모차 필수였고 뒷좌석에 고정시킨 유아 의자도 꼭 챙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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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컴퓨터는 생소한 단어로 감히 나 같은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던 초창기의 시절이었다.

 

그러하니 육아 관리란 아들 종효를 키우면서 또 여태껏 보아 왔던 먼발치에서의 아는 것 정도에서 실제로 닥쳐 하는 육아에는 차이가 많이 있었다. 이리저리 상식 선상에서 그리고 이웃에서 들은 유아식을 만들어 주거나 혹은 유아 관리들을 특별히 받을 정보에는 한계가 많이 있었다. 

지금은 컴에서 검색하여 찾아 도움이 많지만.

 

조금 자라면서 홈닥터는 원희의 체형 다리를 보고 보도재 착용을 권유한다. 뉴질랜드인들의 체형과 다르게 휘인 다리 모양을 이상하게 보았으니 의사의 진단으로 긴 시간 정기 점검을 가지며 나이 별 예방 주사도 철저히 예정 일에 찾았다. 정부 예산에 유아 우유 비용 보조가 있어 우리 통장에 지체 없이 작은 금액이지만 입금되는 것을 보고 당시는 뉴질랜드의 사회보장제도에 한발 앞서 있던 것을 실감하면서 선진국의 삶은 안정되었지.

 

원희는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뉴질랜드의 시민권자가 되었다.

우리 가족의 나, 처 종효는 아직 영주권도 없는 오로지 나의 취업비자에 동거자 신분이라 매 3개월 마다 Work Permit 연기로 드네딘 노동국에 열심히 드나들어 담당자하고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드네딘에 오랫동안 터 잡고 경영하였던 Wilson Neil Co. Ltd. 가 파트너로 있어 취업 비자는 보장이 되었지만 가족 모두의 영주권 받기까지는 안심되지 않았으니 그 다음 해 1986년에 모두 영주권 취득하였을 때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상상해보라.

 

그때의 일을 상기하며 글 쓰는 지금은 감개무량하며 시간이 빠르게 흘렀구나 생각한다.

당시 나의 나이 36세 때가 지금의 72 2개월 만났으니 앞뒤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꼭 2배 혹은 ½의 세월이네.

 

***   ***

 

그동안 힘들도록 어렵거나 즐겁게 행복도 함께 하였다.

이런 세월의 희노애락을 지금의 회상으로 돌이켜 보니 그 회상의 앞뒤 오르내리는 세월의 엇갈림은 영화의 한 토막 같이 필름은 계속 이어진다.

 

지금까지 나의 이야기 글에 갖가지 내용이 올려졌지만 원희 태어난 과정이 자세하지 않아 오늘의 글에 새롭기까지 하다. 왜 없었는지는 생각지 못하고.

 

멋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지켜 주신 은혜의 주님 손길이 앞으로도 가족 함께 평안해 주옵소서.

 

위와 같이 2장이 넘는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 걸리지 않고 잘 완성하였다.

뭐 덧붙이는 수사 여구 없어도 빠르게 쓴 것은 너무나 생생하였던 일들이라 기억도 잊지 않은 결과다. 

 

2021 05 13일 목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