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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전 글에 올리지 못하였는지 아쉬워 하면서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이 내용의 글을 쓴다.
내가 고향 대전에서 학교 다닐 때는 당연히 집에서 매일 어머님을 뵈느라 별 걱정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겨우 들었다면 친구들 잘 사귀어라. 즉 좋은 친구를 잘 선택하여 만나야 한다는 정도였다.
1967년 초겨울 11월에 서울로 새 학창의 시절 맞는 나를 대전역에 마중하면서 타지에서 머물 때 걱정의 뜻을 담긴 건강 잘 챙기라는 말을 들어 그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이 젖는다.
그 이후부터 어머님은 전국의 명산 방방곡곡을 찾아 순례하여 국가를 위한 기도와 조상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한다며 천기 누설할 수 없어 그 정도만 알으라는 얘기를 수 없이 들려 주고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다니셨다.
가끔 어머님을 뵐 때는 꼭 몸에 소지하라며 쓰인 글을 머리에 새겨 두라고 말하고 나에게 준 작은 쪽지를 읽어 보면 한글로 쓰여진 문장이라 뜻 의미는 알듯 말듯 무슨 부적 같았다.
어머니 앞이라 내 팽개치지는 못하고 한 번 읽고는 내 지갑 깊숙이 넣어 오래 보관하였지만.
아울러 꼭 덧붙이는 말은
“앞으로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가 깜짝 놀라도록 바뀐다. 명심하여라. 우리 조선 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당시의 1965년 - 75년경에 위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해 보라.
이때의 대한민국은 막 발전하는 경제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의 시절이다. 국력이 미미하여 GNP $300.00 정도,수출 총액 10억$도 힘겨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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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한민국에 세계가 깜짝 놀랄 것이라던가,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말 같지도 않을 터였으니 어머니가 준 그 쪽지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만큼 뜬금 없는 구름 같았었다. 다만 그 정성이 있어 쪽지를 한 번 읽어 보고는 지갑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기라. 나중에는 그 쪽지마저 꺼내 버렸지만.
모처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쪽지라고 건네주던 일이 몇 차례 있었으니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고 엄청난 세월의 흐름이 지금의 오늘을 가리킬 때 되새겨 본다.
그러면 어머님이 어떤 연유로 이러한 일을 하신 경위를 살펴 보자.
나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쯤이니 1958년 경이겠다.
대전 부사동 집에서 왼편으로는 해발 457m 의 보문산이 있다. 대전 시가지를 내려 보일 만큼의 대전시를 가까이에 둔 산이다.
평소 어머님의 佛心이 깊어 보문산의 중턱에 집안의 당고모님과 함께 절을 지었다. 그리고 당고모님의 가족(딸 , 나에게는 육촌 누님 가족)이 생활하여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지어지기까지 힘든 절차 규정을 어머님이 뛰어다녀 잘 감당하였으니 절에서 어머니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을터 이곳에서 어떤 이유였는지 밀려 나와야 하는 관계로 큰 후유증을 받아 정신이 흔미한 횡설수설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상태를 맞아야 하였었다.
이후의 어머님은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혼미한 정신에 누가 보아도 정상인으로 볼 수 없는 신경쇠약 등 몰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보였었다. 집안의 누구 형제 누님도 만류하지 못하고 어머니는 계룡산의 신도안 산속에 머물러 기도 생활이 유일한 삶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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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안鷄龍山新都
계룡산은 충청남도 대덕군·공주시·논산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26m의 국립공원이며, 신도안은 논산군에 속한다. 계룡산 주위에는 갑사(甲寺)·동학사(東鶴寺) 등의 절이 있으며, 《정감록 鄭鑑錄》에서 주장하는 신도읍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논산시 두마면 부남리의 대궐터에는 조선의 태조가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정도전(鄭道傳)을 데리고 와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사하였다는 주초(柱礎)와 제방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84년 신도안의 재개발사업 이전까지만 하여도 70여 개의 종교단체가 있었다.
신도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기록과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조가 즉위하여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길이 멀어서 중지하고 말았는데, 그 뒤 그곳을 신도라 부르며 아직도 군데군데 초석들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록》에 따르면, 계룡산 제자봉(帝字峰) 밑의 지역을 예로부터 ‘제도(帝都)’라고 불렀는데, 신라 말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와서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어찌 조그만 나라에서 이런 명칭을 쓸 수 있읍니까? 당장 이를 바꾸십시오.”라고 하여 신도(辛都)라고 고쳤다가 조선 개국 초에 신도(新都)로 바꾸었다고 한다.
《계룡산록》에 보면, 무학 등의 간청에 따라 태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공사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이 곳은 뒷날 정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니라. 네 땅은 아니니 너는 한양으로 가거라.”라고 하여 공사를 중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설에는 태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웠으나, 민심이 돌아오지 않게 되자 남쪽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면 백성들이 호응하게 될 것이라는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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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도읍의 공사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민심이 수습되자 한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태조의 신도안 천도계획설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풍수지리와 민심의 불가분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계룡산신도안(鷄龍山新都─))]
이렇게 신도안은 유교계, 불교계, 단군계, 무속계, 기독교계 등 각종 종교 촌의 형성과 그 변천으로 종교계의 명승지로 알려졌으니 당고모님과 헤어짐으로 허탈해진 어머님은 머물 곳으로 신도안의 기도 생활이 유일한 낙이 되었던 것이라.
이런 모습에 주위에서는 본 정신으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면서 시간, 세월이 약이라고 알려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날 때 제정신이 돌아온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이 글의 초두에 올린 도무지 그 말 믿을 구속이 되지 않던
“앞으로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가 깜짝 놀라도록 바뀐다. 명심하여라. 우리 조선 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의 말을 들려주었으니 어머님의 아픔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곱게 쪽지도 받아 읽었고 또 소중하게 지갑 속에 넣기도 하였던 것이라.
그 당시 그런 말을 하면서 어머님이 헛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중요한 기도를 하는 것인지 설명을 할 때는 그 의미가 심장하게 열중하였으니 들리는 나에게 귓가에 잠시 멈췄다 또 한 귀로 흘리는 반복은 여러 번 있었으니 그때의 모든 일이 지금은 나의 심금을 울리기에 이 글이 나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을 알고 지금 다듬어 글을 쓰는 것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그 말을 되돌려 읽으니 얼마나 신통방통 맞는 말인가?
그 당시는 감히 그런 낌새나 조그마한 혹은 될 산출 근거 꺼리가 없었고, 십 년, 이 십 년, 삼 십 년 등 흘렀을 때 조국 대한민국은 그 존재감이 조금은 세계의 시선에 올려지더만 사 십년, 오 십년의 흐른 세월의 지금을 보건대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의 국력은 세계 10위 가까이에 거의 모든 부분에서 활약이 눈부시게 되었다.
*** ***
전 세계 200여 국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얼마나 동경하고 부러워하는가? 그 위용을 따르려 피땀 흘리는 국민들 생각해 보라. 세계 경제 10위 순위가 올 때까지 거져 생겼겠는가? 감히 생각지 못한 눈부신 성과의 자부심에 멀리 뉴질랜드에 사는 나로하여금 그 옛날 어머님의
“앞으로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가 깜짝 놀라도록 바뀐다. 명심하여라. 우리 조선 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라는
말씀은 위대한 예언적 말이 사실에 부합하였으니 지금 그것을 생각건데 어머님은 무엇을 근거로 이 말을 나에게 해 주었을까가 풀리지 않는 큰 의문점이 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도 십여 년이 넘어 살아 생전 이 의미를 여쭈지 못한 것이 정말로 아쉬움에 남았으며 사실 10여 년 전에는 지금의 대한민국 위상에 못 미쳐 있었기에 어떻게 견주어도 그 말 의중 알기는 힘들었나 본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글을 맺고 오늘의 교회 약속 모임으로 차를 달려 새로운 기분을 맞아 즐겼다.
시간의 여유마저 있어 예전의 벌터 농장 가는 길로 드라이브하였으니, 몇 년이 흘렀지만 그 당시의 일들이 새롭게 떠 오른다. 언제나 마음 부풀도록 우리 벌들과 만남이 있을 것 기대감이 항상 넘쳐 즐거웠는데.
나의 벌들과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운 연인 만나는 시간 같았다. 그러니 언제나 설렘이 가득하였으며 또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는 대화로 내검을 하였었다. 매번의 벌통 내검이 이러하여 또다시 만날 시간이 벌써 기다림의 순간으로 흘러가던 그때의 모습 흔적이 떠올라 추억 타령으로 시간을 보내고 근처의 슈퍼에 가느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 앞에는 육칠십 세 정도의 노인이 춥도록 떨며 앉아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차에 들어가려니 뭐라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 앞으로 다가갔다.
어눌한 소리로 조금 전에 내가 차에서 내려 슈퍼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들리지도 않은 몇 마디 겨우 마치더니만 두 손을 합장하여 한 푼의 도움을 청하는 기라. 동전 주머니 열어 보니 너무 작은 동전만 보여 뒷주머니의 지갑을 열어 $5의 지폐 한 장을 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윗 주머니 속에 넣는다.
*** ***
차에 들어와 시동을 켜 움직이니 나를 뚫어져라 보며 손을 흔든다.
작은 금액의 적선이지만 그에게 필요한 도움이었을지 다소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 안쓰러움 젖으며 교회로 돌아오건만 그 오래전의 어머님이 더불어 떠 오른다.
어머님은 언제나 불쌍한 사람들에 측은함이 넘쳐 어느 때라도 집에 찾아오는 거지들에 그냥 돌려보내는 적 없이 조금이라도 밥이나 쌀을 퍼 주었었다. 당시의 한국은 온 곳이 폐허로 또 배고품도 곳곳에 넘쳐났으니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눠 먹는 일을 일상으로 보면서 자라 왔었다.
그렇게 인정 넘쳤던 어머님, 아버님이 새삼스레 올려지는 내 마음이 벌써 옛 추억에 젖었다는 의미였으리라.
은연 중 나의 그 옛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꼭 내 눈에 눈물이 적시던 일을 앞으로 눈물은 보이지 말기로 혼자 다짐해 본다. 그렇게 나 혼자 마음 결정을 해 놓으면 그렇게 되도록 최면에 따라가지 않겠는가?
나는 나에게 힘을 주는 신념 결단 용기 야망을 무기로 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I can do everything in my power with determination, courage, belief, and ambition to give me strength.
삶(생활)은 검소하고, 생각(이상)은 높게!
淸貧樂道
Plain living, but high thinking!
내가 소중히 여기는 글이다.
내가 뉴질랜드 시간차로 참석하지 못한 어머님의 장례식장의 형님 누님 형수님 그리고 장례 모든 일정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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