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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벌 관심의 활동은 2011년 9월 8일이 시작이다. 그 관심은 그 몇 개월 전부터었으니 교회의 장옥윤 목사님은 양봉에 관심 이야기를 한다. 나는 1997년부터 벌였던 관광상품 선물 사업을 철수하고 건물 포함하여 일식당도 처분하였다. 그리고 한국식품 닫으며 해당 건물도 팔아 버리니 지금 살고 있는 27 Oakley Avenue, Waterview, Auckland로 1999년 8월 18일에 이사 온 것이다.
이때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니 처음 몸담았던 한국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이 즐거웠었다.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였다. 아무 사업도 없었으니 교회의 활동이 주 활동이 되어 본 교회 1988년 창립멤버의 주측대로 가족이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그리워하였었다.
2003년 7월경이 되자 서울의 누님도 종용하고 잠시 한국에 머물면 어떻겠냐는 예기에 나이 많은 어머님도 계시니 여러 가지 겸사로 고국을 찾았구나. 모처럼 본 나의 모습을 누님이 보기에 엄청 촌티가 풍겼다며 새 한국 스타일의 모습으로 옷이며 피부관리에 심혈 하여 차차 한국의 일상에 접어들었다.
당시에 누님은 강남구 도곡동의 허름한 아파트(지금은 가장 비싼 노른자 지역)에 살면서 아파트상가를 몇 개 작은 돈으로 구입하여 운영 중에 때 마침의 부동산 가격 오름새에 톡톡히 보상 받아 이것을 처분하여 용산 서부이촌동 대림아파트 102-2207에 살고 있었다. 이것도 한강의 조망이 좋아 시세마저 좋았고 아울러 곧 분양 오픈이 될 여러 상가를 가지고 있어 그 구입과 처분 차액에 바빴을 때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것도 누님은 이것에 염두에 두어 나를 이런 사업에 들도록 권유하였었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나에게 그간의 경제시스템 등 이런 부동산의 흐름이 쉽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맥을 옆에서 보게 되니 지켜만 보와도 될 일이었다. 또 대전의 작은 누님이나 누님의 아이들 즉 조카들에게도 서울 누님이 하는 부동산 투자에 발을 들여 엮기게 해 나중에는 큰 곤욕을 치뤘지만 누님에게 관리하는 분양권 상가는 25-30여 개가 되어 그냥 머릿속에 넣기는 어렵고 기록된 서류를 봐야 알 정도였는데 누님은 기억도 잘하며 적절한 시기에 처분을 쉽게 하는 등 나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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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 개 분양 상가의 단위도 프리미엄 합쳐 1억 – 1.5억 정도가 되니 누님이 받아 놓은 모든 상가의 가격대를 펼치니 약 30억대가 넘었다. 하물며 어떤 분양권은 내 이름으로 받아 놓아 누님이 적절히 운용하기 좋게 해 주었었다. 그럴 만큼 나의 주소지 주민등록이 살아 있었으니 당시만 하여도 행정 전자 시스템이 다 가동되지 않을 때라 가능하였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가능성이 없지만.
누나의 부동산 관계 사업도 막상 상가의 오픈이 되자 그 거품 프리미엄이 곤두박질 내려갈 줄 누가 알았을까? 어떤 분은 이렇게 변할 것 예측하여 적절히 발을 뺀 분도 있었지만, 누나는 그런 것에 빨리 발을 빼지 못한 관계로 엄청난 후유증이 들어 왔으니 은행의 빌린 돈 갚기에 벅차게 압박이 들어 왔다. 물론 은행도 대출할 때 합당한 담보가 있었으니 돈을 빌려 주었지만 누님 스스로 그 이자 감당하기는 앞뒤 가격 하락에 미련 없어 처분만이 답이 되었다. 그 당시 손해가 아까워 끝까지 소지한 일로 너무나 큰 손실이 되었으니 사람 일이란 그 후에 어떻게 변할지를 모르는기라.
이런 현실의 뼈저림을 보며 나도 그 생활에 연장하기보다 이쯤에 뉴질랜드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되었다. 그리고 2005년 귀국하여 다시 몸담던 교회에 잘 적응하였다. 이쯤에 교인 중에 벌을 키우던 이광석 집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그 사업을 처분하고 싶다는 의중의 이야기를 장 목사님이 나에게 말한 것이 벌 키우기 관심에 들어선 연유가 된다.
교회의 안수집사 임직도 받을 무렵 교회는 장 목사의 노회 파직 문제로 교회 안이 시끄러울 때이다. 20여 년 이상 아는 친분에 마지막까지 강하게 지켜 주는 입장이니 나의 교회 생활에서 이제 어떤 사업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의 화두가 나올 때. 이광석 집사가 벌 사업을 접겠다는 뜻에 실제 교회에서 가깝게 지냈던 교인 동료 3명이 그 벌 사업 동업으로 한참 대화를 할 무렵, 나는 벌 키우기가 어떠한지 뉴질랜드에 변화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면서 대처하였었다. 즉 N.Z 양봉 사업에 자료를 찾아 나름 내가 감당하겠는가를 보았으니 충분히 이 사업에 들어가 보자고 결심도 섰었다. 그런데 교우 4명의 동업 방식이 이광석 집사의 투자 사항 거부로 막히게 되니 나로서 난감하게 다가왔다. 투자 의향 다른 2명은 더 이상 관심에서 빠졌지만 나는 먼저 처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여 투자의 뜻이 맺어질 무렵이었으니 그냥 칼을 접는다고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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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 혼자라도 해 볼 결심으로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간 배웠던 양봉의 길목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양봉 클럽도 알아 매주 토요일의 오픈 시간에 참여하여 실제 경험을 보는 공부도 열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봄 시즌이 다가오는데 벌을 어떻게 구입하느냐가 관건이 될 무렵, 어느 양봉업자가 사정에 의하여 그의 벌 11통을 파는 광고를 접하고 실제 그를 만나 현지 답사도 다녀왔었다. 그는 곧 다가 올 병 수술로 멀리 Hellensville 지역 농장에 있던 벌들을 처분하려는 중이었다. 그의 차를 타고 시내에서 그곳까지 달렸다. 그리고 그 벌들을 내검하는데 이때는 벌 기본 장비를 구입도 하여 살아 있는 벌통을 열어 보니 물론 클럽에서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기로서니..
나에게 처음으로 내검이 되는 것이라.
그때가 2011년 10월 18일이다. Jim Forgie 벌 농장 내검
내 놓은 가격도 싼 편이라 괜찮았지만 이 벌 구입에는 나의 차량도 문제(4 Wheel Drive 필요 하다)가 되어 결국은 그의 벌은 아깝게 기권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이광석 집사에게 부탁하고 10월 20일에 그의 벌 2통을 구입하였다. 내가 클럽에서 배웠던 방법과 그가 알려 주는 벌 키우는 요령을 참고하여 시작하니 나는 대담하게 감당하도록 봄 시즌은 흘러 가는 것이었다.
벌 클럽에서 7주의 교육 코스도 이수하였었다. 저녁 시간이니 또 집에서도 가까워 여러모로 유익하였다. 벌에 대한 자료를 웹싸이트에도 많이 올라와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처음 구입한 2통의 벌을 애지중지 집의 뒤 뜰 서로를 멀리 둔 위치에 내려놓아 하루의 나의 일상은 그 벌통 앞이 되었고 매일의 벌통 열어 그 자라는 모습은 얼마나 재미 있었던지. 그 열정이 나를 이 바닥에 끌여 들은 것이 되었느니라.
*** ***
이 집사가 알려 준 방법이 매우 유익하여 그 말대로 따라 관리하여
처음
Full Depth Beehive 벌통을 분양받으면 가운데 쪽에 교미상의 원 소비와 여왕벌을 기준으로
원소비 그리고 옆은 공소비 그리고 원소비 그리고 옆은 빈소비 이렇게 10 소비가 채워진다.
이것으로 벌 키우기 시작 점차 여왕벌이 비어있는 원소비와 혹은 공소비에 알을 낳아 놓기 시작하면 벌통이 점차 벌로 차게 되어 적어도 7-8소비가 채워지면
1단 Super Beehive 를 올릴 준비하여 아래 벌통에서 원소비 3개를 위로 올린다면
아랫통과 윗통 사이에 수평 격왕판을 준비 하여 올린다
그리고 벌통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소비 그리고 옆에 공소비
원소비 그리고 옆에 공소비
원소비 그리고 옆에 공소비
그리고 양쪽 바깥에 공소비 1개 한쪽은 2개 도합 9개 소비가 차이게 한다.
이때 소비 9장이 되게 하는 이유를 잘 이해 하여야 한다.
꿀이 차게 될 공간의 여유와 일벌들의 원활한 공간을 줘 꿀 뜰 때와 내검 할 때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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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래 기본 벌통의 여왕벌 알 낳기 소비가 7-8매 채워 지면
2단 계상할 준비를 한다.
방법은 처음 1단에 올렸던 벌통을 2단에 올리고
1단 위치에는 처음 1단 계상하던 내용대로 여왕벌이 있던 아랫단 벌통의
3 매의 원소비를 1단에 지그재그 소비 놓는 방식으로 채워 놓으면 된다.
이렇게 벌 관리를 하게 되면 강군으로 벌도 강하게 살고
아울러 꿀도 열심히 채워지게 된다.
이 방법이면 분봉 열이 익기 직전까지 벌을 늘리며
1단 계상.
2단 계상 식으로 계상이 올라가며 꿀도 많이 채워지는 방법이다.
가을 꿀이 끝나면 겨울 준비로
1단 계상과 아랫단 벌통을 남기던가 아니면 아랫단 벌통으로만 겨울을 난다.
이때 1단 계상과 아랫단에 꿀이 남아 있도록 겨울 먹이로 남겨 놓는다.
그리고 웬만하면 경비 절약으로 벌통.소비 등을 자체 제작한다.
훈제 재료로 향 좋은 나무를 작게 쓸어 놓아 쑥 대신 사용한다.
오래 연기가 나와 유용하다.
위의 글은 나의 양봉일기 그 날의 한 부분 내용이다.
10월 20일 단상 벌 2통 구입에서 계상 1단이 올라가고 또 다음 주에는 계상 2단이 또 그 다음 주에는 계상3단이 올라 12월 중순이 되자 벌통의 무게는 엄청 무거워졌다. 그게 다 꿀이 채워져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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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지켜보았으니 마음은 얼마나 흥미진진하였겠고 또 꿀 수확이 가까워지자 신이 났던지. 한편 이렇게 벌통이 꿀로 채워질 무렵 내가 미쳐 생각 못 했던 난관이 봉착되었다. 즉 꿀의 무게로 벌통을 들어 내리거나 올릴 때 어려움의 극복이다. 그 어떤 것도 잘 감당하며 지나 왔는데 막상 수확이 가깝자 꿀통에 가득찬 꿀의 무게 합쳐 계상 3단의 무게만도 약 35kg에 육박하고 계상 2단은 약 25kg 정도, 계상 1단은 10 kg 정도로 각각의 무게 감당은 나의 허리가 아퍼지고 힘이 들기 시작하였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이런 것도 다 이겨보자고 뜻을 굽히지 않았고 12월 24일 쯤 꿀 채밀을 하였다. 그 무거운 벌통을 어렵게 집안으로 들여 놓았다. 주위 바닥을 깨끗이 씻은 다음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꿀 소비 한 장을 들고 받침대 위에 걸친 다음, 봉도로 꿀 소비를 깎아 내었다. 뻘뻘 땀을 흘리며 달콤한 꿀의 맛 향기 맡아 늦은 밤이 되니 온몸은 곳곳의 뻐근함에 빠졌다.
Honey Tank 에 이것을 넣어 꿀과 밀랍을 분류하도록 취하니 그날의 밤잠은 깊게도 빠져 다음 날을 맞는기라. 첫 수확에 35kg은 엄청 많은기라. 아직 이런 수확 후의 용기 준비도 부족하여 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때이니. 교회의 가까운 교우들에 꿀 선물도 주고 이제 본격적 수확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한편 벌들이 무럭무럭 자라 벌 숫자도 늘어나니 12월 20일에 이웃의 불평으로 시 담당자가 찾아왔다.
뒤 뜰에 있는 2통을 보고 불평하였던 25 Oakley Ave 집 담에서 멀리 떨어졌으면의 의향에 다음 날에 농장으로 옮기겠다는 답을 주었는데 막상 옮기려 시도할 때는 또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즉 벌통이 모두 4단까지 올라 있는데 어떻게 이것을 옮기겠느냐 말이다.
내 승용차로 불가능하니 그들이 요구한 저쪽으로 옮겨 주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하여 그 이웃에게 알려 주고 그렇게 약 10일 간격에 옮기는 작업을 하였었다. 한 번에 저쪽으로 옮기면 안 되어 매일 약 1m 거리를 두어야 벌들이 자기 벌통을 찾아가 손실을 없애야 했다. 그러니 10 m 거리 넘은 곳은 10일이 걸려야 가능했다.
12월 1일에는 감 농장의 벌 5통도 구입하여 나는 더 열심으로 집, 농장을 움직였었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으며 다음 해 2012년 1월 2월이 되니 차차 채밀량도 작아지고 2월 말 때쯤이 되어 겨울을 지내는 과정으로 꿀 먹이 남기는 방법도 배웠다.
Veroa 해충 약제도 넣어 주었으니 벌 관리의 계절 별 흐름을 알게 되었고 그간의 모든 체밀만도 약 150kg 정도로 나는 그 수확에 놀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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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벌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니 그 꿈은 엄청나게 부풀어졌고 오로지 꿀통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는가에 착안한 방법으로 내검할 때 그 옆에 빈 통을 놓고 각 소비를 하나씩 옮겨 내려 놓으며 반 정도의 무게는 가능함으로 그때 통을 옮기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나는 이 극복을 감당하게 되었다.
한 해를 넘기고 또 새 시즌이 들 무렵 교회의 김용겸 집사님에 벌 키우기도 알려 주고 이 사업에 관심 갖도록 해 주었으며, 또 박상덕 장로님, 김신기 집사님에게 가르쳐 주는 등 여러 교민들께도 알려 주었다.
새 여왕벌 만들기도 배워 벌통 늘리는 작업도 신났으며, 꿀 수확으로 한국의 형제들에 보내면 내 생활 수입에도 도움이 되어 다소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하였지만 벌키우기란 내 삶의 큰 즐거움의 한 일상이 되었었다.
농장 벌터 구하기도 여러 지역을 제안 받아 열심히 벌 키우기에 몰입하였다. 벌 키우기의 내검 등 모든 상태를 기록하여 컴에 저장했으니 수시로 필요에 따라 열어보며 비록 몸은 피곤으로 힘들었지만 마음은 늘 즐겁고 행복으로 가득 찼었다.
집의 벌터로 부족하여 멀리 20-30Km 떨어진 농장을 몇 개 빌려 각 곳을 돌아보는 재미는 매번 설렘으로 나의 벌 만나는 기대가 컸었다.
한 해 두 해 경력이 늘어나 주위 교회의 교인들에 가르쳐 주는 시간도 가져 한 때 그들도 벌 키우는 양봉을 사업적 분야에 들어간 분들도 여럿 있었다.
이곳 뉴질랜드의 계절 별 양봉으로 매년 9월경 봄 시즌 직전의 벌통의 일벌들이 크게 기지개 피는 시작에 여왕벌은 알을 봉판에 낳는 시간대가 되어 벌 숫자가 늘어날 때 주위의 산천은 꽃들이 만발하여 일벌은 꿀 따느라 바쁘게 벌통에 가득 잠기니 12월 중순부터는 제법 꿀 채밀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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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혹은 2월 중순에도 수확의 계절이 되어 이후부터는 벌 먹이가 부족하지 않게 남은 꿀이 있어야 하며, 가을로 접으면 벌 숫자도 줄고, 겨울 채비가 될 때 해충 박멸의 약제를 넣기도 한다. 그리고 6월 -9월까지의 겨울로 새 봄을 기다린다.
이런 싸이클이 매년 되풀이됨으로 몇몇 해의 관리 경험이 손에 익는다. 채밀된 꿀은 판매에 신경 써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항공 택배로 보내는기라.
양봉 관리 지출에서 수확의 수입으로 대체 될 때 큰 수익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용돈에 도움이 되었으며 나에게 이런 취미의 재미는 남들은 골프, 낚시 등의 취미 생활과 비교 할 수 있었다.
8-9년 차 2018년에는 한국에 다녀오느라 또 이후는 병충해 관리에 소홀하여 갖고 있던 벌들이 줄어들어 결국은 손을 씻게 되었지만.
해마다 봄 시즌이 되면 주위의 벌들이 집의 벌통안에서 나는 꿀 냄새에 그들 벌의 분봉열이 되면 우리 집의 빈 벌통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지만 옛말에 분봉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듯 나는 은근히 그들(분봉 벌)을 내 것으로 키우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그 많던 벌 장비의 처분 문제로 결국은 Trademe에 각기 장비를 정리하여 올렸으니 필요한 양봉업자들이 구입하여 거의 대부분은 처분하였고 약간의 내가 필요할 시 대비하여 둔 것은 또 어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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