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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보낸 사랑의 묘약

淸山에 2016. 6. 16. 11:16






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보낸 사랑의 묘약

 서영수 차 칼럼니스트·영화감독 
 편집=최원철
 
입력 : 2016.06.16 04:43

[이코노미조선:차(茶) 이야기]
 


 

차(茶)가 중국에서 산업과 문화로 정립된 것은 당(唐)나라 때다. 지방특산물로 지방 관리가 진상하던 토산물 품목의 하나였던 차는 당나라가 들어서며 황실공차(皇室貢茶) 제도를 통해 재배관리와 제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나라는 황실귀족문화를 넘어 주요한 재화가된 차에 대한 세금을 유통단계마다 부과했다. 세율도 점진적으로 높이며 경제지표와 국세수입의 주요품목으로 산정했다.


차로 세수 충당한 당 현종


건국 초기에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영토확장과 부국강병의 초석을 세웠다. 기행과 만행의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민생과 경제만큼은 활성화시켰다. 경제규모가 커지며 차 소비도 급증해 공급물량이 늘어났다. 당나라 문화와 경제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린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통치비결은 나라사랑이다. 또 당의 쇠락을 이끈 원인도 현종의 양귀비(楊貴妃)에 대한 빗나간 사랑의 결과다. 지도자의 사랑패턴에 따라 나라가 흥하기도 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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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를 올릴 떄만 사용하는 몽정차를 키우던 황차원. /이코노미조선



당 현종은

국민들이 즐겨 마시는
茶에 10% 세금 걷어

경세제민에 힘써
부국강병 이뤘지만

여색에 빠져
나라를 위태롭게 해
 

이융기는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바람 속에 살얼음판을 딛고 과감한 군사행동으로 황권에 접근했다. 말년의 측천무후가 마지못해 황제로 복권시킨 중종(中宗)을 독살한 중종의 황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노릴 때 이융기는 황실근위부대를 먼저 장악해 황후 위씨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를 일시에 제거했다. 이융기는 당나라의 실세인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연합해 당나라 5대 황제로 예종(睿宗)을 옹립했다. 예종은 큰아들의 양보로 셋째 아들 이융기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었다.


이융기를 독살하려는 태평공주의 야심을 간파한 예종은 복위 2년 만에 27세에 불과한 이융기에게 제위를 떠맡기듯 물려줬다. 이로써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시대가 열렸다. 정적이 된 태평공주와 무씨일가를 멸족시킨 현종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써 당나라를 세계 최고의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나라의 경제력은 전 세계 GDP의 25%에 육박했다.


차를 뜻하는 한자는 표준어와 방언을 포함해 여러가지 글자와 발음이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차(茶)’도 현종 이전에는 ‘도(荼)’와‘차(茶)’를 혼용해 사용했다. 현종이 서문을 작성한 <개원문자음의(開元文字音意)>라는 책을 통해 차를 ‘차(茶)’로 규정해 오늘까지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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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방들이 걷던 차마고도. /조선일보 DB
 

현종은 차에 세금을 부과해 세수(稅收)에 충당했다. 차에 붙는 10%의 세금을 피해 밀거래도 성행했다. 당의 도읍(都邑) 장안(長安)에서 산동의 태산까지 차 마시는 문화가 일상화됐다. 국가적인 차원은 아니었지만 티베트 말과 당나라 차를 교환하는 한장차마무역(漢藏茶馬貿易)이 시작됐다. 이는 실크로드와 이어지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효시가 된다. 현종은 당나라의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지나친 풍류와 여인 사랑으로 당나라를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뜨렸다. 측천무후의 조카 무혜비(武惠妃)와 사랑에 빠진 현종은 무혜비의 계략에 속아 조강지처인 황후 왕씨(皇后 王氏)를 폐하고 왕자를 셋이나 죽였다. 무혜비는 자신이 낳은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하고 악몽에 시달리다 급사하고 만다.


현종을 보필하던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전국에 미인을 찾아오는 화조사(花鳥使)를 파견하고 자신이 직접 푸젠성(福建省)까지 가서 날씬하고 가무에 능한 강채평(江采萍)을 발굴해왔다. 차에 조예가 깊던 현종은 차를 즐기는 단아한 강채평을 총애하며 매일 차로 승부를 겨루는 투차(鬪茶)로 시름을 잊고 세월을 보냈다. 현종은 차와 시를 좋아하는 강채평을 매비(梅妃)라 칭하고 황궁 안에 매화를 심어 그곳에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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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차. /바이두

 



현종은 화청지(華淸池)에서 무혜비가 낳은 아들 이모와 동행한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귀한 진상품을 며느리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늘에 제를 올릴 때만 사용하는 진귀한 몽정차(蒙頂茶)와 공이 가장 큰 신하를 선별해 1년에 한 번만 특별히 하사하던 황실공차를 아낌없이 보내며 사랑의 메신저로 활용했다.


당나라는 차를 생산하는 지역을 크게 8구역으로 나누고 다시 64개 지역으로 세분한 후 가장 뛰어난 16곳에서 생산된 차를 황실공차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민간에서 재배하고 만든 차를 지방관리가 진상하는 민공(民贡) 형태였지만 품질의 균일화와 정해진 날짜에 일정량을 공급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황차원(皇茶園)을 지정해 직접 재배하고 감독했다. 차를 만드는 생산설비도 나라에서 직접 건설하고 전문 인력을 투입해 황실공차를 만드는 관배(官焙)의 형태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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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의 초상화(왼쪽),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난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의 석상. /위키피디아·이코노미조선
 

당나라 쇠락 이끈 양귀비


이모를 변방으로 보내고 양옥환을 도교사원의 도사(道士)로 잠시 출가시킨 현종은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황궁 안에 만들어 양옥환을 불러 밀회장소로 사용했다. 현종은 매비의 질투와 만류를 무시하고 745년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했다. 양귀비의 등장으로 매비의 짧은 봄날은 사라졌다. 차를 즐겨 날씬한 매비는 가고 술을 좋아하고 통통한 양귀비(楊貴妃)의 시대가 열렸다. 61세의 현종이 맞이한 양귀비는 27세였다. 현종은 양귀비를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로 불렀다. 중국 4대 미녀 중에서 꽃도 마주치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수화(羞花)의 주인공이 양귀비다.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양귀비는 친족들로 조정을 구성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원조인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죽자 양귀비의 건달 오빠 양교(楊釗)가 재상이 돼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란 시호를 받아 전횡을 일삼았다. 나이 많은 현종의 눈을 피해 양귀비는 거구의 안녹산(安祿山)과 사랑놀이에 빠졌다. 변방의 절도사였지만 당나라 전체 군사력의 40% 이상을 장악한 안녹산은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안·사의 난을 일으켜 순식간에 장안으로 쳐들어온다. 피난길에 나선 현종은 마외역(馬嵬驛)에서 근위부대와 신하들의 압박을 못 이겨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환관 고력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귀비는 배나무에 비단 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죽음과 더불어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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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북족이 멸족까지 당하면서 황실공차를 멈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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