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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淸山에 2016. 4. 2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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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


기독일보 뉴스룸 기자 (news@cdaily.co.kr)

입력 2016. 01. 18 19:01  |  수정 2016. 01. 19 09:01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 머리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창립원장)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를 가르치신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기도를 통하여 열리고 지속된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보시는 주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시면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공동으로 함께 기도해야할 내용들을 가르쳐 주신다. 필자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면서 새해 초두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지기를 원한다.

  


 


I.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

주기도문은 산상 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주기도문의 각 구절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아 나갈 때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은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하드라도 기도를 공동으로 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a; 눅 11:2)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면서(마 6:5-8) 주기도문을 기도의 길잡이로 가르치신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의 기도하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주기도문"(Vaterunser, Lord's Prayer)이라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드리는 기도다. 누가가 기록한 전승된 주기도의 내용을 마태는 7가지 청원기도로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처음 3가지와 끝에 첨가된 1가지 청원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되는 내용이고 중간에 이어지는 4가지 청원은 우리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주기도를 구성하는 두 부분의 상호관계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사이의 관계에 비교된다. 십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으뜸 계명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주기도도 하나님 사랑와 이웃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Cyprian)은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예배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분은 이 말씀들을 우리에게 선물하셨고 이 말씀들로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신다."(De dominica oratione, 2, in: Thasci Caecilii Cypriani Opera omnia, CSEL II, 1, 265-294.) 주기도는 개인적 기도인 동시에 신앙공동체의 기도다. 주기도는 가족이나 사회계층, 남녀노소와 모든 문화와 국가와 인종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다. 이처럼 주기도는 모든 경계를 뛰어 넘어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만든다.


I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πατήρ u,mw/n)라고 부르도록 인도하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b)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시면서 제자들을 자신이 갖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끌어 들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린이가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인 "아바"(αββα, abba)라고 호칭하였다. "아바"(막 14:36)는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아람말이지만 우리말 "아빠"하고는 다르다. 우리 말 "아빠"는 어린 아이의 친밀성을 표현하지만 존경감은 없지만 "아바"는 천진난만한 친밀성과 아울러 존경하는 마음이 배제되지 않는다.("아바" 용어 해설, Stuttgarter Erkläungsbibel. 해설 관주 성경전서, 3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통 쓰이는 용어는 '아브'인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시 하나님 관념으로는 파격적이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πατήρ σου, your father)요 "우리 아버지"(πατήρ u,mw/n, our father)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을 하나의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시며 동시에 그들을 특별히 은총을 입은 자들과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결속시키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치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게 구하듯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누가는 이 좋은 것을 "성령"(the Holy Spirit, pneu/ma αγιος)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되시는 분이시다.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기꺼어 내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게 하신다. 우리 기도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복이라는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정화하고 바로 잡는 법을 배워가는 길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 즉 그의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Kolmar: Alsatia, 1941; Freiburg: Herder, 1947, 1979(6. Auflage)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빌립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에게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시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첫째, 아버지는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우주만물과 모든 유형과 무형의 존재는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진흙에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나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유일하신 독생자이신 예수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호칭하며 우리는 입양된 형제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우리 아버지"라고 호칭할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είκὼν tou/ qeou/, image of God, 고후 4:4; 골 1:15)이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의 모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의 가르침을 좇음으로 성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육신의 소욕은 죽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III.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1.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우리 기도의 대상

주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난다. 우리 기도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주 대상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마 6:9c) 제자들이 청원해야 할 본래적인 첫째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비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가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 스스로가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거룩하게 하다"는 거룩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을 뜻한다. 예언자 에스겔은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38:23)


2. 여신상은 성경적 하나님 상에 배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아니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성적 비유는 있으나 여신은 없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모성적 성품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rahamim)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히브리어 단어 '라하임(rahami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 하나님의 자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모태는 어머니와 아기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육체에서 빌려온 이 상징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품고 있는 그분의 마음을 깊이 이해시켜 주는 선물이다.


여신(goddess)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교회의 주변에 많았다. 여신들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상징은 성경의 하나님상(像)에 배치(背馳)된다. 여신들은 범신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런 사고에서는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처럼 세상과 사물과 인간은 존재의 태(胎)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기도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은 여신들을 배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피조물에 대한 초월적인 주권을 나타낼 수 있었다. 신구약 성경에서 "모성애"라는 표현은 상징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여신(a female diety)이라는 단어는 없다.


3.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이 청원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신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구약성경에 신의 이름이 직접 언급될 경우는 주로 야웨(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웨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등장한다. 성경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출애굽 사건 이전까지 고대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엘(El)이라는 최고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그 신의 이름이 '엘로힘'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에는 '엘 샤다이'(El Shaddai·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출 6:3), '엘 엘리욘'(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9), '엘 로이'(El Roi·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등 '엘'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 나온다. 이처럼 엘로힘은 야웨라는 이름(神名)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엘 신을 폐기하고 야웨 신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엘이 야웨 안으로 통전적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야웨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Elohim)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Yahweh)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a) 모세는 그의 민족을 구출하러 그를 이집트로 보내시는 하나님에게 이름을 묻는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יהוה , Yahweh, Jehovah, YHWH)시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탁월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이름, 하나님의 고유명사, 또는 4자음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4자음 YHWH를 말한다) 등으로 불렀다. 히브리 구약성경을 전수한 유대 맛소라 학자들은 성경을 베껴 쓸 때에 이 거룩하고 신성한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을 그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발음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 네 글자의 하나님 이름(YHWH)이 나올 때마다 그냥 '주'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모음 부호인 '아도나이'(אֲדֹנָי, adonai)를 발음했을 뿐이다. 19세기 히브리어 학자 게제니우스는 "아도나이"(Adonai, 주)와 "엘로힘"(Elohim,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대체하는 모음자는 이러한 대체 발음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마소라 본문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선언하였고 이러한 추측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H. W. F. Gesenius, Gesenius's Hebrew-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9[1847]), 337)


오늘날 개역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본래의 자음들과 대체모음들의 혼합물이다. 70인경(the LXX)은 모세오경을 번역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주'(主)라는 뜻의 '퀴리오스'(ὁ Κύριος, kyrios)로 번역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야웨(여호와)로서 모양도 없고, 신화가 없고, 성(性)이 없는 인격적인 존재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 동사 '하야'(hayah) 동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떨어지다(fall), 생기다(befall), 되다(become), 생존하다(be, exist) 등이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과거 언젠가 다른 신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며 결코 창조된 적이 없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출 3:14). 이 이름을 이사야서에는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고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로 소개하고 있다(계 1:8).


4. 하나님 이름을 헛되어 사용해서는 않된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신명기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목적으로 또는 남을 속일 목적으로 또는 농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욕설로 사용하는 것도 이 계명에 걸린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며 우리 삶과 생각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감찰하시며 현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1-5)


5.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윤리와 도덕을 도외시한 사업 번영이나 출세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게한다.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하려고 할 때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욕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에서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저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이 선행이요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주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우리의 말이 소박하고 품위가 있어야하고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서 성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계속>


 



[김영한 칼럼] 예수가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


기독일보 뉴스룸 기자 (news@cdaily.co.kr)

입력 2016. 01. 19 09:01  |  수정 2016. 01. 19 15:01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창립원장)



IV.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  


1. 하나님 나라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기도의 청원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마 6:10a)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삶의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사회적 평등을 무력과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는 1989년 동구의 민주화와 그 종주국인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이라는 공간적 의미보다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내면 속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속에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확산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비가시적인 통치적 실재는 내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와 헌신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 개인,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생태계, 우주 속에서 외면화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2. 복음주의적 이해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나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의 억눌린 자와 불행한 자를 돌보는 일은 여태까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74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ent) 이후 복음주의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신앙적 발상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김영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신학적 성찰,"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편, 2014년 제6호, 11-49.) 이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인 칼빈주의자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칼빈주의적 이해

칼빈주의(calvinism)는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체계다. 칼빈주의는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the worldforming Christianity)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2nd ed. 1994;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2007, 1장.) 칼빈주의는 부조리한 사회 질서와 구조를 개혁해서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개혁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사회적 불의에 의해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다. 이런 기독교라야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이 발견한 기독교였고 이것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사회변화에 소극적 이었으나 그보다 26년 후에 태어난 칼빈은 적극적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는 어거스틴적이고 중세적인 회피적 기독교로서 내세 지향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화에만 주력했으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내면적 기독교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사회 구조 개혁에 힘을 쏟았다.


4. 종말론적 메시지: 생명의 떡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 중 많은 무리들이 떠나갔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수많은 군중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요구했다. 군중들은 세상에서 번영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세상에서 정치적 메시야에 의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이제 열두 제자들만 남았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생명의 떡 교훈은 종말론적 메시지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인치신 인자가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 메시지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인자로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로서 영생을 주시는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manna)를 먹고 육신의 생명을 유지했다. 이는 옛 만나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새 만나를 약속하신 것이다. 새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인자, 즉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옛 언약을 상징하며, 이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의 떡이란 새 언약을 상징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복음의 언약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5. 신자유주의의 세상 경제 질서에 대한 대안: 사회적 자본주의

우리의 육신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풍요한 양식이 아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가르침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세계는 더 가진 나라와 덜 가진 나라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되었다. "세계 체제(World-System) 분석"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 사회학자 임마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30-)에 따르면, 근대 세계 체제의 주된 특징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민족이 점차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 하나로 여지없이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와 북서부 유럽과 일본이라는 중심부가 반(半)주변부나 주변부 국가들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있다. 세계가 발전하지만 많이 가진 국가그룹들이 덜 가진 국가그룹들을 지배하고 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관계에서도 탐욕과 욕심이 지배하고 있으며,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경제가 발전하나 진정한 세계의 갈등은 해결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11년 10월 전세계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 시위가 전세계 도시를 뒤흔들었다. 10월 15일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시작으로 서울과 도쿄 등 아시아 도시를 비롯해 런던·베를린·마드리드 등 유럽 도시, 뉴욕 월가와 맨해튼 등 아메리카 대륙에도 분노한 99% 의 '보통사람들'의 외침이 거리로 쏟아졌다. 실제 다양한 요구를 지닌 시위대를 결집시키는 것은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이란 구호다. 영국 런던의 한 시위자는 "이젠 충분하다. 우리는 대기업과 은행 시스템의 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다. <뉴욕 타임스>는 언어와 지형, 규모 등이 다 다름에도 시위대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에 대한 좌절로 '뭉치고 있다'고 주목했다.("1%위한 사회 바꾸자" 세계 동시시위, 등록 :2011-10-16 19:56 수정 :2011-10-16 22:35 한겨레, 이정애 박태우, 브뤼셀/이본영 기자, 뉴욕/권태호 특파원 hongbyul@hani.co.kr)


한국에서도 최근에 기독교 기업으로 알려진 이랜드 사태가 불거지자 싸잡아 기독교도 함께 욕먹었다. 자유방임적 자본주의(Laissez-faire capitlaism) 사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우호적으로 볼 수 있는 신학 논리가 매우 빈약했다는 점이다. 소외자와 약자에 대한 권리를 시장 논리로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진 자들이 덜 가진자들을 배려하고 이들과 나눔으로써 상생하도록 하는 사회적 자본주의(social capitalism) 이론이 요청된다. <계속>

 



[김영한 칼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I)

기독일보 뉴스룸 기자 (news@cdaily.co.kr)

입력 2016. 02. 03 10:02  |  수정 2016. 02. 04 13:02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VII.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 용서는 상처 받음과 보복 악순환 해결의 길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 6:12)
이 청원 기도 대목에서 예수님은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허물, 잘못과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 인간의 삶은 가정, 친구, 직장,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회생활에서 인간들 사이에 불가피한 관계의 손상이 발생한다. 이는 욕심이나 탐욕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무의도적인 행위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죄를 저지름으로써 죄과가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상처를 준 잘못이나 죄과에 대한 보복의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보복하게 되면 당한 자는 다시 이에 대한 보복을 하게 되며 상처 받음과 보복의 악순환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해결의 길을 제시해주고 계신다. 상대방이 나에게 범한 죄과에 대하여는 보복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하여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죄는 복수를 통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로써만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범죄한 피조물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용서는 복음서 전체를 통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다음같이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분쟁하는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2. 용서의 힘은 예수로부터 온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회수를 철폐하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3-35)를 가르치신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약 5천 데나리온이다, 마 20:2)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것을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빚 전부를 갚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동료와 타자에게 의도적으로 부지 중에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들은 먼저 우리에게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 동료과 타자들의 허물과 죄과를 용서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죄가 가져온 상처와 파괴는 성찰하고 치유함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용서하라는 것은 피해를 당하고 상처받은 일에 대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는 값이 든다. 당한 자가 그 악을 자기 안에서 사랑으로 태워 없애고 스스로 새로워 져야 한다. 이 과정에 그 잘못한 사람을 끌어 들이고 그에게 용서를 선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악을 용서라는 선으로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용서해 줄 수 없고 오직 인간으로 오신 예수만이 용서해 줄 수 있다. 라인홀드 슈나이드는 말한다: “악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얼굴은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68.


여기서 우리는 기독론적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고난 속으로 내려와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이러한 청원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용서라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예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다.


VIII.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1.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마 6:13a)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청원 기도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 아니하신다. 사도 야고보는 다음같이 말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에 의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예수님은 40일간 인간이 당하는 빵의 시험, 명예의 시험, 세상 영화의 시험을 당하시고 말씀으로 그것들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성정을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을 받으시고 이김으로써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악마는 “참소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고발한다.”(요 12:10) 구약의 욥기에서 보면 마귀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하나님은 마귀가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시나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라고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우리 눈을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항상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고정시켜야 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원수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정성, 그리고 우리의 눈길은 모두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25.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으나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다.


2. 마귀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 한다.

마귀의 시험이 올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 낸다. 마귀의 큰 시험의 경우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결국 이겨내나 그 극복 과정에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어진다. 좋은 포도주가 되려면 포도즙이 발효해야 하는 것처럼 시험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낮아지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 인격은 정화되고 변화된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정화(淨化)하고 포기하고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성숙과 온전으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시험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 통과하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는 섰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넘어지지 않을까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의 묵상과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교만과 명예와 세상의 영화가 주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청원해야 한다.


IX. 저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1. 악의 네가지 종류

“악에서 구하소서.”(마 6:13b) 주기도의 마지막 청원기도는 바로 앞의 청원 “않게 하소서”라는 부정문을 “하소서”라는 긍정문으로 바꾼다. 악이란 무엇인가? 첫째, 악이란 비도덕적인 것, 비윤리적인 것이다. 탐욕, 불신앙, 범죄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경우 악이란 인격적 존재가 자기 정체성에서 이탈하거나 교만하거나 과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신체의 병듬, 질병이다. 질병이란 건강한 몸과 정신의 상실로서 자연적 건강의 파괴다. 이 경우 악이란 비인격적 물리적 신체적 비정상 상태이다. 셋째, 사회적 불의한 구조나 제도이다. 인신매매, 성매매, 갱 조직, 마피아 조직 등이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패권(오늘날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IS), 알케에다 등) 등은 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구조적인 악에는 인간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연류되어 있다. 넷째, 자연재해가 가져오는 폐해(악)이다. 태풍, 지진, 폭우, 화산의 폭발, 토르네이도, 엘리뇨와 나니요, 기후의 변화 등이다. 이 경우 악이란 자연적인 조화 상태의 상실로서 비인격적 존재다. 이처럼 악이란 비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고 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다. 두 가지가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악이나 악의 상징 배후에는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사에 해를 끼치는 마귀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이러한 악은 개인의 몸과 마음,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 사단이 준동하여 욥의 아들 딸들을 급속히 닥친 재난으로 희생시키고, 욥을 심한 피부병에 허덕이도록 하고, 다윗을 부추겨 욕망을 만족시키러 간통을 저지르게 하고 살인까지 범하도록 하고, 군사적 안정을 도모하러 인구조사를 하도록 한다. 인간 개인의 범죄, 단체의 범죄, 국가의 범죄의 배후에도 악의 원흉인 마귀의 준동이 있다.


2. 악은 십자가로 이미 제압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악의 세력과 공격은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인 우리 주변의 인물과 환경을 통하여 악은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파멸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악의 준동에 결단코 절망하거나 이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악마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며, 악의 권셰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섭리에 악은 사용되고 봉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악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떠한 악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b) 예수의 십자가로 악의 세력은 이미 제압되었다. 개선의 날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나 이제 우리는 개선의 날을 대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천명한 기독교 종말론의 “이미-아직”(already-yet)의 긴장관계다.


사도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유 17절)고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8절)고 예언하고 있다. 사도 유다는 마지막 시대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


X.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 송영은 삽입된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 6:13c) 주기도의 이 구절은 나중에 삽입된 구절로서 짧은 형태의 주기도인 누가복음(11:2-4)에는 없고 긴 형태인 마태복음(6:9-13)에 전승되어 왔다. 긴 형태의 주기도는 그 자체로 이미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상당히 고정된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2세기 첫 무렵의 교회 규범에 보면 벌써 13절에 예배를 마무리짓는 송영이 덧붙여 그만큼 더 길어진다.


이 송영은 다윗이 솔로몬에 의해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예물을 드리면서 올리는 감사기도: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역대상 29: 10-11)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용어 해설 “주기도”, Stuttgarter Erkläungsbibel. 해설 관주 성경전서, 56.
그 뒤로는 이 송영이 신약성경의 나중 사본들에서도 마태복음의 주기도를 맺는 말로 나온다.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이를 마태복음 6장 13절 하반절에서 괄호 안에 넣었다.


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주권자 하나님에 귀속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인간 왕이거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로지 창조주와 섭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풍성한 성전 건축예물을 드리고 다윗이 감사기도를 드린 구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는 우주의 창조자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왕이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그 정신이 되돌아 온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어귀도 이와 비슷하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 그리고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섭리를 계시받으면서 드리는 사도 바울의 송영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간구에서 송영으로 나아간다. 송영은 기도의 절정이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영혼의 찬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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