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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를 가장 멋진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

淸山에 2016. 2. 25. 18:20







안개를 가장 멋진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 2016.02.25 15:11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2):김승옥과 김지하와 순천만의 안개밀(上)]
 
 

지금으로부터 52년전인 1964년 한국 문단(文壇)을 매혹시킨 문장이 등장합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안개를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젊은 날의 김승옥. 순천 김승옥 문학관 입구에 걸린 사진이다.
 

김승옥(金承鈺·75)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의 글을 두고 시인 김지하는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극찬을 했습니다. 훗날 ‘도가니’라는 소설 무대로 무진(霧津)이라는 도시가 등장한 것은 그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합니다.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이 다른 대표작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章’보다 지금까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한 소설가는 “속수무책의 패배의식이 이렇게 찬란한 문장이 될 수 있다니…”라고 평했는데 더 정확한 것은 황석영의 말입니다. 그는 김승옥의 소설을 “그 이전 시대의 것들에 비하면 대단히 다른 면모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도록 합니다.

“매사 엄숙하지 않고 관념이 아닌 장난스런 말투로 시각 촉각 청각 냄새 분위기 등을 통하여 사건을 전개해나간다. 아마도 이런 문체가 ‘감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평하고있습니다.

“나에게 ‘60년대 작가’라는 별칭이 붙어다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카테고리야말로 1960년대 상황인식이라는 걸 깨닫게되는 것이다. 1960년대를 고려치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순천만의 농토다. 그 끝은 바다다.


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였던 시절, 그에게 남긴 평도 인용해볼만합니다.

“김승옥의 산문은 바다 또는 바다에 연한 소도시에 관하여 서술할 때 가장 명징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김승옥의 바다는, 때로는 카뮈의 에세이들이 그려내는 알제리의 바다처럼 생의 작렬감에 가득 찬 바다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도시(=현실)와의 불화의 관계 위에 설정된 자폐의 공간이다. 김승옥의 많은 젊은 주인공들은 바다에서의 갱생을 꿈꾸며 바다로 갔다가 바다에서 죽는다. 그 바다는 소설 속에서는 수 많은 이미지들에 의해 모자이크된 가공의 바다이고, 지도 위에서는 김승옥이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냈던 여수 앞바다, 순천만, 광양만의 바다이다.”


순천만 위로 재두루미 가족이 하늘을 날고있다.


김훈은 심지어 이런 헌사(獻辭)까지 바치지요.

“70년대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 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푼씩 주고 돌아갔다.”
 

소설가 김훈이 신문기자 시절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 대해 쓴 지면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무진이라는 도시는 대체 어디일까요. 역사적으로는 광주광역시의 옛 지명가운데 하나가 ‘茂珍’ 혹은 ‘武珍’이었다지만 작가 스스로는 순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김승옥은 순천(順天)이라는 바닷가 도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김승옥은 1941년 12월23일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김기선과 어머니 윤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명(兒名)은 학길(鶴吉)이었다고 합니다. 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 이들은 귀국해 전남 진도에서 수개월을 지내다 광양으로 갔습니다. 광양 매화마을에 있는 매천 황헌 선생 유적지가 바로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김승옥의 본적지는 전남 광양인 것이 분명합니다. 1년 뒤인 1946년 김승옥 일가는 순천으로 이사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1948년 김승옥이 순천 남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순(麗順)반란사건으로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김승옥의 공식 기록에는 ‘아버지가 여순반란사건으로 사망했다’고만 돼있습니다. 정부편에 섰다 참변을 당했는지 좌익편이었는지가 불분명하지요. 순천만 근처에 있는 김승옥 문학관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는 “김승옥 선생의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좌익편에 섰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관계자의 말이기 때문에 100% 사실로 믿긴 어렵습니다.


순천시가 만들어놓은 김승옥 문학관이다.


아버지를 잃은 김승옥 3형제를 키운 것은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일가는 경남 남해로 피난갔다가 다시 순천으로 돌아왔는데 김승옥은 1952년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해 게재된 것이 계기가 돼 동시, 콩트 등 창작에 몰두하지요.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행상을 하던 김승옥의 어머니가 순천의 한 책방 주인에게 “제가 한달에 한번 결제를 할 테니 아이가 원하는대로 책을 읽게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 책방을 찾아보려했으나 순천도 개발이 진행돼 찾지 못했습니다.


서울 문리대 60학번은 우리 문학사에 남을 천재들이 대거 출현한 시기이다. 사진 위에 쓰여진 이름은 당시 '산문시대' 동인들이다. 왼쪽 위로부터 최하림, 김현, 두번째줄 김치우와 한사람 건너 김승옥이다. 기자는 공교롭게 시인 최하림과 생의 마지막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김승옥은 명문 순천중-순천고를 거쳐 1960년 서울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해는 문학사에 남을 천재(天才)들이 출현한 시기입니다. 불문과의 김승옥-김현-김치수, 독문과의 염무웅-이청준-김주연-김광규, 영문과의 박태순-정규웅 등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그들보다 한해 빠른 1959년에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고 김화영(불문과)-오세영(국문과)은 그들보다 한해 늦은 1961년 서울문리대에 합류했으니 가히 기념비적인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중에서도 김승옥과 이청준은 가히 독보적이었지요.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요. “김승옥과 이청준의 등장은 김동리-황순원 이후 박경리-서기원-이호철-선우휘 등 50년대 작가군이 보여주었던 한국적 소설의 틀을 깨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로 보다 치밀하게 시대상과 인간상을 그려냈다.” <中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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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