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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 디엠[진회숙 칼럼]

淸山에 2015. 5. 30. 16:09







[진회숙 칼럼]

카르페 디엠
[중앙일보] 입력 2015.05.30 14:21  
 


 
휴가철이 다가온다. 주변에 벌써 여행계획을 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번 여름에 유럽으로 갈까, 미국으로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그것을 보니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여행본능이 되살아난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아! 떠나고 싶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여행다운 여행을 못해본 지 그 얼마인가. 이제는 그만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누리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다.


한 10년 전에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와 함께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여행일정은 17박 18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쉬기 위해 나는 떠나기 전에 죽어라 일을 해야 했다. 몇 편의 원고를 출발하는 날 새벽까지 썼다. 잠을 못 자 눈꺼풀이 감겼지만 아침이면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일념으로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18일 동안 휴가를 얻었다. 만약 내가 직장에 매어 있었다면 이 정도 긴 휴가를 내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프리랜서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나는 고정 수입이 없는 프리랜서에게 이 정도 자유마저 없다면 세상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고 말했었다.


프리랜서의 장점은 절대 잘릴 염려가 없다는 것.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정년퇴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휴가 기간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도 있다. 원한다면 쭉 쉬어도 누구 하나 뭐라 그러는 사람 없다. 이렇게 장점이 많은 반면 단점은 단 한 가지, 고정 수입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유럽 여행을 간다니까 그동안 돈 많이 벌어놓은 모양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돈? 천만에. 한 카드회사 선전에 유명한 문구가 있지 아마.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말 대로 그동안 열심히 일했기에 카드 한 장 달랑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비행기표도 카드로 사고, 유레일 철도패스도 카드로 샀다. 현지에서 쓰는 비용도 모두 카드로 했다. 물론 여행하는 동안 앞으로 갚아야 할 카드값에 대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의 무모한 사치를 부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카드 고지서가 날아오는 것은 다음 달이니 그때까지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냥 즐기자고 생각했다.


딸아이와의 여행은 정말로 즐겁고 행복했다. 특히 스위스의 알프스를 여행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우리는 온갖 종류의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알프스 들판의 아름다운 풍광에 완전히 넋이 나갔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그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그대는 그토록 아름답다!”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세상에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알프스를 여행했던 그 때를 꼽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짧고 고통은 길다고 하던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팍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 달, 이른바 카드 고지서라는 것이 그동안 내가 여행에서 얼마를 썼는지를 확실한 숫자로 보여주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돈을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까지 굶어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까.


지금, 나는 또다시 무모한 도전의 기로에 서 있다. 아이들 결혼자금은커녕 노후를 대비할 자금조차 전혀 모아놓지 않은 주제에 또 다시 카드 들고 여행갈 생각을 한다. 물론 십 년 전보다 명분은 더 확실해졌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내 나이. 이 나이는 미래를 대비할 나이가 아니라 ‘현재를 즐길’ 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건강이 허락할 때, 인생을 즐겨야 하는 것 아닐까?


내면의 목소리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으라).”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 hwesook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