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이란은 왜 시아파 국가가 됐을까?

淸山에 2016. 1. 12. 12:17




이란은 왜 시아파 국가가 됐을까?


카테고리 : 역사의 책갈피에서 | 작성자 : 권재현

2016-01-11  by  권재현 





—사우디아라비아 대 이란. 영토는 사우디가 더 크지만 인구는 이란이 3배 가까이 더 많다.


  연초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충돌로 국제유가 시장이 들썩였습니다. 양국의 알력을수니파 종주국(사우디)  대 시아파 후견국(이란)의 대결로만 보는 것은 복잡한 사안를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결은 이슬람 종파분쟁 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정치체제가 함께 얽혀있는 복잡한 실타래입니다. 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볼까요?

 

  사우디와 이란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무너진 이후 중동의 맹주 자리를 두고 다퉈온 라이벌입니다. 전통적으로 중동의 이슬람국가 중에서 아랍민족을 자처하지 않는 국가는 이란과 터키 둘뿐입니다. 인구 8100만을 자랑하는 이란은 옛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역시 인구 8000만에 육박하는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세운 투르크족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투르크족은 중국북부에서 이동해온 서돌궐족의 후예입니다. 반면 사우디는 7세기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근거지로 서남아시아의 셈족과 북아프리카 햄족을 이슬람문명을 통해 하나로 묶은 아랍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우디는 인구가 28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영토는 전통적 중동지역에서 가장 큽니다.



  이런 민족적 차이에 종파적 갈등이 더해집니다. 사우디와 이란으로 대표되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은 약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니-시아파 간 갈등은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숨진 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이냐를 둘러싸고 시작됐습니다.아들이 없었던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600?∼661)를 지지한 사람들은 ‘알리의 추종자들’이라는 뜻인 ‘시아트 알리’, 또는 줄여서 ‘시아’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기존 지도자들의 합의를 중시했는데 순나(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하는 ‘수니’를 자처해 수니파의 기원이 됐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은 4대 칼리프였던 알리가 661년 내란을 진압하던 도중 암살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훗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게 되는 무아위야가 알리의 장남 하산과 차남 후세인도 무참히 살해하면서 수니-시아 사이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에 버금가는 지도자로 여기는 알리의 후손만을 가톨릭의 교황에 해당하는 ‘이맘’으로 받듭니다. 반면 수니파는 우마이야 이후 수많은 칼리프에게도 정통성이 있다고 봅니다. 알리는 여러 칼리프 중의 한 명일뿐입니다. 또한 수니파의 이맘은 유일한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모스크마다 예배를 주관하는 이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목사를 닮았습니다.

 

 


—이란 사파비 왕조 창업자 이스마일 1세의 초상화
 
 

 

  무슬림 전체를 보면 수니파(85%)가 다수파이고 시아파(15%)는 소수파입니다. 그런데 중동에서 이집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이란은 어떻게 시아파 국가가 된 것일까요? 이란도 사파비 왕조(1501년~1736년)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수니파가 다수였습니다. 그러다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화하면서 이란인의 95%가 시아파가 된 것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왜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화한 것일까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이슬람제국 형성 초기인 652년 아랍민족에 정복당하면서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합니다. 이후 이슬람제국은 아랍 계열의 우마이야 왕조(661~750년)와 아바스 왕조(750~1258)로 이어지다 아랍계와 투르크계 왕조의 군웅할거 시대를 맞게 됩니다. 그 혼란기를 틈타 이스마일1세가 세운 왕조가 바로 사파비 왕조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주변의 아랍민족, 투르크족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란적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이란인들은 아랍제국과 몽골제국에서 유능한 행정관료로 각광받았지만 독자적 국가가 없다는 점때문에 알게모르게 설움을 받아왔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그 빈 틈을 치고나가 페르시아어로 왕의 칭호인 ‘샤’를 부활시킵니다. 그전까지 이슬람 제국에서 왕은 칼리프나 에미르, 술탄 같은 아랍어 칭호를 사용한 것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이란 전역을 평정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이후 950년 만에 재건된 이란 제국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이로 인해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오늘날 이란인의 95%가 시아파가 된 것은 이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시아파를 국교로 삼은 이슬람 제국은 사파비 왕조 이전엔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했던 파티마 왕조(909~1171)정도만 꼽힐 정도로 소수였습니다. 파티마 왕조의 명칭은 시아파에서 무함마드의 정통 계승자라고 믿는 알리의 부인이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사파비 왕조를 세운 이스마일 1세는 이란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논란이 있지만 학계에선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정착한 쿠르드족 계열 또는 투르크족 계열로 보고 있습니다. 사파비 가문도 원래 수니파였다가 1392년 이후 시아파로 개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100여년 뒤 이스마일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이 알리의 혈통을 계승한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대대적인 시아파 이슬람 전파에 나선 겁니다. 사파비 왕조의 이런 시아파 확산 조치는 이란적 정체성과 더불어 주변 이슬람 제국과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파비 왕조의 영향으로 이웃국가인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젠 역시 65%가량이 시아파 35%가량이 수니파인 시아파국가가 됐습니다.  이밖에 소수파인 시아파가 집권한 시리아, 리비아의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 종파갈등으로 내전 중인 예맨의 시아파 후티반군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슬람국가는 수니파가 다수입니다. 예외적 사례는 중동의 작은 왕국인 바레인입니다. 바레인 무슬림 중에서 시아파의 비중이 더 많지만 이들을 지배하는 왕실이 수니파여서 수니파 국가로 분류됩니다.

 


—서남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시아파 분포도. 초록이 짙으면 시아파 세력이 강한 나라, 파랑이 짙으면 수니파 세력이 강한 나라.
 


 

 반면 사우디는 이들을 제외한 중동 수니파 세력의 대부 역할을 해왔습니다. 사우디는 예맨 정부군을 돕는 아랍동맹군 결성의 맹주입니다. 또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IS)를 포함한 수니파 반군세력을 남몰래 지원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3일 자신의 웹사이트에 사우디의 시아파 지도자 니므르 알 니므르 처형과 IS의 처형을 각각 흰옷과 검은 옷으로만 구별한 그림을 올리면서 ‘화이트 IS’와 ‘블랙 IS’ 구별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조롱한 것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1400년 가까운 이런 종파적 갈등은 다시 20세기 정치체제와 맞물려 더욱 심화됐습니다. 이란은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혁명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사우디를 필두로 한 중동의 수니파 국가는 왕정체제가 많습니다. 시아파 공화정에선 대통령보다 최고 종교지도자의 권위가 더 큽니다. 반면 수니파 왕정에선 왕의 권위와 실제적 권력이 웬만한 종교지도자를 압도합니다.

 

  이 때문에 이란과 사우디의 갈등은 대체로 이란혁명 이후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1980~1988년)은 이라크 내 소수파이지만 정권을 장악한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과 호메이니가 이끄는 시아파 이란의 충돌이었습니다. 당시 사우디는 수니파인 후세인 정권을 지지했고 이란과 사이는 멀어졌습니다.

 

  일촉즉발의 양국관계에 불을 댕긴 사고가 발생합니다. 1987년 7월 사우디 메카 성지순례 과정에서 이란 순례객과 사우디 경찰의 충돌로 이란인 275명을 포함한 400여 명의 순례자가 숨졌습니다. 분노한 이란 시위대는 테헤란의 사우디 대사관을 점거했고 사우디 외교관 한 명이 대사관 건물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태 끝에 결국 1988년 4월 외교관계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3년 넘게 지속된 양국의 단교 상황은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사우디와 이란이 반(反) 이라크 공동전선을 형성하면서 복원되기 시작해 1991년 9월 재수교가 이뤄진다. 1999년 이란혁명 이후 이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했고 2007년에는 사우디 압둘라 국왕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한 뒤 정상회담을 할 정도로 관계가 개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