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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文明의 월계관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이야기

淸山에 2015. 10. 16. 17:06






이슬람 文明의 월계관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이야기


카를로스의 한탄, '당신들은 평범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세계에서 여기밖에 없는 명물을 파괴했군요.'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근호 이코노미스트에 재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유명한 모스크-성당의 이름에서 모스크가 빠지고 성당으로만 불리게 되었고 여기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천주교가 애써 스페인의 이슬람 통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주장을 편다. 大모스크(메조키트)라고 통칭되었던 이 건물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기독교인들이 모스크 안에 성당을 지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서구에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이슬람 유적으로 꼽힌다.


미국을 제외하고 제1관광大國(관광수입 기준)인 스페인 남부지방은 안달루시아라고 불린다. 이곳의 3大 도시는 코르도바, 세빌리아, 그라나다이다. 무어인(아랍과 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혼혈)이 主力인 움마야드 왕조(수도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군대가 서기 710년에 이곳에 상륙하여 불과 4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그라나다에서 철수하여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700년이 넘게 계속된 이슬람의 스페인 경영은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다.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는 이유도 이슬람 문명의 유적이 많은 덕분이다.


이때 스페인을 경영한 이슬람 세력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삼아 10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던 움마야드 王朝였다. 이 王朝는 활발한 포교전쟁으로 아시아와 유럽 및 아프리카에 거대한 판도를 형성했다. 7세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교는 아랍 기병대를 따라 맹렬한 기세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움마야드 王朝는 8세기 중엽 압바시드 王朝에 망한다. 압바시드 王朝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겨서 1258년 몽골군에 짓밟히기 전까지 약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다.


움마야드 왕조는 망했지만 왕족의 일파는 스페인으로 피난 와서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통치를 계속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과학, 문학,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세 암흑기를 겪고 있었던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앞섰다. 이슬람은 또 기독교도나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다. 사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조키트), 세빌리아의 대성당,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안달루시아뿐 아니라 세계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움마야다 왕조가 망할 때 코르도바로 피신해 와서 왕이 된 압둘 라만 1세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시드 왕조로부터 독립된 코르도바 왕국을 세웠다. 코르도바 왕조는 이슬람의 문화적 전성기를 스페인에서 꽃피웠다. 스페인의 이슬람 건축물이 아랍 지역에 비교해서 오히려 더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르도바에선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했다. 大모스크에선 세 종교가 함께 예배를 올렸다. 유대교의 시나고그, 가톨릭의 성당, 이슬람의 모스크를 다 겸하고 있는 예배당이었다.


7~13세기의 약 500년간 코르도바는 유럽의 빛이었다. 10세기에 코르도바엔 27개의 학교, 50개의 병원, 900개의 공중목욕탕, 6만300채의 고급 주택, 그리고 8만455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인구는 50만 명을 넘었다. 유럽은 당시 교황청이 득세하여 왕권을 누르고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신부들과 유대인뿐이었다고 한다.


코르도바는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에 넘어갔다. 故地(고지)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도 코르도바에서 이슬람과 유태인을 그렇게 박해하지는 않았다(1492년까지). 大모스크도 부수지 않았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했던 카를로스 5세 시절 가톨릭 세력이 大모스크 한 복판에다가 성당을 만들었다. 이 공사가 끝난 뒤 시찰 나온 카를로스 황제는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성당측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평범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세계에서 여기밖에 없는 명물을 파괴했군요.'

평면적이 200X150m쯤 되는 大모스크는 1230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기둥의 숲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코르도바를 유럽 최대 도시로 만든 움마야드 왕조 사람들은 전쟁뿐 아니라 건축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있는 움마야드 모스크는 8세기 때 만들어진 걸작품으로 이슬람 문화권 최초의 모스크라고 한다. 이들은 또 예루살렘에다가 바위 돔으로 알려진 모스크를 지었다.


이슬람 세력이 700년 이상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 약 300년간 싸웠다. 13세기 말에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선 1492년에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을 몰아냈다. 이슬람 세력의 챔피언 자리는 그 뒤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넘어갔다.


오스만 투르크는 두 번이나 비엔나를 포위했고 헝가리, 발칸 반도를 점령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600년 이상 유지했다. 독일 편에 섰다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이 제국이 해체되니 30개 나라가 독립했다고 한다. 요사이 세계의 골칫덩어리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도 오스만 투르크 해체의 후유증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망한 이후 이슬람 문명은 대체로 퇴조기에 들어섰다. 거기에 대한 이슬람의 반발이 9·11테러 등 문명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인류문명의 2大 라이벌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흥망은 과연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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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이야기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地上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


스페인의 남부지방 안달루시아에 있는 고도(古都)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 설명할 때는 으레 최상급 표현이 동원된다. 미셀린 가이드북은 이렇게 썼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알함브라의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하나이고 궁전은 지금 세계에서 현존하는 아랍 궁전중 최고이다. 樂園(낙원)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 설계는 코란의 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1492년1월2일 스페인을 공동통치하던 夫婦(부부) 왕, 카스틸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로 입성함으로써 779년에 걸쳤던 아랍세력의 이 도시 점령기가 끝난다. 이로써 약 800년간 스페인에 머물렀던 무어(아프리카의 아랍인)의 시대도 종막을 고하고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세력이 완전히 탈환했다.


아프리카로 물러난 아랍사람들이 스페인에 남기고 간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이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라나다의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준 마지막 왕 보브딜은 모로코로 떠나는 길에 언덕에 올라 마지막으로 이 궁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 언덕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들이 우는 것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한 마디 했다.
“너는 사나이로서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우는구나. 울음을 그쳐라”


이 궁전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과 나폴레옹 군대는 인류의 유산을 무시하고, 탄약창고, 감옥, 병원 따위로 썼다. 이 성벽엔 이런 시(詩)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나는 1997년과 2005년 11월 두 번 그라나다와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 갔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보다 더 아름답다. 인구 24만 명의 이 도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등지고 있다. 지중해가 지척인데도 그라나다를 병풍처럼 싸고 있는 산맥은 눈을 이고 있었다. 이 산맥의 최고봉은 3482m이다(이곳 도로는 유럽에서 가장 높다). 네바다 산맥은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을 제외하곤 가장 높다. 스페인은 북쪽 프랑스와는 3000m급의 피레네 산맥으로 국경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네바다 산맥으로 지중해와 경계를 짓는다.


그라나다에서 30분만 차를 몰고 아슬아슬한 구비길을 오르면 스키장이 있다. 비가 적은 곳이지만 산에서 녹아내린 눈물로 해서 먹을 물은 물론이고 알함브라 궁전 등의 정원수(水)로도 충분하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을 점령했던 아랍세력이 기독교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곳이다. 1238년 나스리드 왕국이 이 도시를 수도로 하여 최후의 254년간을 번성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어떻게 이런 궁전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감탄한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 궁전은 어딘가 애조(哀調)를 띤다. 슬픈 사연과 이야기들이 건물 곳곳에 스며 있다. 왕족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최후를 예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탐미(眈美)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알함브라는 궁전, 정원, 요새로 구성되어 있다. 미로(迷路)로 연결되어 있어 가이드 없이는 길을 잃기 쉽다. 이 궁전은 규모도 엄청나지만 정교함이 더 큰 감동을 준다. 아랍사람들의 美的 감각을 다듬고 갈아서 만든 보석이라고 할 만하다.


유럽의 암흑을 밝힌 빛줄기


알함브라 궁전은 아랍건축술과 미술의 극치이다. 이런 건물이 스페인에 남아 있다는 것은 유럽의 축복이다.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약 800년간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전성기의 문명을 유럽에 전했다. 그들은 예술, 문학, 과학에서 당대의 기독교보다 위였다. 서(西)로마제국이 망한 5세기부터 약 500년간 유럽은 게르만족에 의한 문명파괴와 게르만족의 기독교화가 동시에 이뤄진 이른바 암흑기였다. 유럽을 여행해보면 이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와 암흑의 유럽을 밝힌 것이다. 르네상스 운동이 꽃필 수 있었던 씨앗은 이 이슬람 사람들이 전해준 그리스-로마문명의 기억이었다. 이상하게도 암흑기의 기독교 세력은 그리스-로마를 잊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안팎의 장식이 세부적으로 정확하고 기하학적이다. 벌집 모양 장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이런 세부적인 데 기울이는 정성이다. 이 점에서 동양은 서양에 뒤진 경우가 많은데 알함브라는 반대이다. 아랍사람들은 사막출신이라서 그런지 궁전 안에다가 정원과 연못을 만들어 나무를 심고 물을 흐르게 하여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데 집착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유명한 장소는 '사자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열두 마리의 사자석조상이 돌로 만든 우물 수조(水槽)를 떠받치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1492년이란 해의 의미


필자 일행은 스페인 여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궁전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약 3시간 걸렸다. 방마다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아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가려면 구경을 제대로 못한다. 미리 알함브라에 대해서 책자를 통해서 읽어놓고는 현장에 와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돌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꼈두었다가 생긴 의문점들을 나중에 책을 통해서 알아보는 방식을 나는 권장한다.
알함브라 궁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세기 초 스페인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워싱턴 어빙이다. 그는 퇴락한 알함브라 궁전의 한 방을 빌어 살면서 '알함브라의 이야기들'이란 책을 썼다. 이 책과 함께 유명한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을 담은 테이프나 CD를 기념품으로 사가는 사람들이 많다. 알함브라 궁전은 여성적이고, 밤에 와서 느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 앞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 있다. 한복판이 비어 있어 도너츠처럼 생긴 원형건물이다. 카를로스 황제는 합스부르그 왕조 출신이었지만 복잡한 정략 결혼의 결과로 16세기 초 스페인까지 다스렸다. 그는 김영삼식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부수지 않고 그 앞에다가 자신의 궁전을 만들도록 하여 이슬람의 영화(榮華)를 가리려고 했다. 이 카를로스 황제 궁전이 다른 곳에 있었으면 큰 감동을 주었을 터인데 알함브라 바로 앞에 있어 주목을 덜 받는다. 이 궁전의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이기도 했던 페드로 마추카이다. 어딘가 로마 냄새가 많이 나는 대단한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짓는 세금을 낸 것은 이슬람 왕국이 망한 뒤 스페인에 남아서 살던 아랍사람들이었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궁전 이외에도 볼 것이 많다. 이 궁전이 서 있는 언덕과 마주한 산비탈엔 알바이싱이라고 불리는 아랍인 거주 구역이 있다. 아랍사람들이 이 도시에 정착할 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택과 골목이 남아 있어 알함브라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독교 세력이 그라나다를 탈환하여 800년에 걸친 국토수복운동을 끝낸 1492년은 세계사에서 의미 있는 해였다. 그라나다를 차지한 이사벨라 여왕은 이 해 여름에 이탈리아의 제노바 사람 콜롬버스가 세 척의 배로써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발견하겠다는 개척항해를 지원했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夫婦) 왕은 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유태인과 아랍사람들의 개종(改宗)을 강제했다. 돈뿐 아니라 전문지식과 기술이 많던 유대인 수십만 명이 아프리카와 오토만 투르크로 탈출하는 바람에 스페인 쇠망의 길이 열린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王의 무덤


그라나다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은 이 상징적 도시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 만에 완성한다. 돌산처럼 육중한 이 성당에 붙어 있는 '왕족 교회'가 특별하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두 사람의 무덤을 모신 교회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면 지하에 부부왕의 석관(石棺)이 있고 1층에는 딸과 사위의 석관이 있다. 이사벨라는 1504년에, 페르난도는 1516년에 죽었다. 이 무덤 교회는 1506년부터 15년간 지은 고딕식 걸작품이다. 두 왕은 그라나다에 매료되어 이 도시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스페인을 통일하고 신대륙을 발견케 했으며 스페인 전성시대의 막을 올린 세계사적 대인물이 여기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역사의 무게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두 왕이 썼던 왕관, 칼, 수집했던 미술품도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 이사벨라 여왕의 보석함도 있는데, 콜럼버스에게 이를 건네주면서 보석을 팔아 항해경비로 쓰라고 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지만 이는 확인을 요한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금슬도 좋았다고 한다. 이 또한 드문 사례이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페르난도를 이상적인 통치술을 행사한 영명한 군주라고 평가했다.


 
 


 palpal   2015-10-16 오전 5:15
M지금처럼 유명한 궁전이 19세기 미국대사였던 어빙이 책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소개하면서 이 건출물이 현대사로 돌아왔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폐허가 되어 거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빙의 책 보다는 알함브라를 더 낭만적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알리는데 기여한 사람은 기타연주가이기도 했던 프란시스코 타레가라는 음악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함브라를 어빙의 책으로 읽어서라기보다는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연주를 들어서 알함브라를 처음 알게되고 기억하게된다. 그래서 알함브라궁전에 스며있는 비극보다는 아름다운 낭만이 스며있는 궁전으로 인삭하게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것이다. 트레몰로기법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나 한번쯤 알함브라궁전을 가고싶게 만든다. 젊었을때 기타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연주해보고 싶었을 곡.
그 궁전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방은 비밀의 방이라해서 누군가 왕을 험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든 방이 기억에 남는군요. 옆방에서 하는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방.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한 분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