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6월 18일 늦은 밤
클라크 장군에게 서신을 받은 이 대통령은 장문의 답장을 보낸다. 부드러운 어투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돌려 말하지만 내용을 알고 읽으면 새삼 분노를 애써 삼키고 있는 서슬퍼런 대통령의 의지가 꿈틀대는 것만 같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자료5> 이승만 대통령이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답장 “여기에 영예로운 한국인 전쟁포로를 석방한 것에 대한 담화문의 사본을 같이 보냅니다. 귀하의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관점과 귀하가 이 복잡한 국제적 문제에 달리 어찌할 바가 없는 것을 압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이 문제를 미리 귀하에게 말했다면 당신은 매우 난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몇 차례 귀하에게 이 무고한 대한의 자녀들을 더 이상 그 비좁은 곳에 구금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여러 방안을 고심해왔고 그 결과로 신중히 오늘 이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권한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치안대, 경찰대에 지시했던 바 여기에 문제가 된다면 부디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조치에 문제가 있었다면 함께 해결하고 싶습니다.
당면한 문제는 단 하나, 이 기회를 악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양측 진영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귀하 쪽의 사람들에게 안 그래도 안 좋은 상황을 더 나쁘게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현 상황에서의 최선입니다.
그리고 내가 귀하에게 ‘집단적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집단적 행동’은 오늘의 일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거기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걱정은 정전협정 서명 후, 양측이 2㎞씩 후퇴하기로 되어있는데 나는 한국군이 그렇게 하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귀하로부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져올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각자 나름의 상황이 있는 것이고,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유엔군이 후퇴하고 한국군이 자리를 지킬 때 발생하는 틈으로 적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로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으며 귀하로부터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 공적인 임무와 우리 개인의 우정은 분리하도록 합시다. 당신도 나도 서로의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임무를 다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의 국가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겁입니다. 이 서신은 비밀에 붙여두길 바랍니다.
당신의 친애하는 이승만 드림” 이 서신이 밝혀주듯이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전격 석방에 이은 정전 이후 군사를 뒤로 물리는 조치의 불이행, 나아가 작전통제권 환수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압박해 들어간다. 그와 함께 유엔군 철수 이후의 공산군 재침 가능성 및 안전조치 강구를 강조함 점이 훗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작업도 남은 과제라고 하겠다.
통치권 차원의 외교적 성과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포로들이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도 클라크 장군에게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 대통령이 클라크 장군을 달래는 듯한 뉘앙스의 편지를 썼다면 변 장관은 사실관계를 따지며 엄중히 훈계하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과 장관이 각자 역할분담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누차에 걸쳐 반공포로 석방 문제에 관한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 이는 또한 유엔이 일전에 스스로 공표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1953년 5월 13일 해리슨 수석대표가 발표한 내용으로 ‘개인 의지와 무관하게 징집된 전쟁포로들은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석방돼야 한다’는 골자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충실히 믿었건만 포로에 관한 내용을 한꺼번에 뒤집은 것은 유엔입니다.
우리 국민 3만4천 명을 커다란 ‘평화의 게임’에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죠. 반공포로 대부분이 포로로 잡힌 뒤 억지로 전쟁에 투입된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점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반공포로 문제가 잘 처리되길 기다려왔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정전)협상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평화가 될 것이며 신의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훗날 반공포로 석방은 통치권 차원의 외교적 성과라 평가되기도 한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보여준 결연한 의지, 과감한 행동력으로 휴전 후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 약속을 받아내고,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맺는다는 명시된 입장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보호’라는 물러설 수 없는 가치를 지키려는 결단이었다. 이 대통령은 동시에 그 결단을 국가의 미래를 위한 안전조치를 마련하는 데에도 지혜롭게 사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유엔군 특히 미군에 큰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1953년 6월 25일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는 결정적 동기가 됐다. 이후 한미 간의 본격적인 협상이 이루어지고 1953년 7월 12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측은 ‘휴전이 되고 나면 긍정적으로 논의해보자’는 정도에 머물렀다.
- 글·자료제공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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