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이야기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地上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
스페인의 남부지방 안달루시아에 있는 고도(古都)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 설명할 때는 으레 최상급 표현이 동원된다. 미셀린 가이드북은 이렇게 썼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이다. 알함브라의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하나이고 궁전은 지금 세계에서 현존하는 아랍 궁전중 최고이다. 樂園(낙원)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 설계는 코란의 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1492년1월2일 스페인을 공동통치하던 夫婦(부부) 왕, 카스틸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로 입성함으로써 779년에 걸쳤던 아랍세력의 이 도시 점령기가 끝난다. 이로써 약 800년간 스페인에 머물렀던 무어(아프리카의 아랍인)의 시대도 종막을 고하고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세력이 완전히 탈환했다.
아프리카로 물러난 아랍사람들이 스페인에 남기고 간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이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라나다의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준 마지막 왕 보브딜은 모로코로 떠나는 길에 언덕에 올라 마지막으로 이 궁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 언덕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들이 우는 것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한 마디 했다. “너는 사나이로서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우는구나. 울음을 그쳐라”
이 궁전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과 나폴레옹 군대는 인류의 유산을 무시하고, 탄약창고, 감옥, 병원 따위로 썼다. 이 성벽엔 이런 시(詩)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나는 1997년과 2005년 11월 두 번 그라나다와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 갔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보다 더 아름답다. 인구 24만 명의 이 도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등지고 있다. 지중해가 지척인데도 그라나다를 병풍처럼 싸고 있는 산맥은 눈을 이고 있었다. 이 산맥의 최고봉은 3482m이다(이곳 도로는 유럽에서 가장 높다). 네바다 산맥은 유럽에서 알프스 산맥을 제외하곤 가장 높다. 스페인은 북쪽 프랑스와는 3000m급의 피레네 산맥으로 국경을 이루고, 남쪽으로는 네바다 산맥으로 지중해와 경계를 짓는다.
그라나다에서 30분만 차를 몰고 아슬아슬한 구비길을 오르면 스키장이 있다. 비가 적은 곳이지만 산에서 녹아내린 눈물로 해서 먹을 물은 물론이고 알함브라 궁전 등의 정원수(水)로도 충분하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을 점령했던 아랍세력이 기독교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곳이다. 1238년 나스리드 왕국이 이 도시를 수도로 하여 최후의 254년간을 번성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어떻게 이런 궁전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감탄한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 궁전은 어딘가 애조(哀調)를 띤다. 슬픈 사연과 이야기들이 건물 곳곳에 스며 있다. 왕족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최후를 예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탐미(眈美)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알함브라는 궁전, 정원, 요새로 구성되어 있다. 미로(迷路)로 연결되어 있어 가이드 없이는 길을 잃기 쉽다. 이 궁전은 규모도 엄청나지만 정교함이 더 큰 감동을 준다. 아랍사람들의 美的 감각을 다듬고 갈아서 만든 보석이라고 할 만하다.
유럽의 암흑을 밝힌 빛줄기
알함브라 궁전은 아랍건축술과 미술의 극치이다. 이런 건물이 스페인에 남아 있다는 것은 유럽의 축복이다.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약 800년간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전성기의 문명을 유럽에 전했다. 그들은 예술, 문학, 과학에서 당대의 기독교보다 위였다. 서(西)로마제국이 망한 5세기부터 약 500년간 유럽은 게르만족에 의한 문명파괴와 게르만족의 기독교화가 동시에 이뤄진 이른바 암흑기였다. 유럽을 여행해보면 이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와 암흑의 유럽을 밝힌 것이다. 르네상스 운동이 꽃필 수 있었던 씨앗은 이 이슬람 사람들이 전해준 그리스-로마문명의 기억이었다. 이상하게도 암흑기의 기독교 세력은 그리스-로마를 잊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안팎의 장식이 세부적으로 정확하고 기하학적이다. 벌집 모양 장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이런 세부적인 데 기울이는 정성이다. 이 점에서 동양은 서양에 뒤진 경우가 많은데 알함브라는 반대이다. 아랍사람들은 사막출신이라서 그런지 궁전 안에다가 정원과 연못을 만들어 나무를 심고 물을 흐르게 하여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데 집착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유명한 장소는 '사자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열두 마리의 사자석조상이 돌로 만든 우물 수조(水槽)를 떠받치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1492년이란 해의 의미
필자 일행은 스페인 여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궁전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약 3시간 걸렸다. 방마다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아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가려면 구경을 제대로 못한다. 미리 알함브라에 대해서 책자를 통해서 읽어놓고는 현장에 와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돌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꼈두었다가 생긴 의문점들을 나중에 책을 통해서 알아보는 방식을 나는 권장한다. 알함브라 궁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세기 초 스페인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워싱턴 어빙이다. 그는 퇴락한 알함브라 궁전의 한 방을 빌어 살면서 '알함브라의 이야기들'이란 책을 썼다. 이 책과 함께 유명한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을 담은 테이프나 CD를 기념품으로 사가는 사람들이 많다. 알함브라 궁전은 여성적이고, 밤에 와서 느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 앞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 있다. 한복판이 비어 있어 도너츠처럼 생긴 원형건물이다. 카를로스 황제는 합스부르그 왕조 출신이었지만 복잡한 정략 결혼의 결과로 16세기 초 스페인까지 다스렸다. 그는 김영삼식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부수지 않고 그 앞에다가 자신의 궁전을 만들도록 하여 이슬람의 영화(榮華)를 가리려고 했다. 이 카를로스 황제 궁전이 다른 곳에 있었으면 큰 감동을 주었을 터인데 알함브라 바로 앞에 있어 주목을 덜 받는다. 이 궁전의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이기도 했던 페드로 마추카이다. 어딘가 로마 냄새가 많이 나는 대단한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짓는 세금을 낸 것은 이슬람 왕국이 망한 뒤 스페인에 남아서 살던 아랍사람들이었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궁전 이외에도 볼 것이 많다. 이 궁전이 서 있는 언덕과 마주한 산비탈엔 알바이싱이라고 불리는 아랍인 거주 구역이 있다. 아랍사람들이 이 도시에 정착할 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택과 골목이 남아 있어 알함브라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독교 세력이 그라나다를 탈환하여 800년에 걸친 국토수복운동을 끝낸 1492년은 세계사에서 의미 있는 해였다. 그라나다를 차지한 이사벨라 여왕은 이 해 여름에 이탈리아의 제노바 사람 콜롬버스가 세 척의 배로써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발견하겠다는 개척항해를 지원했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夫婦) 왕은 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유태인과 아랍사람들의 개종(改宗)을 강제했다. 돈뿐 아니라 전문지식과 기술이 많던 유대인 수십만 명이 아프리카와 오토만 투르크로 탈출하는 바람에 스페인 쇠망의 길이 열린다.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王의 무덤
그라나다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은 이 상징적 도시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 만에 완성한다. 돌산처럼 육중한 이 성당에 붙어 있는 '왕족 교회'가 특별하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두 사람의 무덤을 모신 교회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면 지하에 부부왕의 석관(石棺)이 있고 1층에는 딸과 사위의 석관이 있다. 이사벨라는 1504년에, 페르난도는 1516년에 죽었다. 이 무덤 교회는 1506년부터 15년간 지은 고딕식 걸작품이다. 두 왕은 그라나다에 매료되어 이 도시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스페인을 통일하고 신대륙을 발견케 했으며 스페인 전성시대의 막을 올린 세계사적 대인물이 여기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역사의 무게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두 왕이 썼던 왕관, 칼, 수집했던 미술품도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 이사벨라 여왕의 보석함도 있는데, 콜럼버스에게 이를 건네주면서 보석을 팔아 항해경비로 쓰라고 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지만 이는 확인을 요한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금슬도 좋았다고 한다. 이 또한 드문 사례이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페르난도를 이상적인 통치술을 행사한 영명한 군주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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