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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보국의 전설 '도널드 니콜스'의 사라진 회고록 입수 전격 공개 [단독 입수-심층취재③]

淸山에 2015. 8. 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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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심층취재③]

미국 정보국의 전설 '도널드 니콜스'의 사라진 회고록 입수 전격 공개  

50년 봉인된 비밀 풀린다… 김일성
암살시도, 흥남전투 비사 가득

  


정리=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

입력시간 : 2015/08/22 07:50:11수정시간 : 2015.08.29 19:17:23
  


니콜스와 함께 일한 김인호씨

니콜스와 함께 일한 김인호씨


니콜스와 함께 일한 김인호씨

김인호씨가 받은 호국영웅기장증

 


6·25 둘러싼 첩보전 북한 대남첩보국 '니콜스 파일'엔 어떤 내용이
서북청년회 파견 특공대 백의사 김일성 암살 시도… 북파 공작원의 아버지 007 같은 활약상


<주간한국>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역할을 한 도널드 니콜스의 사라진 회고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그동안 감춰져왔던 그 속살을 2차례 걸쳐 연재했다.

연재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뜨거운 호응을 보내왔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북한 문제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해 그대로 연재되는데 대해 우려를 표시해 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주간한국>은 니콜스 회고록을 보다 정밀하게 번역하고 그 내용을 좀더 신중히 검토해 다음 호부터 다시 연재하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는 니콜스의 활약과 관련해 그가 신뢰한 한국인 부하 첩보원 김인호씨의 증언을 다루기로 했다. 그가 말하는 대북첩보활동은 무엇이고 니콜스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들어보자. 다음은 그의 회고록 중 일부다.
 
- <주간한국>은 니콜스 회고록 연재와 함께 김씨의 회고록을 이어 연재할 계획이다.
 
어느 특수공작원의 증언 
 
나는 1930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나의 집안은 부유한 지방 유지로 3ㆍ1운동 당시에는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고, 또한 직접 이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집안은 쑥대밭이 되게 되었으니, 그것은 조부 김용제(1919년 작고, 1977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애족장 추서)가 항일내용을 담은 전단을 거사일자와 함께 등사하여 평안북도에 살포한 것을 매국노가 밀고하여 일경이 조부를 체포하면서 비롯되었다.


결국 조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소달구지에 실려 돌아왔으며, 부친 김은교(1945년 5월 작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포상 신청 중) 또한 모진 고문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부친은 비장한 각오를 다짐했으니 그것은 고향을 떠나 영변에 있는 큰 외가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중국으로 기약도 없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김구선생의 밀명을 받은 부친이 평양에다 여관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영변 큰 외조모 댁으로 가서 5학년으로 편입하여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당시의 학교는 모두 일본어로 교육을 해야 했는데 중국에서 공부한 나는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남다른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영변으로 오셔서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이화여관으로 간 나는 어머니의 심각한 표정을 통해 큰 일이 생겼나 싶었다. 그 큰일이란 당시 아버지가 일본경찰의 의심을 받아 주재소로 끌려가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물건을 운반해야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신문지로 싼 물건을 가방에 넣고서 나는 신의주까지 다녀와야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었다. 무사히 일을 마친 나는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았고 이때부터 나의 활동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조국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꿈은 얼마 안 있어 깨지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된 일이었다.


1946년 2월 중순 어느 날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니 낮선 청년 5∼6명이 모친과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북청년회에서 파견된 특공대로서 백의사라 하였다. 고당 선생을 이남으로 탈출시키고, 3ㆍ1운동 기념식 때 공산도배의 주구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으며, 지리를 잘 아는 나를 안내자로 요구해 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친근감 있고 믿음직했다. 나는 이 일을 친구인 이응용과 김병기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백의사에게 소개시킨 후 거사계획을 토론하였다.


3월1일이 되자 식장인 평양역 앞 광장으로 우리들은 10분 간격으로 출발하였다. 이윽고 정각 10시가 되자 김일성 김책 등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과 소련군 정복 차림의 장교들이 등장했다. 개회식이 끝나고 김일성일 연설을 시작할 무렵 수류탄 하나가 김일성 머리를 스쳐 발 앞에 떨어지는 것을 로스케 장교 하나가 받아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수류탄이 폭발하여 그 장교 오른쪽 손목이 순식간에 잘려나갔고 김일성은 길바닥에 쓰러졌다. 관중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준비한 삐라를 군중에게 뿌리고 사라졌으나 수류탄을 던진 백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소련군의 만행은 더욱 악랄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산당에 물들은 학생들도 많아졌다. 1947년 3.1절이 돌아왔으나 공산당은 기념식조차 치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으며, 공산당의 아전인수격 정책은 조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자 월남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으며, 나도 공산당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1950년 4월 중순경이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데 연료공급을 받으려는 회차가 우리 공장으로 들어왔다. 화차 안에는 군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소련군도 내려서는 저의들 말로 뭐하고 지껄였다. 본궁 공장 뒤에는 소련제 탱크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후로 두달 가량 각종 소련제 마크가 붙은 무기들이 열차들에 실려 수없이 남으로 내려갔다. 영문도 모르는 우리는 그저 인민군들의 훈련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인 6ㆍ25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CIC대원으로의 활동 


10월 16일 우리의 희망이던 국군이 흥남에 진입했다. 국군은 계속 북진 중이었으므로 자체 기강도 튼튼하지 못했기에 민간치안을 담당하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자 국군 장교가 민간치안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왔다. 우리는 쾌히 승낙하고 치안대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치안대원은 500여명이나 되었다. 치안사업의 일환으로 흥남 5대공장의 경비를 서기도 했고,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빨갱이 잔당들을 토벌하고 악질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일도 하였다. 흥남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시장 상가들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국군의 제2진으로 특무사업을 하는 2군단의 CIC 제3지구대9당시 대장 공병익)가 흥남에 들어왔다. 그들은 공백 기간 동안 치안대의 활동상황을 보고 받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공병익씨는 나를 포함한 이응용 김병기 김동국(반동학생으로, 본궁수용소에서 구사일생한 동료) 조치호 등 5인에게 CIC 제3지구에 현지 입대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지 입대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자치대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우리 5인 중 4명이 흥남에서 치안사업을 계속하는 중에, 나는 애국지사 사체 발굴 위원회 의원이 되어 여러 곳을 다니며 사체 발굴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함흥 교화소 시체발굴부터 시작했다. 감방마다 총알 맞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교화소 밖에 있는 변소에도 시체들이 즐비했고 오물통속에도 도끼로 머리를 찍혀 죽은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 발굴 작업은 괴뢰군 잔당들과 악질부역자들을 시켰다. 그들도 사람이었는지 눈물을 연신 훔치며 작업을 해나갔다.


이곳의 일이 끝나자 나는 다시 니켈광산으로 현장조사를 나갔다. 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죽음의 장소였다. 불을 밝히고 보니 갱 입구부터 핏물로 질퍽했다. 10여m나 되는 굴속에는 핏물로 잠긴 시체들이 으스러지고 깨어진 상태에서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콤푸레서 4대를 동원하여 핏물을 제거하고 시체를 들어냈다. 100여 구의 시체를 들어내니 돌덩이가 나왔고 이 잡석들을 걷어내자 다시 시체들이 갱 속에서 떼로 나타났다는데 총알 맞은 자국은 없고 손발이 밧줄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을 갱 속에 쑤셔 널고 돌을 던져 넣어 죽였던 것 같았다. 이곳에서 발굴한 사체는 2만5,000에서 3만구에 이르렀다.


1950년 11월 14일 CIC 제3지구대는 진군하는 아군의 전선을 따라 북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 달간의 시신발굴로 정신없던 나도 부대가 이동한다는 말에 앞으로의 나의 행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장인 공병익씨는 우리 6인을 오키나와의 장교훈련소로 후송해 줄 테니 장교교육을 받고 임관하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기밀 입수 위한 특수임무


가장 중요한 기밀문서는 국군포로들의 명단으로 200여명의 위장 전향한 포로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데 이 명단은 우리만의 암호로 적혀 있었기에 해독을 못하게 되자 우리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북에서는 우리 국군포로들 중 일부를 포섭하여 빨갱이 사상을 주입시켜 첩자교육을 시킨 뒤 포로수용소에 다시 수용시켜 남한에서 간첩활동을 시켰는데 그런 자들의 명단을 우리가 가져왔으니 이는 아주 주요했던 것이다. 전쟁 하에서 이런 포로 간접들에 의해 빼돌려 지는 작전기밀은 아주 중요했기에 서둘러 이들에 대한 색출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니콜스라는 사람은 뚱뚱한 몸집에 엄격한 눈빛을 가지고 있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쉽게 가까이 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통역을 하는 주대위는 우리 5인에게 공군북과 군화 견장을 달아주며 서울로 갈 것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며칠간의 푸대접에 적개심도 있었으나 기쁘기 한이 없었다.


한강을 건너 중앙여고로 들어가 지프차에서 내렸다. 전시라 여학교 건물을 공군 20특무전대가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다과를 베풀며 식사대접을 해주는 것을 보면서 어제까지 심한 구타를 당해야 했던 것과 비교가 되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하였기에 니콜스에게 모든 걸 말하지 말고 한국군부대로 옮겨달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이러한 뜻을 니콜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통역관을 데리고 나가버린 후 얼마 있다가 우리를 하나씩 데리고 나가 영창에 가두었다.


그렇게 또 다시 일주일간을 영창에서 지내야 했다. 일주일 후에 영창을 시찰한다며 둘러보던 니콜스가 나를 보자 반가운 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싫은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더니 경비원에게 나를 꺼내주라고 했다. 그는 우리들을 다시 새 공군복으로 갈아 입혔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며 주대위가 들어왔고 그동안 생각 좀 했느냐면서 싱글벙글하고 웃어댔다. 그러는데 니콜스가 들어오며 한국말로 그 동안 불찰로 여러분 고생이 심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의 유창한 한국말에 아주 놀라고 그만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애초 그가 한국말을 못하는 줄 알고 그 앞에서 우리의 계획을 늘어놓았으니 그가 우리를 괘씸하게 여기고 영창에 가두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주도면밀함에 마음을 놓고 우리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즉 대한민국통일촉진회의 평양조직들과 이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주면 공산정권을 전복할 수 있다는 계획이었다. 니콜스는 무릎을 치며 좋은 생각이라며 전적으로 우리의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자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실천하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움이 많으므로 우리가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별도의 첩보부대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하자 그는 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것이니 부대명칭이나 사업계획서 경위보고서 등응 주대위와 의논하여 알려달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 다음날부터 6주간 공군 심문학교에 입소하여 단기 정보교육을 받았다. 고단한 일정이었으나 보람 있는 일이라 굳게 참아냈다. 이 학교를 졸업하자 우리는 부대 창설작업에 본격적으로 임했다. 창공의 주인공인 독수리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부대명칭을 이글부대라 했다. 장소는 서해안의 교동도로 하고 장비를 지원 받았다.


섬으로 떠나기 전날 니콜스가 우리를 부르더니 최초의 작전명령을 지시했다. 그는 우리의 보고서를 보고는 평양의 아지트 및 조직원들의 체계적인 기반과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우리들 중 일부가 평양으로 재 침투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소한 2명은 다시 침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사를 나온 우리는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막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해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라니 정말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러자 응용이가 자진해서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다. 한사람만 더 나오면 되었다. 사흘이 지나날 나는 마음을 오지게 먹고 내가 나서기로 했다.



http://daily.hankooki.com/lpage/politics/201508/dh201508150958501375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