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9 ] ~ [ 끝 ]

淸山에 2013. 7. 15. 07:24

기**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9 ]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지옥의 사자들

   

역사적인 인연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내내 터키군의 맞상대는 중공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붙었다하면 중공군은 계속하여 혹독한 대가를 치렀고, 결국 터키군중공군에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중공군 지휘부는 일선부대에게 되도록 터키군과의 정면 승부는 자제하라는 특별 지침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만큼 중공군이 터키군에 대해 느낀 두려움은 대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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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가 되었어도 군기가 살아있을 만큼 정신력이 대단한

터키군은 중공군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

 

1951년 여름을 넘기면서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을 중심으로 고착화되고 공공연히 정전이 언급되자 전쟁의 양상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승리하겠다는 의지보다 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대세가 되었고, 전쟁을 주도하던 미국과 중국 모두는 암묵적으로 서로가 체면에 손상을 입지 않는 이 정도의 선에서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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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을 염두에 두고 거점 확보 경쟁이 개시되었습니다

(거점 사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터키군) ]

 

공산군이 1953년 휴전 직전에 금성 일대에서 마지막 공세를 취하기도 하였지만, 양측 모두 적극적인 전선돌파나 상대를 섬멸하려는 대규모 작전은 삼갔고 단지 휴전 시에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지를 쟁탈하는 근접전으로 전쟁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아니러니 하게도 고지전은 더욱 많은 피를 요구하였습니다.  생각보다 휴전회담이 장기화되자 고지에 뿌리는 피도 더욱 많이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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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말기에 촬영 된 터키 3여단 장병들 ]

 

이러한 지옥의 레이스에 터키군도 나섰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5월 말, 서부전선의 임진강 북단인 고랑포 서북방 10킬로미터에 위치한 네바다 전초지역을 놓고 터키 제3여단(1952년 11월, 제2여단과 교체)은 전사에 길이 남는 격전을 펼쳤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상대는 중공군이었습니다.  베가스, 카슨, 엘코 전초 등으로 이루어진 네바다 전초지대는 이미 지난 3월에 미 해병 5연대와 중공군 120사단이 혈전을 벌인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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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바다 전초지역을 놓고 마지막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피아 구분이 되지 않는 시신을 곁에 두고 전투를 벌이는 터키군) ]

 

미 1군단 예비로 있던 터키 3여단이 격전으로 손실을 입은 미 해병대를 교대하여 전초를 인수하자 중공군은 재차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5월 28일, 중공군 120사단의 2개 연대가 터키 3여단이 확보하고 있던 네바다 전초지대를 급습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주인이 무려 5번이나 바뀐 혈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적으로 이곳은 계속하여 확보하고 있기가 상당히 곤란한 지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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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을 염두에 두다보니 지형적으로 불리한 전초지대를 확보하기 힘들었습니다 ]

 

전초지대가 폭이 넓은 임진강 하구 이북이기 때문에 방어선을 구축해도 종심이 극히 짧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간의 대치가 아닌 종전을 염두에 둔 휴전이라면 추후를 생각하여 전략적으로 포기하여야 할 거점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물론 굳이 일부로 적에게 내어 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어에 불리한 곳을 놓고 소모가 많은 교전이 계속된다면 충분히 차선의 상황도 고려하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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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모전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희생도 늘어났습니다

(부산 유엔군 묘지에 안장 된 동료를 찾아 온 생존 터키군 참전용사) ]

 

베가스 전초 양측이 중공군에 피탈당하고 병력 소모가 큰 백병전이 계속되자 미 8군은 터키 3여단에게 철수를 명하였습니다.  작은 전초를 확보하는데 아군의 손실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아쉽지만 이 결과 고랑포 인근의 돌출부가 공산군에 넘어가게 되었고 그 상태로 휴전을 맞이하였습니다.  휴전선의 서부전선이 38선 밑으로 많이 내려오게 된 데는 이처럼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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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이 일부러 포기하지 않는 한 중공군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

 

터키군은 그동안 흘린 피가 아까워서라도 전초를 계속 확보하고자 했으나 압도적인 중공군과 무한정 병력을 맞교환하는 전투 행태가 전략적으로 이득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상부의 지시에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병전에 돌입하던 터키군의 무공은 마지막까지 중공군의 간담을 충분히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터키군이 일부러 포기하지 않는 한 중공군이 진지를 점령하기는 힘들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10 ]

그 후로도 오래 동안

 

지구 반대편 한국 땅에서 그들의 부대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터키인들은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복무기간을 마치고 귀국한 참전군인과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은 대단하였고, 전사상자에 대해서는 순교자에 버금가는 예우를 하여주었습니다.  그들의 분투는 종국적으로 터키의 안보를 위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갖는 자부심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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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상자들은 순교자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습니다 ]

 

휴전 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많은 나라의 부대가 순차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하는데 크게 1960년 이전, 1970년 이전 그리고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중공군의 철군이 단행된 1958년을 전후로 미군, 영국군 주력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엔군도 철군을 완료하였습니다.  1970년 이전까지 미군을 제외한 일부 참전 국가가 형식적인 수준의 부대를 주둔시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도 한국 땅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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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들의 환호 속에 본국에 귀국한 주한 터키군 장병들 ]

 

터키는 1972년에 철군한 태국군과 더불어 미군 외에 가장 오래 동안 전투부대를 한국에 주둔시킨 나라였습니다.  1단계로 1960년에 1개 중대를 제외한 본진이 철수하였고 이때부터 주한터키군의 부대단대호가 여단에서 중대로 바뀌었습니다.  즉, 제10여단 이후에 주둔한 부대는 제11중대였고 이후 제15중대까지 전통이 이어졌는데, 완전 철군 직전까지 주한 터키군은 파주시 적성면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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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주한터키군 사령부 정문(上)

주둔지에서 민속춤을 추며 잠시간의 여흥을 즐기는 모습 ]

 

1966년에 의장대 1개 분대만 남기고 전투부대는 완전히 철군하게 되었는데, 비록 1개 중대규모여서 전력 공백을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철군을 적극 만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문기사에 보도된 대로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대한민국은 자주국방이 요원한 빈한했던 나라여서 부대의 철수보다 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 준 우방과의 단절을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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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군 만류를 보도한 신문기사 ]

 

하지만 터키 국내 사정 등의 이유로 철군은 단행되었고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의장대도 1971년 6월에 마지막으로 이한하면서 20여년에 걸친 장대했던 터키군의 참전 및 주둔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매년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이 대통령을 면담하고 대통령 또한 터키군 부대를 수시로 방문하여 격려하였을 만큼 각별하였습니다.  이처럼 터키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우리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은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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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 의장대의 1953년 모습 ]

 

한국전쟁에 참전하거나 이후 주한 터키군에서 근무했던 많은 인사들이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터키 군부나 정관계에서 요직을 맞았습니다.  예를 들어 1957년에 취임한 제7여단장 겸 주한 터키군 사령관이었던 에브렌(Kenan Evren) 대령은 이후 참모총장을 거쳐 터키의 제7대 대통령(1980~1989)에까지 올랐고 1982년에는 국가원수 자격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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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국가원수가 되어 1982년 국빈 방한 한 에브렌 대통령이
주한 사령관 당시 하우스보이로 인연을 맺은 정대훈 씨를 접견하고 있는 모습 ]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제작된 홍보 필름이나 사진을 보면 '국군과 미군, 터키군, 태국군으로 이루어진 유엔군이 합동 기동 훈련을 펼쳐 그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선전하는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현대 한국사에서 주한 터키군의 역할은 컸습니다.  이처럼 전쟁 당시는 물론 휴전 후 상당기간 동안 한국의 안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터키는 말할 필요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우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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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도와 준 최고의 우방이었지만 오래 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마지막 터키군이 한국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넘다보니 이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도 이제는 많지 않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전쟁 발발 60주년 관련 여론 조사에도 '전쟁을 누가 발발했는지?','언제 전쟁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흔할 정도로 세상이 변하였으니, 그때 누가 우리를 도와주러 왔는지 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어느덧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11 ]

 

왜곡된 진실

 

지금까지 알아 본 것처럼 터키군은 전쟁 중에 침략자를 물리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휴전 후에도 오래 동안 한반도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터키의 젊은이들이 생면부지의 한반도까지 와서 흘린 고귀한 피는 그 어떤 것으로 쉽게 갚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명확한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터키군은 고마워해야 할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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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면부지의 한국을 돕기 위해 수많은 터키 젊은이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

 

그런데 온라인상에서 '그들의 필요에 의해 참전한 것인데 우리가 특별히 고마워 할 것이 뭐 있냐'는 주장이 나돕니다.  살얼음판 같은 냉전초기에 자국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한 방편으로 터키가 파병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마워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터키의 사정이 어떠하였던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당장 한 명의 도움도 뼈에 사무치게 고마웠던 처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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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결코 왜곡 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런데 최근에는 이보다 더욱 악의적인 글들이 나돌아 다니며 진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터키군은 특별한 전공도 없이 싸우는 척만 했다'. '툭하면 부녀자를 집단 강간하여 이에 분노한 해병대가 탱크를 몰고 구출하러 갔다'는 등의 그럴듯 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관하여 논리적으로 반박한 글들도 다수 있지만 희한하게도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야기가 사실인양 더욱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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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의 전공을 인정하기는 커녕 비하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

 

정확한 근거도 없이 정체불명의 '~카더라'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의외로 이를 그대로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정작 근거를 정확히 대라고 하면 입을 닫거나, 터키군의 전공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정확한 증거도 대지 못하고, 터키군이 어떠한 전공을 세웠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맹목적으로 비난을 할 수 있는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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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적으로 복사되어 돌아다니는 글인데 정작 정확한 근거나 출처가 없습니다 ]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검증도 제대로 안된 이야기가 너무 쉽게 진실처럼 난무합니다.  그렇다보니 '뽀그리 장군 만세'같은 허무맹랑한 주장도 마구 유통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스스로 검증하려는 노력도 없이 편리만 추구하여 무조건 받아들이는 세태입니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터키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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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유엔군이 통일을 방해한 세력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

 

그나마 한국전쟁에 관한 지식이 있는 이들이 찾는 곳이라 생각되는 밀리터리 사이트에서 조차 위 주장뿐만 아니라 '팔로군이 독립군이다'라거나 '유엔군은 통일을 막은 외세다'라는 괴변조차 공공연히 주장됩니다.  어쩌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에 august가 터키군의 한국전쟁 참전사에 대해 글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터키와 아무런 관련은 없지만 적어도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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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는 괴변에 대해 반박한 게시물

이제는 온라인 상에서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는 주장까지 나돌 정도입니다 ]

 

먼저 지금까지 알아 본 바와 같이 '터키군은 특별한 전공도 없이 싸우는 척만 했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공간사에 기록된 그들의 전공은 찬란하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단순하게 한국전쟁에서 모든 아군부대를 통틀어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두 번씩이나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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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대통령 부대표창과 관련한 기록 ]

 

미 대통령 부대표창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근거에 의해 전공을 측정하여 결정하므로 상당한 권위가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회자되는 '터키군이 누구 것인지 모르는 시신의 코와 귀를 베어와 전과를 과대포장 하였다'같은 출처도 불분명한 주장은 당연히 통용될 수도 없고 그런 사례를 관련 자료나 당시 신문 기사에서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참혹하였지만 한국전쟁은 적의 수급을 베어 와야 전공을 인정받는 그러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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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지즈 터키 1여단장(中)밀번 미 1군단장(左) ]

 

만일 임진왜란처럼 베어 온 귀와 코가 전공을 인정받는 잣대였다면 당시 신문들은 앞 다투어 이를 대승의 증거로 보도하였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 중의 보도 매체들은 아군의 전공은 최대한 부풀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은 그런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전공을 인정받을 수도, 또한 인정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알아 볼 부분은 집단 강간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12 ]

 

그들을 모독하지 마라

'터키군이 수시로 부녀자를 집단 강간하여 이를 막기 위해 해병대가 구출 작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온라인 상에서 그럴듯하게 회자되는 루머입니다.  먼저 한국에 파견 된 모든 터키군 병사들이 천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일부의 경우는 분명히 불미스런 사건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일부라 해도 그런 행위는 당연히 옳은 것이 아니고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 강간이 수시로 자행하였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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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과 관련하여 최근 들어 부녀자 집단 강간에 관한 루머가 돌아다닙니다

그랬다면 악독하다는 터키군과 이처럼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요? ]

 
유엔군 중 최고로 군기가 엄정하였던 터키군이 집단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뿐더러 각종 공간사나 해병대원의 회고집을 보더라도 이에 관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만일 이러한 괴담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을 만한 주제라 생각되지만 정작 주요 언론 매체에서 다룬 적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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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루머가 게시된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터키군이 집단 강간하였다는 증거로 내세운 사진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괴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다만 지방지인 '미래신문'이 2008년 연재한 '김포 6.26전쟁 비사'에 터키군의 김포 주둔 당시에 부녀자 겁탈 사건이 있었다는 르뽀가 있는데, 이 또한 집단 강간과는 거리가 멀고 범죄를 저지른 병사는 처벌 받았다고 부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증언을 하신 분들이 당시에 9~11세에 불과하여 사실을 직접 목도한 것이 아니라 어느 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식의 회상이고, 다음을 살펴보면 진위의 정확성에 일부 의구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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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 뿐만 아니라 해병대도 강간 행위를 벌였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

 

증언에 따르면 터키군 뿐만 아니라 인근에 주둔한 (한국)해병대도 부녀자를 강간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집단 강간을 하던 터키군을 막으려 해병대가 출동했다는 이야기와 완전히 배치(背馳) 됩니다.  더구나 터키군이 김포반도에 전개하였던 1950년 12월에 해병대는 동부전선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 김포에 있지도 않은 해병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니 다른 증언의 신빙성도 의문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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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공식 사이트에 나온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1년까지 해병대 이동로로

1.4후퇴 전후하여 김포반도에 주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전쟁 중 터키군과 해병대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인접하였던 때는 휴전직전인 1953년 중순입니다.  [ 9 ]편에서 다룬 네바다 전초지대 전투 당시인데, 터키군이 속한 미 25사단과 해병대가 속한 미 해병 1사단이 이 지역에 서로 교대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으로 고착화되어 일대의 민간인은 후방으로 소개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집단 겁탈 및 해병대의 출동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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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부대마크를 보면 터키군이 미 25사단에 소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한쪽 부대가 전선에 투입되면 다른 부대는 바로 뒤 FEBA로 빠져 재편을 하여야 했으므로 두 부대 간의 물리적 충돌이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일부 병사에 의한 범죄는 있었겠지만 터키군이 집단으로 부녀자를 강간을 자행했다는 객관적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황상 그런 범죄 행위가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온라인 상에 떠돌아 다니는 '누가 ~카더라'라고 하는 식의 어설픈 정체불명의 주장은 당연히 괴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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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떼거리로 범죄를 저질렀다던 사람들이 고아들을 보호할 수 있었을까요? ]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당시 언론인데 막연한 생각과 달리 당시 신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보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3년 전반인데도 국군이나 유엔군이 주둔지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부녀자를 강간하였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터키군이 집단으로 중범죄를 자행했다면 틀림없이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휴전 후의 범죄 행위는 더욱 자세히 기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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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 범죄자에게 터키 군법재판이 사형을 선고하였다는 기사
이처럼 터키군은 군기 확립에 철저하였습니다 ]

 

예를 들어 1956년 3월 주한 터키군이었던 도간이 금품을 강탈하면서 한국 소년을 살해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불과 석 달 만에 터키군 군사재판은 범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형을 집행하기 위해 본국으로 송환하였습니다.  실제로 형이 집행되었는지, 피해자 측이 제대로 보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주한미군 범죄와 비교할 때 처벌 속도와 수위만 보더라도 터키군은 엄격하게 군기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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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을 범죄자로 모독하는 자들은 막상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터키와 참전 용사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따라서 터키군을 악행만 일삼은 점령군 인 것처럼 호도하는 주장은 마치 레바논에 파견 된 동명부대를 '간통만 일삼는 패륜남녀들의 집합소'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스럽게도 이런 괴담에는 '중공군은 인도적이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어이없는 부연이 반드시 따라 붙고는 합니다.  한마디로 전쟁기간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이후에도 오래 동안 우리를 도와준 터키와 참전 용사들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끝 ]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실

 

Üsküdar'a gider iken aldı da bir yağmur, Üsküdar'a gider iken aldı da bir yağmur

Kâtibimin setresi uzun, eteği çamur, Kâtibimin setresi uzun, eteği çamur

Kâtip uykudan uyanmış, gözleri mahmur, Kâtip uykudan uyanmış, gözleri mahmur.

Kâtip benim, ben kâtibin, el ne karışir? Kâtibime kolalı da gömlek ne güzel yaraşır.

Üsküdar'a gider iken bir mendil buldum, Üsküdar'a gider iken bir mendil buldum.

Mendilimin içine de lokum doldurdum, Mendilimin içine de lokum doldurdum.

 

우스크달라 가는 길에 비를 맞았네, 우스크달라 가는 길에 비를 맞았네

내님의 옷 끝이 땅에 끌리네, 내님의 옷 끝이 땅에 끌리네.

내님이 잠에서 깼지만 졸려 보이네, 내님이 잠에서 깼지만 졸려 보이네.

나의 님, 나의 님, 누가 우리를 갈라놓을까? 옷이 내 님에게 잘 어울리네.

우스크달라 가는 길에 손수건을 보았네, 우스크달라 가는 길에 손수건을 보았네.

그 안에 lokum(터키식 젤리)이 들어 있었네, 그 안에 lokum이 들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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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상 (클릭)

 

가사나 노래에 담겨 있는 의미는 정확히 몰라도 적어도 그 특유의 리듬이 낯설지 않은 유명한 터키의 민요 '우스크달라'입니다.  이역만리 터키의 노래임에도 한국의 노년층이 번안된 가사를 따라 부를 만큼 우리에게도 상당히 친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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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의 배경인 우스크달라 항 ]

 

충분히 예상하다시피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들의 입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생소한 외국 노래임에도 아리랑처럼 님을 일편단심 기다리겠다는 가사와 애닮은 곡조가 우리 심성에 잘 어울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굳이 고구려-돌궐처럼 직접 와 닿기 힘든 피상적인 인연보다, 우스크달라처럼 문화적으로 공감대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한국과 터키는 심정적으로 가까웠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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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민요가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왔을 만큼

심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우스크달라처럼 터키군의 참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문화에 획을 그은 사건이 하나 벌어졌는데 바로 한반도에서 이슬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55년 당시 주한터키군 종교 장교였던 카라이스마일오글루(Abdul Gafur Karaismailoglu) 대위를 이맘으로 하여 주둔지 등에서 자발적인 한국인 이슬람 신도가 생겨났습니다.  터키군의 철군과 더불어 교세가 급속히 단절되었지만 한국 이슬람은 이를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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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이슬람 신도로 알려진 사진입니다 ]

 

한국에서 이슬람이 종교로써 본격적인 틀을 잡은 것은 1970년대 오일쇼크와 더불어 시작된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과 관계가 많습니다.  이때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증진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76년 이태원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고 현재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신도로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한국 이슬람 역사는 이처럼 터키군의 참전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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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이슬람 중앙 성원 ]

 

잊혀진 전쟁으로 취급받지만 한국전쟁은 우리 삶에 지금도 영향을 끼칠 만큼 상상이상으로 거대했습니다.  유엔의 깃발아래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도와주었던 나라는 전투병을 파병한 16개국 외에도 의료지원단 파견 5개국, 기타 물자 지원 국가 19개국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 당시 세계에 존재하던 독립국이 60여 개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북한을 도운 동구권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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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이만 소위와 전쟁고아였던 아일라의 인연을 소개한 TV다큐멘터리

위기의 군우리 전투에서 전쟁 고아를 챙길만큼 터키군은 정이 많았습니다 ]

 

어느 하나 고맙지 않은 나라가 없지만 자국의 귀한 젊은이들의 를 뿌려가며 우리를 지켜준 파병국가들의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이들 국가들 중에서도 단독 작전이 가능한 여단 이상의 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미국, 영연방외 터키가 유일한데 그 만큼 우리나라는 터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알아 본 것처럼 이제는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고 오히려 무시하고 비난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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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왜곡하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주장은 대부분 '아는 엄마 친구로부터 들은 것인데..',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것인데...'하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시작하지만 정작 출처는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명백한 사실도 부정하려 들고 정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반면 중공군이나 북괴군에 대한 칭찬은 서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마움을 잊었더라도 욕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왜곡하려 드는 의문이 갈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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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연인원    14,936명
사망 및 실종       884명
부      상        2,2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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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도움과 희생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무리 시절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분명히 도움을 받고도 마음을 달리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더구나 왜곡하여 폄하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고 우리 정서에 용납될 수도 없습니다.  침략자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이역만리 달려와 고귀한 피를 뿌려주었던 터키와 투르크 전사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