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거부한 부대 [ 8 ]
세 번째 포위
중공군의 3차공세가 막을 내린 직후 실시된 천둥번개작전으로 아군이 서서히 전선을 북으로 걷어 올리고 있었지만 공산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부대를 재편하여 다시 공세를 준비하는데 이른바 4차공세로 불리는 2월
공세였습니다. 전사에는 한국전쟁 최악의 패전인 현리전투로 인하여 많이 알려진 중공군의 6차 공세를 최대 규모의 공세로 보지만
전쟁사적 의의는 사실 4차 공세가 더 컸습니다.
[ 은밀히 준비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습니다 ]
리지웨이가 야심만만하게 진행한 천둥번개작전을 수세적으로 막아내며 티를 내지 않고 은밀히 준비하여왔을 정도로 중공군의 의지는
확실하였습니다. 바로 남한 전역을 단숨에 석권하여 전쟁을 종결하고자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이후 병력을 대폭 증강하여 개시된 5월의 6차 공세는 중동부전선의 한정 된 돌파구 확대가 목표였습니다. 이에 비한다면
그 만큼 4차 공세는 전략적 의지가 강한 공세였습니다.
[ 중공군은 전쟁 종결을 목표로 공세를 진행하였습니다 ]
그때까지 중공군은 내심 자신이 있었습니다. 참전하자마자 북한 땅에서 UN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2개월 만에 38선을 넘어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선을 37도선까지 밀고 내려갔는데, 이곳에 설치한 UN군의 전략 방어선만 돌파하면 그 다음은 다시 낙동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공산군이 이번의 공세를 더 성공시킨다면 한국전쟁 초기의 공산군의 절대 우위 상태, 혹은 종전으로 상황을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 이때까지만 해도 승리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중국의 의지는 확고하였습니다 ]
2월 11일 밤, 모든 준비를 마친 공산군은 눈 덮인 전 전선에서 돌파를 감행하면서 피로 물든 4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적의
주공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 전선을 돌파하려 하였습니다. 동부전선의 북괴군이 원주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역습을 가하였고 동시에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이 수원을 돌파하여 천안으로 밀고 내려가기 위해 맹공을 가하였습니다. 만일 이때 아군이 무너졌다면
대한민국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 엄밀히 말해 이때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
그렇지만 불과 열흘 전까지 간신히 전선을 밀어올린 미 10군단이 원주를, 미 9군단이 수원을 피로써
방어해 내는데 성공하면서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였습니다. 이틀간에 걸친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이 정체되자 당황한 중공군은 다른
방향으로 돌파를 실시하려 하였습니다. 바로 미 9군단과 미 10군단의 지경선인 지평리를 통과하여 미
10군단의 배후를 차단 격멸함으로써 중동부전선에 구멍을 내 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 아군의 저항에 막힌 중공군은 지경선으로 돌파를 시도 하였습니다 ]
프랑스대대를 배속 받아 증강된 미 2사단 23연대가 약 둘레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방어하고 있던 지평리에 2월 13일 제115, 116, 117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9군이
나타났습니다. 원래 사단 본진으로부터 약 30km나 떨어진 지평리에 23연대가 주둔한 목적은 방어보다 경계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후에 미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되는 연대장 프리먼(Paul L. Freeman)은 워낙 중과부적이라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상부에 철수를
건의하였습니다.
[ 리지웨이와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추어 참전한 프랑스대대장 몽클라르
]
그런데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직접 하달하였습니다. '귀 연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평리를 사수하라' 그는 지평리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과 이곳에 출몰한 대규모 중공군의 목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지평리가 이번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낼 최후의 승부처로 정확히 판단하였고
23연대에게 이곳을 사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 지평리전투를 진두지휘한 미 2사단 23연대장 프리먼 ]
물론 23연대에게 최대한의 화력을 지원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선 전체가 공산군의 대공세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상황이어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지원이 즉시 이루어 질수 있을지는 리지웨이도 자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대안은 없었고 23연대가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자 그날 밤 중공군은 지평리를 완전히 포위하였습니다. 미 2사단이 한국전쟁에서 당한 세 번째
포위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