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운명을 거부한 부대 [ 6 ] ~ [ 11 ]

淸山에 2013. 7. 14. 15:14

 

 

 

 

운명을 거부한 부대 [ 6 ]

두 번째 포위

1950년 6월부터 그 이듬해 6월까지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정신이 없던 전쟁이었습니다.  낙동강에서의 피 말리던 두 달간의 공방전을 제외한다면 자고나면 전선이 바뀔 정도로 반복되는 진격과 후퇴가 일상이었습니다.  미 2사단도 해체의 위기를 딛고 재건이 되었지만 이 같은 전쟁의 양상으로 말미암아 사실 미 2사단외에도 피아의 많은 부대들이 무너졌다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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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 1년 동안 많은 피아 부대들이 무너졌다 재건되고는 하였습니다 ]

 

그렇다보니 어렵게 재건된 부대에게 암묵적으로 요구된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치욕을 능가하는 복수였습니다.  그런데 전황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한국전쟁 초반기는 의외로 복수의 기회가 빨리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사창리 패전을 극복하고 용문산-화천호 대첩으로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 오래전에 소개한 청성부대의 사례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미 2사단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곧바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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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건된 부대에게는 복수의 의무가 암묵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 ]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한 번 내주고 아군이 37도선 이남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에 재편 중에 있던 미 2사단은 흥남으로 철수하여 중부전선으로 작전 구역을 변경한 미 10군단 예하로 새롭게 편입되어 방어전에 임하였습니다.  공산군은 서울을 재점령한 기세를 발판삼아 남쪽으로 돌파구를 계속 확대하려 공세를 가하였는데 이를 흔히 정월공세 혹은 중공군 제3차 공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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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공세를 재개합니다 ]

 

이때 공산군은 미군의 화력 때문에 서부전선으로의 돌파가 용이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주로 국군이 담당하던 동부전선을 공격로로 예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군 후방인 안동 일대에 북괴군 2군단을 은밀히 침투시켜 게릴라 활동을 실시한 후, 북괴군 3군단으로 하여금 단양-안동 방향으로 공격하여 전후방을 동시에 교란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때 2, 9, 31사단으로 구성된 북괴군 3군단이 돌파하려 몰려든 곳이 원주 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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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충지인 원주 지역으로 북괴군의 공세가 집중되었습니다 ]

 

당시 원주를 담당한 부대가 미 2사단이었는데 군우리에서의 부상을 털고 신속히 재건을 막 마친 상태였습니다.  1월 5일 북한군의 돌파가 시도되었는데 압도적인 병력으로 세 곳으로 동시에 진격하여 미 2사단을 전면에서 압박하여 원주에서 몰아냄과 동시에 배후를 차단하여 일거에 섬멸하려 하였습니다.  압도적인 적에게 결국 미 2사단은 한국전쟁에서 기록된 두 번째로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군우리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당한 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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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군데로 동시에 공세를 가한 북괴군 3군단은 미 2사단을 포위하였습니다 ]

 

하지만 '인디언 헤드'들은 군우리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단지 포위되고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온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응집된 저항을 못해보고 무너져 내린 경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북위 37도선 일대에 강력한 주저항선을 구축한 상태로 전략적으로 실행된 1.4 후퇴는 아무대책 없이 무너져 내리던 청천강교두보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미 2사단은 포위당하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저항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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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당황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였습니다
(원주전투 당시에 고지를 선점하려 눈 속을 진군하는 미 2사단 장병들) ]

 

원주는 아군 방어선의 정중앙으로 이곳이 돌파당하여 북괴군이 안동까지 남진한다면 전선 전체에 후퇴를 강요시켜 또다시 아군을 낙동강교두보까지 밀어 붙일 수도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미 2사단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북괴군의 공격을 신속히 배치된 제37포병대대, 프랑스대대, 네덜란드대대 그리고 공군의 지원으로 하나하나 격퇴하여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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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포위망을 허물고 반격에 나서 원주를 탈환하였습니다
(원주전투 당시 공세로 나가는 미 2사단 장병들) ]

 

일주일간 계속된 미 2사단과 북괴 3군단간의 공방은 보급과 화력에서 열세를 보인 북괴군이 먼저 무너져 내렸고 이때 포위망이 풀린 미 2사단은 여세를 몰아 1월 13일 적을 격멸하고 원주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련기에 미 2사단의 이런 분투는 공산군이 37도 이남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복수극이 인디언헤드들에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7 ]

 

멈춘 후퇴 그리고 반격

 

중공군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미군이 고전을 거듭하였던 이유는 그들이 구사한 전술이 상당히 낯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무기삼아 정규전과 비정규전 그리고 심리전을 적절히 혼합한 중공군의 전술은 그동안 전혀 대하지 못한 전투방법이었습니다.  더구나 미군에게 한반도의 겨울은 처음 경험하는 악천후였습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창군 초기와 다름없던 국군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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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중공군이 낯설어 고전한 측면이 많습니다 ]

 

한국전쟁을 상당히 적확하게 묘사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할버스탬(David Halberstam)의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공군 참전직후인 1950년 겨울의 아군 붕괴는 처음 겪어보는 적의 기묘한 전술과 낯선 지형 그리고 악천후가 어우러져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UN군 최고 지휘부가 이런 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고 제대로 대처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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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dest Winter ]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적에게만 유리할 것 같았던 이런 조건은 사실 양면의 칼날과 같았습니다.  중공군은 아군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초기에 많은 재미를 보았지만, 한반도의 겨울 혹한과 험준한 지형은 당연히 보급의 제한을 가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중공군이 받는 고통도 대단하였습니다.  공산군이 야간에 험로를 따라 이동하는 전술도 제공권을 장악한 UN군의 공습이 무서웠기 때문에 행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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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군의 공습이 무서워 중공군은 야간에만 이동이 가능하였습니다 ]

 

오랜 기간의 국공내전과 대일전쟁을 통한 경험 덕분에 산지를 이용한 중공군의 기동 능력이 아군, 특히 미군보다 뛰어나기는 하였지만 화력과 보급의 뒷받침이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공세를 일주일이상 지속하기가 구조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중공군은 피리와 꽹과리로 대표되는 심리전을 구사하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점은 힘으로 상대를 충분히 굴복시킬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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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선전 사진이지만 역설적으로 화력의 열세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

 

이런 중공군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하는 방법은 실전에서 많이 부딪혀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1951년 6월을 기점으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둔화되면서 한국전쟁이 휴전선 인근을 중심으로 소강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군이 중공군에 대한 면역 백신을 지난 8개월간 확실히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현리전투 같은 뼈아픈 주사도 있었지만 용문산대첩 같은 즐거운 대승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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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과의 계속된 교전을 통해 약점이 간파되었습니다 ]

 

원주전투에서 포위망에 갇혔어도 승리를 얻는 방법을 체득하였지만 그 당시 상대는 북괴군이었습니다.  미 2사단은 군우리에서 받았던 치욕을 앙갚음하기 위해서라도 중공군을 확실히 제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그러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원주전투를 끝으로 중공군의 3차공세가 마무리되자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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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한 명장 리지웨이 ]

 

아군의 방어선을 수원-여주까지 북진시키기 위한 천둥번개(Thunderbolt)로 명명된 반격 작전이었는데, 이것은 지난 3개월간 계속된 아군의 후퇴가 드디어 끝나고 다시 재공세로 나서게 됨을 의미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1월 25일 대대적인 포격을 공산군 집결지에 쏟아 부으며 개시된 반격 작전의 주공은 수원으로 진격할 미 1군단과 여주방향으로 올라갈 미 9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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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도선까지 밀려난 아군이 드디어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

 

막강한 화력을 우위삼아 1월 31일 수원-여주선을 넘어 북진이 개시되자 리지웨이는 미 9군단의 우익인 원주를 담당하던 미 10군단으로 하여금 홍천-횡성선을 확보하여 전선의 단절이 발생되지 않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 9군단과 미 10군단이 남한강을 지경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공간이 넓었습니다.  미 10군단은 미 2사단 예하 23연대를 요충지인 양평군 지평리로 보내 간극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8 ]

 

세 번째 포위

 

중공군의 3차공세가 막을 내린 직후 실시된 천둥번개작전으로 아군이 서서히 전선을 북으로 걷어 올리고 있었지만 공산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부대를 재편하여 다시 공세를 준비하는데 이른바 4차공세로 불리는 2월 공세였습니다.  전사에는 한국전쟁 최악의 패전인 현리전투로 인하여 많이 알려진 중공군의 6차 공세를 최대 규모의 공세로 보지만 전쟁사적 의의는 사실 4차 공세가 더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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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히 준비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습니다 ]

 

리지웨이가 야심만만하게 진행한 천둥번개작전을 수세적으로 막아내며 티를 내지 않고 은밀히 준비하여왔을 정도로 중공군의 의지는 확실하였습니다.  바로 남한 전역을 단숨에 석권하여 전쟁을 종결하고자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이후 병력을 대폭 증강하여 개시된 5월의 6차 공세는 중동부전선의 한정 된 돌파구 확대가 목표였습니다.  이에 비한다면 그 만큼 4차 공세는 전략적 의지가 강한 공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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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은 전쟁 종결을 목표로 공세를 진행하였습니다 ]

 

그때까지 중공군은 내심 자신이 있었습니다.  참전하자마자 북한 땅에서 UN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2개월 만에 38선을 넘어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선을 37도선까지 밀고 내려갔는데, 이곳에 설치한 UN군의 전략 방어선만 돌파하면 그 다음은 다시 낙동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공산군이 이번의 공세를 더 성공시킨다면 한국전쟁 초기의 공산군의 절대 우위 상태, 혹은 종전으로 상황을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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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까지만 해도 승리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중국의 의지는 확고하였습니다 ]

 

2월 11일 밤, 모든 준비를 마친 공산군은 눈 덮인 전 전선에서 돌파를 감행하면서 피로 물든 4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적의 주공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 전선을 돌파하려 하였습니다.  동부전선의 북괴군이 원주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역습을 가하였고 동시에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이 수원을 돌파하여 천안으로 밀고 내려가기 위해 맹공을 가하였습니다.  만일 이때 아군이 무너졌다면 대한민국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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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히 말해 이때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

 

그렇지만 불과 열흘 전까지 간신히 전선을 밀어올린 미 10군단이 원주를, 미 9군단이 수원을 피로써 방어해 내는데 성공하면서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였습니다.  이틀간에 걸친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이 정체되자 당황한 중공군은 다른 방향으로 돌파를 실시하려 하였습니다.  바로 미 9군단과 미 10군단의 지경선인 지평리를 통과하여 미 10군단의 배후를 차단 격멸함으로써 중동부전선에 구멍을 내 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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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의 저항에 막힌 중공군은 지경선으로 돌파를 시도 하였습니다 ]

 

프랑스대대를 배속 받아 증강된 미 2사단 23연대가 약 둘레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방어하고 있던 지평리에 2월 13일 제115, 116, 117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9군이 나타났습니다.  원래 사단 본진으로부터 약 30km나 떨어진 지평리에 23연대가 주둔한 목적은 방어보다 경계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후에 미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되는 연대장 프리먼(Paul L. Freeman)은 워낙 중과부적이라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상부에 철수를 건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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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지웨이와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추어 참전한 프랑스대대장 몽클라르 ]

 

그런데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직접 하달하였습니다.  '귀 연대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평리를 사수하라'  그는 지평리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과 이곳에 출몰한 대규모 중공군의 목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지평리가 이번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낼 최후의 승부처로 정확히 판단하였고 23연대에게 이곳을 사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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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전투를 진두지휘한 미 2사단 23연대장 프리먼 ]

 

물론 23연대에게 최대한의 화력을 지원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선 전체가 공산군의 대공세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상황이어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지원이 즉시 이루어 질수 있을지는 리지웨이도 자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대안은 없었고 23연대가 후퇴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자 그날 밤 중공군은 지평리를 완전히 포위하였습니다.  미 2사단이 한국전쟁에서 당한 세 번째 포위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9 ]

 

영원히 기록될 대승

 

리지웨이의 확고한 의지를 직접 받은 연대장 프리먼은 병력을 고려하여 원형 방어선을 좀 더 안으로 줄여 진지 둘레를 6km 정도로 대폭 축소하여 사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4개 대대 규모로 완벽하게 사주 방어태세를 갖추기에는 사실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예비대를 두지 못한 상태로 전차중대와 보병은 최 일선으로 내보내고 포병대대가 진지 종심에 자리 잡고 사방으로 포탄을 날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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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포위된 미2사단 23연대를 향해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

 

2월 13일 밤이 되자 미 2사단 23연대 사방으로 횃불을 밝혀 든 중공군이 꽹과리와 피리를 불면서 포위망을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적의 공격이 개시된 것이었고 이에 발맞추어 23연대가 보유한 모든 포가 사방으로 불을 뿜으면서 진지 주변에 거대한 탄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포 1문 당 평균 250발 정도를 발사한 것으로 기록이 되었을 만큼 엄청난 화력으로 적의 압박을 막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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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심에 자리 잡은 포대가 쉬지 않고 사방으로 불을 뿜었습니다 ]

 

중공군 또한 23연대를 향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피격을 당한 연대 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프리먼도 심각한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리먼은 후송을 거부하고 지평리에 남아 그의 연대를 계속 지휘하였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외곽에서부터 압박하여 오던 중공군도 미 2사단 장병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였고 날이 밝자 출격한 아군기가 중공군을 맹폭하여 기세를 누그러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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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밝자 공군의 맹폭이 개시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날 오후 미 9군단이 수원-여주로 지향하던 중공군 주력의 압박을 물리쳐내는데 성공하자 군단 예비로 장호원에 주둔 중이던 미 1기병사단 예하 5기병 연대가 23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지평리로 출발하였습니다.  탱크를 앞세운 5기병연대가 눈 덮인 논밭과 산길을 가로질러 지평리로 출동하는 모습은 마치 바스토뉴에서 용전분투하던 101공수사단을 구하러 가던 패튼의 3군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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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기병 연대 전투단이 지평리를 구원하러 출동하였습니다 ]

 

첫날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중공군 38군은 2월 14일 밤 야음을 틈타 재차 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전 정찰에 의거 철조망이 쳐있지 않은 지평리 남쪽 G중대 담당 방어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여 돌파를 감행하였습니다.  탄막에 수많은 중공군이 녹아내려도 그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아군 진지로 다가왔고 그날 자정 일부 방어 진지에서는 피아간에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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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접 백병전도 벌어졌습니다 ]

 

죽여도 죽여도 지옥의 탄막을 지나 진지로 달려드는 중공군의 모습을 본 프리먼 연대장이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같다고 상부에 보고하였을 정도로 자정을 지난 2월 15일 새벽의 상황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화력으로 적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아군의 10배가 넘는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을 물리치기는 상당히 어려웠고 아군의 소모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고립된 23연대가 불리할 것은 명약관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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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는 중공군의 시신으로 뒤덮여 갔습니다 ]

 

하지만 23연대의 불타는 투지에 중공군이 서서히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다시 날이 밝아오고 공군의 맹폭이 재개되자 지평리 주변은 순식간 중공군 시체로 덮여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하러 달려온 미 5기병연대가 만난의 위기를 극복하고 중공군의 포위망을 갈라버리며 지평리와 연결에 성공하자 중공군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졌습니다.  지평리에서의 대승은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중공군 4차 공세를 꺾어버린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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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선의 한 축을 담당하여 리지웨이의 치하를 받는 미 2사단 23연대 배속 프랑스 대대 ]

 

비록 단말마적인 중공군의 저항이 계속 되었지만 2월 16일 아침이 되었을 때 9만으로 추정되던 중공군 39군은 이미 포화 속에 대부분 사라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불과 두 달 전 인디언 태형이라 불린 참패를 겪으며 부대가 해체 위기까지 몰렸던 미 2사단은 부대사에 영원히 기록될 멋진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둘 다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얻은 결과였는데 한마디로 극과 극의 차이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10 ]

 

네 번째 포위

 

부대 재건을 주장하던 밴 플리트의 의도대로 영광스러운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미 2사단은 미 10군단의 중추가 되어 중부전선의 중핵부대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평리에서의 분투로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쳤지만 그렇다고 전쟁의 전세가 완전히 반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독했던 그해 겨울이 지나고 1951년 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공자는 중공군이었고 아군은 방어하는 입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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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은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려 다음 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

 

4차 공세에서 상당한 출혈을 입었지만 중공군은 전선의 주도권을 계속 잡기 위해 본토로부터 30여만의 증원과 물자를 보급 받아 새로운 후속 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4월에 실시 된 5차 공세도 실패로 막을 내렸고 초조해진 공산군은 쉬지 않고 추가 공세를 재개하였습니다.  이른바 5월 공세 또는 춘계 대공세로 알려진 중공군의 제6차 공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중공군이 돌파구로 삼은 동부전선은 국군이 담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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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을 만만하게 본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

 

이전의 공세에서 미군에게, 특히 4차 공세에서 미 2사단에게 피의 보복을 당하며 궤멸된 쓰라린 경험을 얻은 중공군은 상대적으로 약체라고 생각하던 국군의 담당 섹터인 동부전선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 주력은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 사이로 파고들면서 전선을 돌파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의도대로 국군 3군단이 궤멸되면서 전선에 엄청난 구멍이 생겼습니다.  바로 굴욕의 현리전투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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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를 완료한 중공군의 포격과 동시에 6차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

 

1951년 5월 16일에서 16일 사이에 공산군은 미 10군단의 우익을 담당하던 국군 5, 7사단을 돌파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국군 3군단의 배후인 현리를 포위하면서 돌파구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미 10군단의 측면이 노출되었습니다.  이때 미 10군단의 좌익을 담당하던 부대가 바로 미 2사단 38연대였습니다.  당시 9연대는 사단 예비로 후방에 빠져 있었고 지평리에서 대승을 이끌었지만 출혈을 컸던 23연대는 군단 예비로 재편 중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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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 2사단 38연대의 측면이 노출되었습니다 ]

 

결국 미 2사단 38연대는 측방으로 치고 들어온 중공군 12군에게 배후를 차단당하였습니다.  이미 전선은 국군 3군단이 사라져 버리면서 진부-대관령 인근까지 밀려난 상태라 38연대는 홍천 북방의 778고지일대에 고립되면서 절해고도의 섬처럼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는데 이것은 미 2사단이 한국전쟁에서 당한 4번째 포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로 물든 벙커고지(Bunker Hill)전투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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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커고지는 피로 물들어 갔습니다 ]

 

비록 순식간에 부대가 포위당하였지만 인디언헤드들은 더 이상 이런 상황을 절망적으로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군우리에서의 패전을 입에 쓴 보약으로 삼아 적에게 포위당하였을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피로써 터득한 미 2사단은 이번에도 차분히 대응에 나섰습니다.  인디언헤드들은 고지 주위에 참호를 깊게 파고 중공군의 공격을 하나하나 격퇴하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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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은 차례대로 격퇴되었습니다 ]

 

지리적으로 적진 한가운데인 벙커고지에 미 38연대가 고립된 형국이었지만 요충지에 틀어 박혀 고지 아래의 중공군을 향해 포를 갈겨대는 인디언헤드들 때문에 속사리-강릉 선까지 돌파구를 형성한 중공군이 홍천 방면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여 작전에 큰 차질을 빚었습니다.  한마디로 벙커고지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이를 뽑아내기 위해 중공군은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고지 쟁탈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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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기세가 꺾이면서 공세가 막을 내렸습니다 ]

 

한 때 K중대의 방어 진지가 피탈 당하기도 하였을 만큼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전 병력이 벙커에 엄폐한 후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고지 위의 중공군을 포화로 말려버리는 극히 위험한 작전까지 구사하며 38연대는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중공군은 끝내 홍천으로 진출하지 못한 상태로 기세가 꺾였고 이후 미 3사단과 국군 수도사단이 운두령과 대관령을 각각 점령하자 적의 공세는 막을 내렸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끝 ]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되다

 

한때는 잊혀진 전쟁이라 불릴 만큼 관심 밖으로 여겨졌지만 바로 전에 벌어졌던 제2차 대전이 워낙 거대해서 그렇지 한국전쟁은 결코 규모가 작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어버리다 보니 일반 민초들이 겪었던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전선에서 적을 향하여 총을 쏘고 포탄을 피하며 숨이 턱이 차오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착검을 한 체 고지로 돌격하였던 수많은 병사들의 고통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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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 전투 중 동료 부상병을 후송하는 미 2사단 장병 ]

 

부지불식간 침략을 당해 이를 격퇴하고자 나선 우리 선배들의 고통은 어쩌면 이 땅에 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업보였다고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국제 정세로 말미암아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낯선 나라에 와서 피를 흘렸던 외국의 병사들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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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외국 병사들이 낯선 곳에서 사상 당하였습니다 ]

 

이 때문에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한 수많은 외국 병사들의 노고는 결코 경중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개전 초부터 즉각 개입하여 UN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미군의 역할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당시 미 지상군은 1개 야전군 예하 3개 군단에 7개 사단(참전사단은 총 9개 사단)이 항상 전선에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이중 미 2사단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부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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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원주전투 당시 방어선으로 이동 하는 미 2사단 ]

 

august 개인적으로는 한국전쟁 초기에 맹활약한 미 해병 1사단이 미군의 모든 참전 부대들 중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 관련글 참조 ) 종전 때까지 주로 전선 중앙을 책임지며 마당쇠처럼 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열심히 활약하였던 인디언헤드의 노고도 가히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NO. 2라는 단대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 2사단은 미군 내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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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미 2사단 ]

 

하지만 단지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군우리전투의 참담한 패전에도 불구하고 부대가 해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 2사단의 재건을 주장하였던 밴 플리트는 내재된 미 2사단의 전투력을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미 8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여 사창리전투에서 붕괴당한 국군 6사단을 직접 시찰한 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처럼 밴 플리트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면 부대의 해체보다는 재건을 선택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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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 장비로 무장하고 동계 훈련 중인 주한 미 2사단 병사 ]

 

그의 믿음대로 재건 된 미 2사단은 이후 그들을 포위한 부대가 오히려 더 무서워 할 만큼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는 부대가 되었고 국군 6사단도 재건 된지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전쟁 최대의 승전을 올리는 기적을 연출하였습니다.  미 2사단은 한국전쟁에서 전사 7,094명, 부상 16,237명, 실종 186명, 포로 1,516명 등 총 25,093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을 만큼 승리를 얻기 위해 반대급부로 고귀한 많은 피를 한반도에 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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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부대사의 가장 오랜 세월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미 2사단은 포위되어 패배할 수 있는 부정적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위기를 극복한 부대였습니다.  원래 미 2사단은 1950년 북진 당시에 종전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휴전 후 1954년 9월 원래 주둔지였던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로 철군했으나 전 세계적인 미군 재배치의 일환으로 실시된 계획에 따라 미 1기병사단과 주둔지를 맞교환하면서 1965년 한국에 재배치되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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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미 2사단은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

 

그렇다보니 1917년 창설된 미 2사단은 부대 역사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참전 10개월 만에 4번이나 포위당하고도 살아남았고 그중에서 3번은 오히려 그들을 포위한 적들을 몰아붙여 대승을 이끈 찬란한 전과를 얻은 곳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이제는 우리 현대사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미 2사단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