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운명을 거부한 부대 [ 1 ] ~ [ 5 ]

淸山에 2013. 7. 14. 15:27

 

 

 

 

 

 

운명을 거부한 부대 [ 1 ]

가장 쉬운 승리 방법

두말할 필요 없지만 전투를 수행하는 모든 지휘관들은 승리를 원합니다.  승리라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자면 적을 물리치는 것인데, 이런 단순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이를 작전이라고 하는데, 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중을 기하여 진행하여야하고 때로는 임기응변적으로 변화를 줄 필요도 있는 고도의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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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

 

하지만 작전을 아무리 잘 수립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나 전투는 항상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하더라고 상대가 나보다 더 뛰어난 준비를 하였다면 승리를 거두기는 힘듭니다.  반대로 나의 준비가 부족하여도 상대가 더 허술하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역사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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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고한 마지노선도 결국 더 뛰어난 작전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

 

전쟁이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역사에는 승리를 얻기 위해 시도하였던 수많은 작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전쟁의 환경이 바뀐 현재까지도  확실하게 적을 제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포위'입니다. ( 관련글 참조 )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상대를 포위망 안에 가두는데 성공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역사적인 전투들의 예를 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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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 포위전의 모범인 탄넨베르크 전투 ]

 

포위를 성공하였다는 것은 상대의 퇴로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의 전쟁도 그러하였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전쟁의 양상이 거대한 물량전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포위를 당한 쪽의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선이 절단당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승리는 고사하고 포위망 안에서 저항하며 버틸 수 있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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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위당하여 저항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

 

때문에 포위당한 측은 항복 아니면 몰살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고 이를 뒤집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많지는 않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불굴의 의지로 포위를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은 경우도 있는데 612년 '안시성 전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안시성을 포위하였던 당(唐)도 멀리서 원정을 왔기 때문에 장기간 포위망을 유지하기는 곤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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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 혈전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드라마 묘사 장면) ]

 

안시성 전투는 한마디로 특별한 외부의 도움 없이 누가 더 오래 버티나하는 인내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포위를 당한 측에서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는 방법은 포위망을 뚫어 포위망 밖의 우군과 연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포위된 군대가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나가기는 물리적으로 힘들고 대개 외부의 증원군이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올 경우에 성공 확률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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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위 된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전을 계속할 수 있던

동기 중 하나가 구출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

 

어떻게 생각한다면 비록 항복을 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 제6군이 처절하게 항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구출에 대한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후퇴하지 못하고 현지 사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들은 조만간 구출하여주겠다는 총통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실제로 만슈타인이 지휘하던 돈집단군이 35km 밖까지 진군하여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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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개월간 4번이나 포위를 당하고도 살아난 부대가 전사에 있습니다 ]

 

하지만 고립된 독일군들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처절한 저항을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처럼 전투 중 포위당한 쪽은 생존이 위태로운 위기이며 전세를 반전시키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10개월간 4번의 포위를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복수극을 연출한 부대가 있습니다.  다음은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2 ]

모두를 놀라게 만든 빠른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엄청난 일이 곧바로 벌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이었습니다.  UN이라는 이름을 빌린 형태이기는 하였지만 미 24사단에서 차출된 스미스 특임대(Task Force Smith)가 전쟁 일주일 만에 1950년 7월 2일 부산에 발을 디디었을 만큼 미군의 참전은 상당히 빨랐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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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스 특임대 참전 기념비 ]

 

최근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빠른 미국의 개입을 북괴는 물론 전쟁 개시의 주요 당사자였던 소련과 중공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애치슨라인(Acheson Line)으로 알려진 것처럼 미국이 한국을 전략방어망에서 배제하였기 때문에 설령 참전한다하더라도 적어도 3개월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시간이면 남한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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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었고 이 때문에 침략자들은

남침을 하더라도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오판하였습니다 ]

 

하지만 예상을 뒤집은 미국의 조속한 참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속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분명히 미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객관적으로 당시 국군의 전력으로 공산군을 물리치기는 힘들었습니다.  전격 참전한 미군도 처음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만큼 전쟁, 초기 북괴군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국군이 단독으로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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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 초 북괴군의 전력은 국군을 압도하였습니다 ]

 

이처럼 미군의 즉시 참전은 최근 종북세력들이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원흉이라 공개적으로 분통해 할 만큼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물론 한반도의 분단에 소련과 더불어 미국도 분명히 책임이 많으며 따라서 미국의 참전은 병 주고 약도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고 미군의 참전이 적화통일을 방해하였다고 분통해 하는 자들의 어이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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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없게도 종북 세력들의 궤변이 공공연히 주장 될 만큼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려 내려갔습니다.  UN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한 방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을 구상하였던 것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당시였을 정도로 빨랐는데, 7월 중 실시 예정으로 블루하트(Blue Heart) 작전을 입안하였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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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가 한강 변 시찰 당시에 인천상륙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하지만 공산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고 반면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미군의 준비가 너무 부족하여 작전은 연기되었습니다.  블루하트계획 당시 상륙군으로 예정되었던 부대가 미 1기병사단이었는데 경부축선에서 공산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로 계획된 미 24사단이 오산, 천안, 대전, 금강으로 후퇴하며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자 예정을 바꾸어 7월말 영일만을 통하여 전선에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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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전투 당시의 미 1기병사단 부상병 ]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한 맥아더는 블루하트계획을 대신하여 실시시기를 9월 중순으로 늦춘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을 계획하였고 본토에서 긴급 동원되어 한국으로 이동 중에 있던 미 2사단과 미 해병 1임시여단을 상륙부대로 낙점하였습니다.  하지만 호남 지역이 북괴군에게 돌파당하며 전선이 낙동강으로 축소되자 이들 부대는 곧바로 낙동강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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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7월 미 2사단의 한국 주둔이 개시되었습니다 ]

 

원 주둔지인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Ft. Lewis)를 떠나 선도 부대가 7월 23일 부산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8월 24일 사단 전체가 한국으로 이동 전개한 미 2사단도 이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원래 종전이 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예정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적에게 무려 4번이나 포위당하였고 그때마다 격전을 치루고 살아났는데, 이런 인연 때문인지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하는 부대가 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3 ]

긴박했던 전개

 

미 2사단이 한국에 이동 전개를 마친 1950년 8월말은 피아가 흘린 피로 낙동강 교두보가 붉게 물들어가면서 공방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이었습니다.  미 2사단은 배에 올라 미국에서 출항할 때만 하더라도 인천상륙 작전에 투입할 부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워낙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태평양 횡단 중에 낙동강 방어에 투입되도록 조정되었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전선으로 이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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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부대로 예정 된 미 2사단은

급박한 낙동강방어선에 투입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미군) ]

 

당시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미 2사단의 적시 증원은 천군만마와 같은 힘을 안겨주었습니다.  다부동, 포항, 안강, 마산 등 낙동강 교두보 곳곳을 돌아가며 계속하여 이어진 북괴군의 8월 공세 당시에 때마침 도착한 미 2사단은 미 8군의 유일 예비가 되어 부대를 정비한 후, 가장 피로도가 높아 당장 부대 재편이 요구되던 미 24사단을 대신하여 현풍-영산일대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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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사단 도착 당시에 낙동강 혈전은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좌측에 해당되는 곳으로 워커는 미 9군단이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는데 미 2사단은 마산 지역 방어에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주었던 미 25사단과 함께 미 9군단 예하 부대로 편제되어 방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미 10군단이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서울과 수원으로 진군하여 들어가자 미 8군도 마침내 낙동강 교두보를 박차고 나와 북으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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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말 드디어 아군은 반격에 나섭니다 ]

 

당시 미 8군은 다음과 같은 네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는데 국군 1군단이 동해축선, 국군 2군단이 영서지방, 미 1군단이 경부가도, 미 9군단이 호남지방으로 각각 나누어 공격하여 들어갔습니다.  그중에서도 주공을 맞은 미 1군단은 경부축선을 따라 서울로 진격하여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고 미 2사단이 속한 미 9군단의 섹터는 호남, 충청 일대였는데 구조적으로 2선인 후방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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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의 반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따라서 10월초가 되어 대부분의 부대가 38선을 통과하여 북진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미 2사단은 후방의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아군의 반격 속도가 워낙 전광석화 같아서 후퇴하지 못한 많은 북괴군이 뿔뿔이 쪼개져 산악 지대로 스며들어 게릴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후방의 안전을 위해 이의 소탕도 중요한 임무가 되었는데 일단 이를 미 9군단이 담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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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 초기에 미 9군단은 주로 후방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달려간 이후 거의 모든 아군 부대들은 한만국경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진격이 늦었던 미 9군단도 국군과 경찰에게 38선 이남의 후방 작전 지역을 인계한 후, 후속하여 북진의 대열에 동참하려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미 9군단은 38선 이북으로 올라가 다시 한 번 후방작전을 펼칠 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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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의 변화와 함께 미 2사단도 38선 이북으로 이동합니다 ]

 

비록 소련이나 중공의 참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일부 우려도 있었지만 맥아더를 비롯한 대다수의 UN군 지휘부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지휘부는 본국에 병력이나 보급물량을 서서히 줄여줄 것을 요청하였고 종전이 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당시에 가장 후방에 있던 미 2사단을 우선 낙점하여 놓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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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숙천 일대에서 벌어진 공수작전
이때까지만 해도 종전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

 

사실 태평양을 건너 남의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던 수많은 미군 병사들은 전쟁을 하루 속히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당연히 소원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때까지 전황은 모두의 바람대로 그렇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짧은 북한의 가을이 끝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고, 피하고 싶었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4 ]

 

첫 번째 포위

 

예상과 달리 변변한 저항 없이 10월 19일 평양이 쉽게 점령되고 북괴군의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추정하던 청천강까지 UN군이 밀고 올라가자 전쟁은 쉽게 끝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타난 중공군으로 인하여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으로 각개 약진하던 아군 부대들이 격파되면서 짧았던 북진을 마감하게 되었고 눈물의 후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순식간 아군의 존립을 걱정할 상황으로 전황이 급반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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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은 순식간 바뀌었습니다 ]

 

선두를 달려가던 국군 6사단은 압록강에 손을 담그자마자 중장비를 유기한 체 연대별로 쪼개져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바빴고 ( 관련글 참조 ) 평양 선점 당시에 국군 1사단과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미 1기병사단도 부대의 절반이 붕괴되는 엄청난 출혈을 입고 중공군의 사정권에서 겨우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후퇴직전에 북위 39도선 일대에서 서에서 동으로 도열한 아군은 미 1군단, 국군 2군단,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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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공세로 전선은 순식간 청천강 일대로 밀려났습니다 ]

 

모든 부대가 중공군의 압박을 받았는데, 특히 서부전선 미 8군 관할지역에 대한 공세가 거셌습니다.  전선 중앙을 담당하던 국군 2군단이 적의 공세에 순식간 녹아내리면서 이곳을 관통한 중공군이 일로 남진하여 원산을 점령하여버리자 함경도로 진격한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고립되어 해상을 통한 탈출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후방에 있던 미 9군단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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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파구를 메우려 미 9군단이 이동하였습니다 ]

 

그렇지만 단지 밀려 내려오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서였지, 미 9군단의 증원만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중공군을 막아낼 수 있던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한 형국이었는데, 그동안 잘못된 북진 방법을 선택한 아군의 오판도 이런 상황을 초래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미 9군단은 일단 국군 2군단의 붕괴로 생긴 돌파구를 메워서 미 8군 본진이 청천강 일대에서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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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미 8군의 후퇴를 엄호하였습니다 ]

 

이때 투입된 미 2사단은 청천강 전투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미 8군이 평양으로 안전하게 후퇴하도록 청천강 우익인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에 남아 후퇴로를 엄호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8군의 주력인 미 1군단이 청천강을 안전하게 건너서 숙천과 안주 일대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자 1950년 11월 24일, 미 2사단도 군우리에서 순천을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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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향한 미 2사단 퇴각로 ]

 

이때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갈 수 있는 도로는 직접 가는 길과 숙천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한 사단장 카이저(Laurence B. Keiser) 소장은 미 1군단장 밀번의 조언과 달리 좀 더 빨리 후퇴하기 위해 직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한 길이 숙천 우회로에 비하여 상당한 험로여서 말이 도로지 계곡 사이에 자연적으로 난 좁은 산길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통로를 미 2사단은 종대로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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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급습이 개시되었습니다 ]

 

물론 수색대를 먼저 보내 철수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일부 소규모 교전도 있었지만 후퇴만 생각하던 미 2사단은 퇴각로가 안전하다고 단정하고 대강의 준비를 마치자 군우리를 연대별로 순천을 향한 후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군우리-순천 간 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는 이미 중공군 42군이 은밀히 선점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미 2사단이 협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도로 앞뒤가 중공군에게 순식간 차단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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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 2사단 장병 ]

 

그리고 협곡 양쪽의 산위에 포진하고 중공군의 화력이 계곡아래에 고스란히 노출된 미 2사단을 향하여 난사되기 시작하였고 숨을 곳이 없었던 장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선택할 방법은 포탄과 총알의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미군 역사에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군우리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고 이것이 한반도에서 미 2사단이 당한 첫 번째 포위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5 ]

 

 

치욕의 참패

 

심야에 은밀히 험준한 산악을 타고 내려와 아군의 배후를 차단한 후 맹공을 가하는 특유의 전법은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1951년 중반까지 즐겨 써먹던 전술이었습니다.  따라서 미 2사단이 군우리 협곡에서 불현듯 포위당하였지만 사실 이번이 아군에게 첫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공군이 처음 출몰하여 전세를 급속히 역전시킨 제1차 공세 당시부터 이런 식으로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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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포위 전술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

 

이런 전술은 북진 당시부터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 아군 예하부대간의 단절과 맞물려 후퇴시기에 더욱 많은 혼란을 촉진시켰습니다.  지난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국군 2군단이 붕괴되고 미 1군단이 밀려났음에도 아군은 교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미 2사단이 무너지는 전선을 도우려고 올라왔지만 지금까지 당한 중공군의 전술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얻지 못하였고 순식간 부대가 포위당하는 똑같은 위험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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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은 계속 같은 전술에 당하였습니다 ]

 

퇴로가 차단당하고 출구는 아직도 저 멀리에 있던 평안도 심심유곡의 협곡 속에 갇힌 미 2사단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총탄에 녹아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카이저 사단장은 가장 후위에 있어서 그나마 전력이 보존되어 있던 23연대에게 앞으로 나와 돌파구를 열라고 명령하였으나 무전 내용이 와전되면서 23연대가 신안주로 우회하는 도로로 안전하게 철수해 버리는 황당한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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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하 부대에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황당함도 연출되었습니다 ]

 

결국 11월 30일, 전투가 끝났을 때 순천에 살아서 집결한 사단 병력은 겨우 20퍼센트에 불과하였고 모든 중장비는 망실당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미 2사단이 전멸과 다름없는 피해를 입었던 군우리-순천 간 협곡을 흔히 미 전사에서는 '인디언 태형장'으로 부르는데, 그 이유는 마치 인디언들이 계곡 양측에 늘어서서 공격을 가하였던 옛 전법과 비슷하였고 더욱이 미 2사단의 부대마크가 '인디언 헤드(Indian Head)'라서 붙여진 불명예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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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

 

이러한 치욕스런 대가로 미 8군 주력이 안전하게 철수하여 다음 단계 작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전사에 기록되었지만, 이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사단 급 부대가 당한 최악의 전과였습니다.  군우리 전투 후 12월에 개최된 미 육군  최고회의에서 사단을 해체하여 사령부와 사단기를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하였을 만큼 미 2사단이 당한 최초의 포위는 그야말로 씻기 힘든 굴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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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수용소에 수용 된 미군 포로들 ]

 

그런데 한국전쟁에서의 패배로 해체된 첫 번째 사단이 될 수도 있는 불명예로부터 미 2사단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데, 당시 미 2군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이듬해 미 8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그는 심각한 패배를 입었다고 단대 번호 2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를 함부로 해체할 수는 없다고 항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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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 해 미 8군 사령관으로 영전되는 밴플리트가 부대 해체를 막았습니다 ]

 

참고로 미 2사단은 제1차 대전 당시인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브르몽(Bourmont)에서 창설되어 6차례의 주요 전투에 참전하였고 제2차 대전 당시에는 노르망디로 상륙하여 서유럽에서 맹활약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밴 플리트의 주장대로 부대는 해체대신 재건이 결정되었습니다.  참패 후 중부전선 후방으로 빠져있던 미 2사단은 12월 7일 신임 사단장 맥클루어(Robert McClure)의 부임과 동시에 신속히 재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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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신속히 재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

 

최악의 패배와 연이어 부대 해체 결정이라는 초유의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재탄생의 계기를 잡은 미 2사단에게 요구된 것은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유구한 부대의 역사와 그와 관련 된 명예 그리고 전통을 당당히 입증할 수 있는 승리였습니다.  만일 다시 한 번 적의 공세나 포위가 있다하더라도 단지 몰라서 당했다는 이유는 더 이상 통할 수 없었습니다.  인디언 헤드들은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