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굴욕의 고개 [ 1 ]~[ 7 ]

淸山에 2013. 7. 14. 16:15

 

 

august 의 軍史世界

 

조선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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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가져 온 자료

 

 

 

 

 

 

굴욕의 고개 [ 1 ]

KOREA ?

미국이란 나라야 워낙 많은 전쟁에 참전하였으므로 웨스트포인트 같은 군사교육기관에서 전사를 가르칠 때 자국이 참전 하였던 전투사만 가지고도 Case Study 로 공부 할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강사가 바뀌어도 반드시 토론하고 넘어가는 전투가 있는데 바로 1950년 7월 경기도 오산부근에서 있었던 죽미령 전투 Battle of Osa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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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육군사관학교의 행사 모습 ]

 

그 이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기습을 당하여 머리에 혹이 난 전투가 아니라 적과 교전을 충분히 예견하고 아니 준비하고 전투를 벌였음에도 코피가 터졌던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후 정확한 정보도 없이 무조건 상대를 얕잡아 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 이었던가 하는 뼈아픈 교훈을 미군에게 깨닫게 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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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눈물을 흘린 죽미령 전투는 미군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

 

The Army either learns from its history or runs the risk of repeating past mistakes on some future battlefield.  This is what General (Retired) Gordon R. Sullivan meant when he said repeatedly throughout his tour as Army Chief of Staff: " No more Task Force Smiths. "
 
미 육군 전사에 나와 있는 일부 내용인데, 두고두고 그 교훈을 얻고자하는 그들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1950년 죽미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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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미령에서 바라 본 수원의 모습 ( 1950년 7월 ) ]

 

서울을 북한에게 내준 후 한강에 방어선을 펼치고 교전하던 국군을 한국까지 직접 날아가 둘러본 맥아더는 미 정부가 1950년 6월 30일 지상군 투입결정을 내리자 지체 없이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한국과 가장 가까운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을 출동하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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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는 미 24사단의 참전을 지시합니다
( 1950년 6월 29일 시흥에 임시 설치 된 육본을 방문한 맥아더 ) ]

 

지금도 그렇지만 사단 급 부대가 이동 전개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투 준비가 완료된 부대의 국내 간 이동도 쉬운 것이 아닌데, 하물며 아무런 사전 준비도 하지 않은 부대가 아무리 대한해협 정도의 좁은 바다라 하여도 전투에 투입 할 준비를 갖추어 이동하는 것이 명령만 내린다고 즉각 이루어 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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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슈에 주둔 중이던 미 24사단이 제일 먼저 한국전에 참전합니다 ]

 

때문에 미 8군은 24사단을 34연대, 21연대, 19연대 순으로 7월 2일 ~ 7월 4일 사이에 부산에 상륙시키기로 하고,  우선 급박한 전황을 고려하여 선발대를 보내기로 합니다.  출동명령을 받은 24사단장은 사단 내에서 가장 정예인 21연대 제1대대를 선발대로 결정하고 여기에 105mm 곡사포 1개 포대를 증강시켜 대대장 스미스 ( Charles B. Smith 1916~2004 ) 의 이름을 따 Task Force Smiths ( 이하 TF Smiths ) 을 편성하여 7월 1일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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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편으로 이동 준비 중인 TF Smiths ]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미군이 앞으로 상대하여야 할 북한군이 어느 정도의 병력과 장비를 갖춘 군대인지 ? 어떤 전술작전 능력을 갖추었는지 ?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형은 어떤지 ? 도대체 아무런 사전 지식과 준비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KOREA ? 였던 것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2 ]

 

건방의 콧대 하늘을 찌르다

제2차 대전에 참전하였던 경험과 노하우가 있어 미 24사단 내에서 TF Smiths 의 차출 동원은 거의 하루 만에 완료되었을 정도로 신속히 이루어졌으나 명령을 내린 미 극동군사령부, 미 8군사령부 그리고 미 24사단의 어느 지휘부도 막상 TF Smiths 가 싸워야 할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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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북한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 1948년 북한군 창설식 모습 ) ]

 

당시 미 극동사령부가 어렴풋이 파악한 한국전 개전 직후 북한군의 규모를 단지 보잘 것 없는 구식장비로 무장한 7만 명 병력의 4개 사단 정도로 오판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참전하면 지레 겁을 먹고 곧바로 전쟁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최초 동원될 미 24사단이면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충분히 늦출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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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정보 당국은 북한군을 전형적인 후진국군대로만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

 

맥아더가 최초 세운 작전계획은 미 24사단이 일단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늦추면 후속하여 출동 할 미 25사단 예하 27연대전투단으로 하여금 차령산맥 ~ 금강 ~ 소백산맥을 연하는 선에서 전선을 고착화시키고, 해병대미 1기병사단을 7월 22일경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을 협공하여 7월 말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TF Smiths 가 할일은 24사단 본진이 도착하기 전에 북한군 선봉을 타격하여 미군의 존재감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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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을 직접 시찰하였던 맥아더조차도 처음에는 전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

 

일본 이다스께 비행장에서 모여 부산으로 날아가기 위해 준비하던 Smith 중령에게 내린 명령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가라.  그리고 사단과 연락을 취하라.  만일 연락이 되지 않으면 대전에서 가능한 더 북으로 전진하라.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 였습니다.  한마디로 최대한 전선으로 달려가 알아서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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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열차편으로 대전역에 도착한 TF Smiths ]

 

TF Smiths 를 후속하여 본진으로 투입 될 34연대도 기껏해야 며칠동안 한국에서 머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 한국에 북한군이라는 것이 쳐들어온 것 같다.  훈련도 부족하고 무기를 가진 자는 반수밖에 되지 않으니 힘 안들이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며, 머지않아 귀환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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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 도착한 34연대 본진, 이들도 아무 생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명령을 내린 상급 지휘부나 제일 먼저 실전 투입된 TF Smiths 도 한마디로 자만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 할 때도 미군은 너무나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불과 5년 전에 유럽의 나찌와 태평양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여, 이들을 모두 격멸하고 전후 세계 질서를 이끌어 가고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핵폭탄이라는 필살기를 보유 한 유일무이한 국가의 군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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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들은 앞으로 이런 모습만 있을 것으로 당연시 하였습니다 ]

 

하늘을 찌르는 그들의 드높은 콧대는 미군의 모습만 보면 미개한 북한군이 겁을 먹고 알아서 도주할 것이고 그다음은 오늘날의 평화유지군처럼 전쟁이전의 상태로 복구 될 동안 단순히 치안활동만 할 것으로 여기고 있을 만큼 전투의지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의 군대를 훈련이 부족한 미개한 군대라고 스스럼없이 평가하였지만 제2차 대전 후 변모한 그들 스스로의 모습은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3 ]

늙은 사자
 
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 대전의 승자라는 것이 두말없는 잔소리 일만큼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강력한 적들과 맞서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짧은 것 같지만 5년이라는 세월은 그만큼 강력했던 미군이 늙은 사자로 전락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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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비슷한 구도의 대전역 TF Smiths 사진이 두 컷 ( 한 컷은 전편에 인용 ) 이 있는데

두 사진 모두 전쟁에 참여 했다는 긴장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나 군대가 갑자기 몰락하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최고의 국력을 보유하였고 종전 후 감군을 단행하여 병력과 장비가 대폭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미군이 보유하거나 예비한 장비는 여전히 세계최강이었습니다.  오히려 질적으로 좀 더 최신 무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필살기인 핵무기는 아직까지 미국만이 제식화한 보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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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와 군비만 놓고 본다면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대국이었습니다 ]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미군 병사들의 질은 한마디로 형편없었습니다.  종전 후 상당수의 베테랑들은 군대를 떠났으며,  전후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점령지나 요충지에 점령군으로써 주둔한 미군들은 대부분 전쟁을 전선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풋내기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사병으로 내려 갈수록 그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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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테 정글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한 미 24사단
그러나 이러한 전과는 이미 머나먼 선배들의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이들은 지옥의 전선에서 고생하였던 선배들의 노고 덕분에 마치 해외여행을 온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 아늑한 해외 기지에서 점령군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경우는 오늘날 이라크와는 달리 반항은 커녕 고분고분한 양처럼 미국에 절대 순종하여 이곳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경계를 갖추거나 열심히 훈련 할 필요조차 느끼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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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주둔 미군기지 인근의 위락시설 지대, 마치 휴양지의 안내 표지판 같습니다 ]


점령군들이 던져주는 생필품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배고픈 일반시민들과 미군만 보면 달러를 얻기 위해 나긋나긋하게 구는 여인들이 줄서 있는 일본에 배치 받은 젊은 신참 병사들에게는 군대가 더 할 수 없는 파라다이스였습니다.  이런 병사들이 훈련이 잘 되어 있거나 군기가 확립 되었다는 것은 애시 당초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들의 총은 녹슬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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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 밖에는 달러를 원하는 젊은 여인들이 줄 서있었고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전쟁의 경험이 있던 간부들조차도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평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감히 나찌와 일본을 물리친 우리에게 대들 놈들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자만감에 가득 차 있었고, 냉전의 경쟁상대로 서서히 떠오르는 소련조차도 미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독일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하였을 하류 국가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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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 미국은 추축국들을 패망시켰습니다 때문에 자신감이 너무 넘쳤습니다 ] 

 

그러한 미군에게 평생 들어 보지도 못한 KOREA 라는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군이 앞으로 상대하여야 할 적이 북한이라는 사실은 한마디로 관심 밖의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이런 들어 보지도 못한 나라의 삼류군대가 세계 최강의 미군이 참전 하였다는 말만 들으면 당연히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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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당연히 이런 일만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들 스스로 방임하여 나태하여 왔고, 또한 너무 자만심에 가득 차 상대를 우습게 알아 사전 정보나 준비도 게을리 하고 전쟁에 무작정 뛰어든 결과가 얼마나 참담하고 비참하였던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싸울 능력이 퇴화한 늙은 사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TF Smiths 가 제일 먼저 하이에나 굴속에 뛰어 들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4 ]

 

당나라 부대의 자만심

7월 1일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TF Smiths 는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이런 환영에 고무되어서인지 마치 승자들처럼 으쓱대며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이동합니다.  TF Smiths 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을 막기 위해 7월 5일 방어선을 구축한 곳은 경기도 오산북방 4Km 지점에 있는 죽미령을 중심으로 하는 나즈막한 능선지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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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F Smiths 는 죽미령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합니다 ]

 

죽미령은 오산 북방 경부 축선에 있는 90고지와 117 고지 사이의 고개 길로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로가 지나는 천혜의 교통로이기 때문에 북한군 주력의 진격로로도 뻔히 예견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만일 이곳에서 북한군 선봉부대를 차단한다면 전진 배치 중에 있던 미 24사단 본진이 금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 할 시간을 확보 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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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F Smiths 의 배치와 더불어 미 24사단 본진이 부산에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

 

이 시점에 미 24사단은 부산으로 상륙을 완료하여 제34연대가 평택~안성선으로, 제21연대는 대전으로, 제19연대는 대구를 목적지로 하여 각각 이동 전개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첨병으로 출동한 TF Smiths 도 그랬지만 미 24사단 후속부대들도 미군이 참전만 하면 북한군은 즉시 전쟁을 포기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만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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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 상륙한 미 24사단 본진은 연대별로 이동전개에 들어 갑니다 ]

 

부대장 Smith 중령은 B중대를 죽미령 양측의 90고지와 117고지에,  C중대를 인근 92고지에 배치시키고 6문으로 구성된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습니다.  제52포병대대에서 차출된 포대는 모두 120발 포탄을 휴대한 체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그 중 5번포 1문을 대전차용 고폭탄 6발과 함께 보병과 포대 사이의 중간지점에 전진 배치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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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F Smiths 방어진지 후방에 포대가 방열을 완료합니다 ]

 

TF Smiths 는 비가 내리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즉각 진지구축에 들어갔지만 해 뜰 무렵까지 완료하지는 못하고 다만 보병화기의 시험사격과 포병의 기점사격만을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앞으로 마주칠 적에 대한 어떠한 정확한 사전 정보도 없었고, 후방 지휘부와의 통신, 보급 및 공중지원과 같은 준비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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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장 Smith 는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로 적과 상대하여야 했습니다
( 198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하였을 당시의 모습 ) ]

 

그런데 이들 뒤에 전개하느라 정신이 없던 미 24사단 본진 또한 TF Smiths 를 지원 할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만에 하나 TF Smiths 가 위험에 빠질 경우 이들을 도울 준비나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국군 당국으로부터 간간히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를 진지하게 정보화하여 참고하기는커녕 후퇴하는 모습을 조롱하기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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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터에서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배식을 받는 모습입니다
도대체 군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당나라군대의 전형입니다 ]

 

미 24사단 본진도 TF Smiths 도 모두 너무나 안이하게 전장 한가운데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북한군의 전차를 저지할 목적으로 대전차용 고폭탄 6발을 준비한 105mm 곡사포 1문을 비롯하여 4문의 75mm 무반동총과 6문의 2.36’ 로켓포를 준비하였지만 전술적으로 후속대처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적을 깔보지 않고는 할 수 없었던 무모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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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북한군 선도 전차부대의 T-34 들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

 

드디어 7월 5일 07:00경 한강을 도하하여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 주력 제105땅크사단 예하 107땅크연대 소속 전차 8대가 제4사단 18연대 소속 정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죽미령을 향하여 1번국도로 남진하는 것이 관측 됩니다.  이런 북한군을 뻔히 쳐다보면서도 TF Smiths 는 아직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합니다.  선제공격을 가하고 이곳에 미군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 될 것으로 생각 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5 ]

 

우리는 미군이다

북한군 선두가 죽미령 1.8km 까지 접근하자 수청리에 방열하여 있던 105mm 포대가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한반도에서 미군과 북한 사이의 최초 교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탄들의 정확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선두의 전차는 전진을 계속하였습니다.  미개하다고 생각한 북한군의 탱크는 당시 미군의 주력이던 M-4 전차를 훨씬 능가하는 소련제 T-34 Type 85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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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T-34는 당대 최고의 전차였습니다 ]

 

제2차 대전 말기 당시 미군의 전차는 독일과 비교하여 대부분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반면 소련의 T-34는 Tiger 전차 정도에나 열세였지 여타 독일의 전차들을 충분히 압도하였습니다.  즉,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명품으로 현재의 전문가들도 당대 최고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2차 대전 때 같은 연합국이었던 미군이 이 전차와 전장에서 맞붙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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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미군은 T-34 와 상대해 본 경험은 없었고 그 만큼 성능을 몰랐습니다 ]

 

포대의 집중사격으로 인한 뿌연 포연을 뚫고 북한의 전차들이 돌진하여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아직도 미군 병사들은 T-34 의 진정한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차가 보병진지 전방 600m 부근까지 다가왔을 때 자신만만하게 75mm 무반동총으로 전차를 공격하였으나 적 전차는 가볍게 포탄을 튕겨내고 주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죽미령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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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mm 무반동포의 공격이 있었지만 T-34는 가볍게 튕겨내고 전진을 계속합니다 ]

 

전차가 보병진지 10m 바로 앞까지 거침없이 도달하자 대전차전 노하우가 있어 그래도 국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차에 대한 공포감이 덜하였던 미군 2.36 " 로켓포 사수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서 전차 궤도 및 후미의 취약부분을 가격하였으나 이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을 뿐 이었습니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적 전차부대와 처음 교전 하였을 때 당하였던 T-34 의 공포를 미군도 서서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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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근거리에서 2.36 " 로켓포의 공격이 있었으나 역부족 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때까지도 미군의 오만함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전사에 나와 있는 한 대목 입니다.  북한군 전차가 진지를 돌파하면서 미군들을 무시하듯 통과 하자 미군 중사가 외쳤다.  " 야 이놈들아 !  우리는 한국군이 아니다.  우리는 미군이다 ! "  그들은 자신들이 미군인 것을 모르는 북한군이 건방지게 공격을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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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전차가 진지를 간단히 돌파하였음에도 미군은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 

 

선두 T-34 전차가 보병진지를 지나 죽미령 정상에 도달하자 미리 조준하고 있던 105mm 5번포의 직사사정권내 들어오게 되었고 5번 포가 대전차고폭탄 공격을 가하여 처음으로 선두전차 2대의 궤도를 끓어 기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후속하던 6대의 적 전차는 기동이 저지된 전차들을 길옆으로 밀어내고 모두 죽미령을 통과하여 후방 수청리에 방열하였던 포대 쪽으로 급속 돌파하여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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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두 전차가 기동력을 상실했지만 후속전차의 진격은 계속 됩니다 ]

 

고개의 보병들과 전진 배치된 5번 포가 적전차를 격멸하였을 것으로 믿고 유유자적 하면서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수청리에 방열하고 있던 포병들은 적 전차가 포진지 전방에 갑자기 출현하자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지를 이탈하여 도망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적의 전차가 눈앞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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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은 뒤늦게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다만 불행 중 다행이었는지 적 전차부대가 포진지를 정확히 발견하지 못하고 모두 오산을 향하여 진지를 지나쳐 속도를 더해 급속히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이틈을 타서 겨우 부대를 재정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수습된 부대원들은 이미 공포에 떨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지금까지의 자만감만으로 이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6 ]

학살만 면한 참패

 

선두 전차부대의 공격이 있은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11시경 전차 3대를 선두로 한 차량 행렬과 더불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보병부대로 구성된 적 주력이 죽미령을 향하여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진지 속에 숨어서 가한 일제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전차가 유유히 고개를 통과하여 오산으로 진격하는 것을 쳐다만 보았던 TF Smiths 의 대원들에게 아침까지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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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이 있고 4시간 경과 후 드디어 북한군 본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수적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엄청난 적들과의 교전을 앞두게 되자 미군 병사들은 겁에 질려가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4사단 18연대 병력이 진지 앞 600m 까지 다가오자 대대장 Smith 중령은 부대원들에게 일제 사격명령을 내려 도로변을 따라오던 적의 대오를 향하여 화력을 집중합니다.  기습을 받은 북한군은 즉각 산개에 들어갔는데 북한 보병들의 신속한 대응은 미개한 후진국의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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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즉시 산개하여 능선의 좌우로 치고 들어옵니다 ]

 

그들도 4시간 전에 죽미령을 통과한 선두 전차부대처럼 정확한 훈련에 의거 부대를 산개하여 방어진지를 향하여 차츰차츰 공격망을 순식간에 압축하여 들어왔고, 일부 부대는 병력을 우회시켜 죽미령 좌우로 분산하여 동시에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상태라면 굳이 예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고지 위의 미군들은 철저하게 포위당하여 몰살당할 모양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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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고지에서 바라 본 죽미령 능선, 이곳에 일렬로 방어선을 펼쳤던
TF Smiths 는 산개하여 공격을 가하는 북한군에 서서히 포위되었습니다 ]

 

북한군 보병부대를 호위하던 선두의 전차가 죽미령 방어진지 앞 200m 까지 다가와 전차포와 기관총사격을 가하면서 중앙을 돌파하고 동시에 고지를 우회하여 침투한 북한 보병들이 방어진지를 좌우에서 포위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당황한 미군들이 격렬한 저항을 하였지만 약 1시간이 지나자 TF Smiths 좌익의 B중대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우익 C중대도 같은 위험에 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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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 전 상상하던 이런 모습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어 부대 전체가 순식간 와해 될 상황에 놓이자 Smith 중령은 철수를 결심하고 순서에 따라 포위망이 뚫려있는 92고지를 경유하여 남쪽의 오산 방향으로 중대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들은 병력 수, 화력은 물론이거니와 병사의 질과 훈련에서도 북한군에 뒤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뒤에는 증원군도 없었고 당연할 것으로 믿었던 항공지원도 기상상태로 인하여 기대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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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간의 전투 만에 TF Smiths 는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죽미령에서 철수 하던 TF Smiths 는 능선 아래 東 측방에 매복하였다가 나타난 적의 기습에 병력이 분산되고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많은 인원, 장비의 손실을 입는 치욕적인 마지막 일격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지리멸멸 하여 안성을 거쳐 잔여 부대원들이 천안에 집결했을 때 총 540명으로 구성 되었던 TF Smiths 의 손실은 전사 120명, 포로 및 실종 36명 그리고 150여명의 부상자와 더불어 모든 중화기는 완전히 유기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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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북한군이 미군의 2배 규모인 1,100 여명 수준에 전차까지 보유하였지만  
미군이 고지를 선점하고 있어서 병력이 적다고 방어에 불리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죽미령에서 바라 본 수원방향인데 관측도 편하고 적의 제압에도 유리한 지형입니다 ]

 

비록 적 사살 42명, 부상 85명, 전차 4대 파손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자신만만하게 참전하였던 결과에 비하면 수모 그 자체였습니다.  6시간 만에 처참하게 박살난 TF Smiths 는 그들이 어떠한 패배를 당하였는지 확인 할 시간도 없이 미 24사단 34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천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그 동안 한심하다고 손가락질 하던 국군이 보조를 맞춰 함께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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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으로 가는 도중 후퇴하는 국군을 한심스러운 듯 바라보던 TF Smiths
하지만 그들도 6시간의 전투를 끝으로 이 대열에 동참합니다 ]

 

미군의 바램 (?) 대로 죽미령 전투는 북한군에게도 미군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북한 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는 후에 낙동강전선에서 포로가 된 후, "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들은 바도 없었으며, 오산에 미군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 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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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학구 ( 뒷 좌석 ) 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이 미군의 신속한 참전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으나
오히려 초전에 미군을 쉽게 제압하여 미군도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

 

하지만 이학구의 증언처럼 예상외로 빠른 미군의 참전에 북한이 놀라기는 하였지만 미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 전쟁이전의 상태로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이 알아서 도망 갈 것이라는 것은 단지 미군만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TF Smiths 죽미령전투는 미군들이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였던 악몽의 6시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앞으로 계속 될 참담한 앞날의 암울한 시작이었을 뿐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굴욕의 고개 [ 끝 ]

 

대참패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천안에 방어막을 막 설치하고 적을 기다리던 미 24사단 예하 제34연대는 미군의 선봉인 TF Smiths 의 참담한 패배 소식을 접하자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사단장 ( William F. Dean 1899~1981 ) 소장은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34연대장을 자신이 심임하고 있던 마틴 ( Robert R. Martin 1918~1950 ) 대령으로 즉각 교체시켜 현지로 급파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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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으로 이동전 워커 8군 사령관 (左) 과 환담하는 딘 24사단장 
자신만만한 모습이지만 가장 치욕스런 장군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전개를 마친 34연대가 전투도 치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연대장을 경질하고 부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조차 없는 인물을 신임 연대장으로 바꾼 것은 사실 올바른 지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34연대장으로 막 도착한 마틴은 행사장에 나온 것처럼 정복에 단화를 신은 상태로 부대지휘에 나섰습니다.  이 또한 결론적으로 북한군을 우습게 생각한 만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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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연대가 TF Smiths 의 전철을 되밟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천안에서 대패하고 허겁지겁 철수하는 34연대 ) ]

 

이러한 제34연대가 TF Smiths 의 전철을 되밟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북한군의 숨쉴 틈 없는 호된 공격에 연대가 급속히 붕괴되자 살아남은 나머지는 알아서 사단이 있는 대전으로 줄행랑치기 바빴습니다.  그 결과 미 제34연대는 80%의 손실을 보고 부대가 해체되었는데 전쟁 끝까지 재건되지 않고 해체된 유일한 연대라는 불명예를 가지게 되었고 마틴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연대장이 되어 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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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연대도 피눈물을 흘렸으나 미군의 망신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

 

하지만 제19연대를 주력으로 하여 대전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던 미 24사단의 수모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예상외로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자 딘 사단장은 급거 제19연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대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산의 TF Smiths 나 천안의 제34연대와 마찬가지로 전차를 앞세운 돌파와 북한군의 능수능란한 우회 포위 전술에 휘말려 위기에 빠져드는데 그리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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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전방어에 나선 19연대 ]

 

제34연대의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정신을 가다듬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에 저항하였으나 7월 20일 대전을 포기하고 옥천으로 후퇴하여 영동으로 진출하고 있던 미 1기병사단의 구원을 받고나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단장 딘 소장이  전투 중 실종되어 적의 포로가 되어 휴전 후에야 겨우 생환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미 24사단은 전사에 길이 남는 대참패를 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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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으로 진입하는 북한군 ]

 

딘 소장은 유럽전선에서 1944년 12월부터 종전까지 미 44사단을 지휘하였는데 당시 적의 포로가 된 부하가 불과 42명뿐이었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고 군인이 포로가 되어 적의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미군 역사상 적에게 가장 많은 포로를 만들어 준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본인도 포로가 되는 생애 최악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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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의 특공 구출작전이 있었지만 실패하고 딘 소장은 휴전 후 생환할 수 있었습니다 ]

 

한국에 처음 왔을 때 16,000명의 병력과 4,800대의 차량을 보유했던 미 24사단은 7월 5일 TF Smiths 의 오산전투를 시작으로 7월 21일 옥천전투에 이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7,000명의 병력과 장비의 60% 를 잃었습니다.  오만에 가득 차서 적을 깔보고 전장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이었는지 미군은 똑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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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을 격파하고 대전점령 후 자신만만하게 낙서를 하는 북한군의 모습 ]

 

결국 상황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판단한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 교두보를 구축하고서야 적의 진공을 막아내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고도 기존의 국군병력에 무려 3개 사단의 미군을 긴급투입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미군은 전쟁이 결코 네임밸류만 가지고 손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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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적으로 방어선을 축소한 측면도 있지만 그 만큼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진실을 망각하였던 미군은 죽미령에서부터 겪었던 치욕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각종 교육 등을 통하여 반복하여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육관중 하나인 워싱턴 홀 ( Washington Hall ) 에 가면 미 육군이 참전하였던 기념비적 전투를 그려 넣은 스테인드글라스화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죽미령 전투 Battle of Osa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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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홀의 스테인드글래스 ]

 

전투를 벌이기전 가장 기본적인 상대 정보의 획득, 전투 지속능력 확보, 거기에 더해서 평소의 훈련과 군기의 확립 등 너무나 많이 알려진 승리를 위한 당연한 요소들을 망각하고 상대를 깔보아 개망신을 당한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그들의 각오라고 합니다.  자랑스러운 승전이 아닌 이런 악몽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미군 당국의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우리 또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듯싶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