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5 ] ~ [ 8 ]

淸山에 2013. 7. 15. 07:31

기**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5 ]

 

바뀌어 버린 전쟁터

소규모로 출현한 중공군을 처음 격퇴하였을 당시만 해도 유엔군 최고사령부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중국 당국이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참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지만 한마디로 공갈포로 여겼습니다.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낸 신생 후진국이 전쟁에 뛰어든다는 자체가 힘들어 보였고 만일 참전한다 해도 생색용으로 소수의 부대만 형식적인 참전을 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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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참전을 그다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더구나 중공군이 최초 출몰한 곳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국군의 담당 지역이다 보니 중공군의 위협을 미군은 더욱 체감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국군이 패배의 핑계를 대기 위해 중공군의 위협을 너무 과장하는 것으로 판단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가장 대표적 예가 북진 경쟁을 벌이던 미 1기병사단이 중공군에 걸려 국군 1사단이 주춤하자 이를 선두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무작정 앞으로 나가다 봉변을 당한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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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1사단과 북진 경쟁을 벌였던 미 1기병사단의 평양 인근 전투 모습 ]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서부전선 우익의 국군 2군단이 담당하던 덕천-영천선이 돌파될 위협을 받게 되자, 미 8군의 예비로 군우리 인근에 배치되어 있던 터키 1여단이 틈새를 메우기 위해 덕천으로 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진격을 개시하자마자 터키군은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부딪쳐 현 진지를 고수하기 바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미 적들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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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

 

진격을 멈추고 중간에서 저지 진지를 편성하며 중공군의 반격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이미 적들은 배후를 치고 들어와 터키군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습니다.  소방수로 나서기 위해 출동하였던 터키군은 오히려 와원 협곡에 갇혀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당할 위치였고 자칫하면 부대의 보존마저 어려운 중대한 위기가 닥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신화는 위기 속에서 쓰여 지는 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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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이 저지선을 편성하며 중공군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

 

사실 터키군이 최초로 실전에 돌입하였던 군우리 전투는 터키군에게만 시련은 아니었고 서부전선 전체에서 동시에 벌어진 피 말리는 사투의 현장 중 하나였습니다.  이른바 중공군의 2차 공세로 불린 이번 공격은 미 8군이 관할하던 전선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공세였고 한마디로 누가 누구를 도와 줄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국군 2군단의 위기는 그야말로 급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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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익의 국군 2군단이 붕괴되면서 배후가 차단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

 

당시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8군은 좌측에 미 1군단, 우측에 국군 2군단을 세워 북진하고 있었는데 만일 국군 2군단이 일거에 붕괴되면 전선 중앙에 커다란 돌파구가 생기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곳으로 진출한 중공군이 우회하여 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다면 엄청난 비극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마치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가에 매몰되어 있던 북괴군 주력이 배후를 차단당하여 산산조각 나기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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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이 돌파하여 배후를 차단한다면 엄청난 위기가 닥칠 수 있었습니다 ]

 

사태가 이러하자 각개 부대들은 전선 재조정을 위해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때 군우리의 협곡으로 빠져나오려던 부대가 미 2사단이었습니다.  10월말 까지만 하여도 전쟁 종결 후 제일 먼저 철수할 부대로 예정되었던 미 2사단은 협곡 안에 포위당하여 순식간 궤멸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예비였던 터키 1여단도 스스로의 생존을 도모하기 힘들만큼 위험한 지경이어서 결국 미 2사단은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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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이 탈출 길에 오릅니다 (후퇴 전 군우리에서 숙영 중인 미 2사단) ]

 

진퇴양난에 빠진 미 2사단은 20여 킬로미터에 걸친 군우리~순천 사이의 계곡 길 양편 고지를 점령한 중공군에게 계속 몰매를 맞으며 퇴각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인디언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통로를 만들고 그 사이로 포로를 걷게 하면서 린치를 가하는 모습과 유사하다하여 전사에 인디언태형(苔刑)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미 2사단의 상징은 인디언 헤드(Indian Head)였습니다.  바로 그때 작은 기적이 벌어집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6 ]

다시 등장한 突厥 전사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던 터키 1여단이 예상을 뒤엎고 붕괴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착검을 하고 중공군 진지로 달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불리한 상황 임에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의 모습에 중공군은 당황하였습니다.  그만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의외의 역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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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은 착검을 한 후 진지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

 

중공군이 심리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던 꽹과리나 피리소리도 터키군이 소리 높여 암기하는 코란의 기도문을 압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전의를 상실하여 우왕좌왕 하는 미군과 달리 터키군은 극렬하게 중공군 진지를 파고들어왔고 이러한 예기치 못한 역습에 중공군은 순식간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결국 등 뒤에서 나타난 터키군을 상대하려 중공군은 군우리 협곡에 갇혀있던 미 2사단에 대한 공격을 늦추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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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치 못한 터키군의 돌격에 중공군은 당황하였습니다 (군우리 전투 당시의 터키 1여단) ]

 

돌파구를 열려던 터키군은 엄청난 사상과 피해를 입으며 전술적 패배를 당하였지만, 중공군 제38군에게 예상 외의 타격을 입혀 다음 공격을 무려 5일간이나 지연시켜버리는 엄청난 전략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비록 미 2사단이 부대해체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인 50퍼센트 이상의 손상을 입었으나 터키 1여단의 분투로 얻은 시간을 이용하여 완전히 붕괴되는 비극은 간신히 피하였고, 아군은 12월 1일 평양으로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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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 전투의 격전 후 부하들을 격려하는 타흐신 야지즈 준장(上)

손자인 알리 야지즈 중령이 2009년 육군대학에 유학을 와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

 

이 전투로 10월 25일 참전이후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엮어온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심리전과 산악전에 휘말려 스스로 무너지고는 하였던 미군과 한국군과 달리 터키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임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대오의 이탈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착검을 하고 앞으로 뛰어나오는 용맹한 모습을 뚜렷하게 각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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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대통령을 대신하여 부대표창을 하는 워커 미 8군사령관과 터키 1여단 야지즈 준장 ]

 

반면 이 전투 결과 터키군은 참전 유엔군 최초로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으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무서운 군대라는 인식을 아군 전체에 심어주고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부대로 첫손 꼽혔습니다.  한마디로 고대 중원을 휘젓고 다니면서 중국을 위협하던 돌궐(突厥)의 전사들이 1,300년 만에 동아시아에 다시 등장하여 중공군을 놀라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처럼 중공군은 돌궐의 후예들에게 능욕당할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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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원을 떨게 만든 돌궐(上) 전사들의 후예들이 다시 중공군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돌궐의 후예인 중국내 위그루인들은 지금도 터키와의 유대를 공공연히 강조할 정도입니다 ]

 

군우리 전투는 피아 모두에게 터키군을 뚜렷이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엄청난 손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루 빨리 후방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편하여야 했습니다.  이 전투 이후 터키군에게 쫓아다니는 전설중 하나가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함께 같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건 상관없이 항상 요구되는 지침이지만 전시에 그 만큼 지키기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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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의 단결력은 한국전쟁 모든 참전국들 중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

 

터키군은 군우리에서의 격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전술적으로 패배를 기록하였지만 대오가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지휘관이 사상을 당하면 그 다음 상급자가 차분하게 작전을 펼치면서 옆 부대와 단절이 없도록 조치하였고 더불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통신과 보급을 최대한 유지하였습니다.  터키군이 여타 참전국군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종교적인 신념과 특유의 단결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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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 전투는 끝이 아니라 터키군 신화의 시작이었습니다 ]

 

절대적인 종교적 신념과 동료에 대한 굳은 믿음은 중공군의 심리전을 이겨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중공군 참전 초기에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꽹과리 소리에 놀라 무기를 집어던지고 도망간 경우가 많았지만 터키군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총검을 휘둘렀던 결과 때문인지 몰라도 터키군은 이후에도 백병전의 왕자로 군림하였고 그렇게 신화를 한반도에 남겼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7 ]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

최초 전투에서 '미 대통령 부대표창'으로 상징되는 전과를 올리며 용맹을 떨쳤지만 반대급부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터키 본국에 전해지자 한국에 가겠다고 자원하는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전국의 위병소에 넘쳐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만큼 투르크 용사들은 자신감이 충만하였고 사상을 당한 그들의 동료와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언제고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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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본국에서는 한국으로 파병을 원하는 이들이 쇄도하였습니다 ]

 

군우리에서의 격전 후 평양을 거쳐 개성으로 철수한 터키 1여단은 12월 14일부로 미 25사단에 배속되어 김포반도로 이동하였습니다.  후퇴 중인 아군은 한강하구에서 38선을 연결하는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터키군의 김포반도 배치도 그러한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산군이 김포반도로 내습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많은 피해를 입은 터키 1여단의 신속한 재편을 목적으로 한 배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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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후퇴 직전 전선 배치도 ]

 

야지즈 여단장은 김포읍~양곡리까지를 경계로 작전 구역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쪽의 우전방 마조리에 1대대를, 좌전방 문수산에 2대대를 배치하고 운유산~운양리에 이르는 남부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여 3대대를 예비대로 남겨두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신속히 부대 재건에 나섰는데 예상대로 공산군 주공이 김포반도를 비껴가 12월 31일까지 교전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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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에 배치된 터키 1여단은 신속히 재건되었습니다 ]

 

일단 최전선이지만 후방과 다름없던 김포에서 빠르게 재편을 마친 터키 1여단은 1.4후퇴로 아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북위 37도선 일대인 평택~삼척선한강 이남까지 철수하자 김포를 떠나 경기도 남부로 준둔지를 옮겼습니다.  도깨비방망이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연이어 펼친 중공군의 세 차례 대공세에 밀려 정신없이 아군은 후퇴하여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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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남으로 후퇴하였습니다 ]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만일 이곳에서 50킬로 남쪽인 금강까지 밀려난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군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보급선이 길어진 공산군도 더 이상 지금까지의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어 일단 2월 까지 남진을 포기하고 전선을 고착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손대면 터질 것 같은 절박하였던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양측 모두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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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소개되어 텅 빈 서울에 진입하는 중공군 ]

 

워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미 8군 사령관이 된 냉철한 지휘관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지난 1950년 가을에 벌인 유엔군의 북진작전에서 교훈을 도출하였습니다.  전선을 연결하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린 북진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뼈저리게 느낀 그는 간신히 37도선 일대에 구축한 전선이 다시 무너지면 재수습하기가 어렵다고 결론내리고 반격을 준비하며 'Hand in hand, Shoulder to shoulder'를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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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의식을 떨치고 반격을 이끈 명장 리지웨이(터키군 방문 당시) ]

 

리지웨이가 아군의 패배 의식을 하루라도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조속한 반격을 결심하자 그 사이에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오매불망 복수를 염원하던 터키 1여단에게 절호의 기회가 빨리 찾아왔습니다.  터키군은 중공군을 3일간이 막아내며 명성을 얻었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어 전술적으로는 패배로 기록된 군우리 전투의 희생을 하루라도 빨리 갚아버리고 싶어, 명령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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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은 반격의 선봉에 서서 달려 나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

 

터키 1여단은 안성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반격이 개시되면 김량장을 향하여 북진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김량장을 담당하고 있던 적군은 중공군 제50군 예하의 제149사단 447연대제150사단 448연대였습니다.  한강을 건너 이곳까지 밀고 내려온 중공군은 일단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설치하고 보급이 완료된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8 ]

 

鬼神들린 전사들의 神話

 

1951년 1월 25일, 아군의 선제 포격으로 전투가 개시되었습니다.  각종 지원 화력으로 중공군의 진지를 타격한 후, 터키 1여단은 착검을 완료하고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거침없이 중공군 진지로 돌격하여 들어갔습니다.  터키군은 두 달 전 당했던 뼈아픈 기억을 설욕하고자 눈에 피가 서린 상태였고 이러한 귀신들린 돌궐용사들을 막기에 나팔과 꽹과리를 들고 설치던 중공군은 너무 허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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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검을 완료한 터키군은 적진으로 돌격하며 놀라운 복수극을 연출합니다 ]

 

밤낮 없이 계속된 3일간의 전투 결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터키군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중공군 두개 연대를 일거에 궤멸시켜버리며 김량장과 인근 요충지인 151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군우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몇 곱으로 중공군에게 돌려준 것이었는데, 터키군의 적개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151고지 전투인근에서 확인된 적 시체 중 무려 474구가 총검에 의한 전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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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의 귀신들린 돌격에 중공군은 붕괴되었습니다 (사진-태권v 님) ]

 

이 전투로 불과 두 달 만에 터키군은 두 번째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는데, 이것은 미군도 경험하지 못한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더불어 터키군의 용전에 감명을 받은 한국 정부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부대표창을 수여하였는데 이로써 터키군은 한국전쟁 최초로 한미 당국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은 부대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터키군은 '무적의 土耳其(토이기)용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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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들을 무적의 토이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

 

경이적인 놀라운 전과를 올린 김량장 전투이후 터키군은 모든 유엔군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군우리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미 2사단 구출에 앞장섰던 인연으로 말미암아 당시 상급 부대였던 미 25사단을 비롯한 미군의 터키군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맡은바 임무를 200퍼센트 이상 달성하는 무적의 부대로 인정받은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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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은 터키군의 용맹함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

 

재 반격의 선봉에서 맹활약한 터키군은 4월 초에 38선 인근의 연천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력을 회복한 중공군은 서울 재점령을 목적으로 서부전선 일대에 주공을, 그리고 중동부전선으로 조공을 진출시키면서 대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춘계 1차공세, 4월 공세라고도 불리는 중공군의 5차 공세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다시 한 번 놀라운 신화가 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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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4월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

 

1951년 4월 22일 터키군은 연천과 철원 일대를 관통하는 장승천 인근에서 좌우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를 당하며 위기를 맞았습니다.  한 밤 중에 약 6배에 이르는 중공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받아 여단의 양 측방이 돌파되었고 후방지역의 포병대대진지까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터키군은 위기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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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며 지연전을 펼쳤습니다 ]

 

전선을 축소한 전방대대들이 후방의 포병진지로 신속히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서로 유기적인 협조를 펼치면서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적을 향하여 총부리를 돌린 상태로, 서서히 하지만 안전하게 뒷걸음질 치는 모양새였습니다.  이처럼 침착한 지연전 끝에 지옥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약 10킬로 남쪽인 한탄강까지 안전하게 탈출하는 장승천 전투의 신화를 만들어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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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에 빠졌던 포병대를 구원하며 안전하게 탈출하였습니다 ]

 

막상 전선의 좌우를 돌파하여 터키군을 포위할 기회를 잡았지만 극렬한 저항에 가로막혀 퇴로를 차단하지 못한 중공군은 얻어터지며 터키군을 쫓는 형세였고 결국 따라잡지 못하고 제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치 북방의 기마민족을 평정하겠다고 초원세계에 겁 없이 원정을 갔다가 온갖 망신을 당하고 치욕을 겪었던 그들 선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같았고 반면 터키군은 돌궐의 후예로서 결코 손색이 없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