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2 ]
생존을 위한 변신
제1차 대전에서 당한 패전의 기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터키는 독일의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제2차 대전 말기까지 중립을
고수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터키를 당연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지만 터키의
중립정책은 상당히 올바른 것이어서 독일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전선이 연결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면서도 전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 독일과 터키의 관계는 돈독하였습니다 (터키군이 장비한 독일 4호 전차)
하지만 2차대전 말기까지 터키는 철저히 중립을 유지하였습니다 ]
하지만 1945년 들어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며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터키는 새로운 또 다른 위협에 서서히 노출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 후 이른바 코민테른(Comintern)으로 대변되는 것처럼 공산주의 세계화를 꿈꾸던 소련은 이번 전쟁을 결정적 호기로 잡았습니다. 그 첫째 대상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유럽 국가들이었고
이곳에 대한 소련의 위협은 날로 증대되었습니다.
[ 소련의 세력이 커지면서 터키도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용한 그림에 오류가 있습니다.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중립
유고슬로비아와 알바니아는 친소가 아니었고 스페인은 NATO회원국입니다) ]
하지만 공산주의 세계의 확대라는 표면적 모토보다 독소전에서 당한 참혹한 결과로 서부유럽과 소련 사이에 놓인 동부유럽을 소련의 완충지대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 러시아혁명이후부터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체제에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이었고, 따라서 이들과 소련 사이의 국가들을 위성국가화 함으로써 차후에 싸움이 재차 벌어지더라도 소련의 국토가
참혹하게 유린되는 것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피해가 컸던 소련은 동유럽을 완충지대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 파괴된
하르코프의 모습) ]
그러한 소련의 팽창은 국경을 인접하고 있던 터키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정분리를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회교국가인 터키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과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두 국가 간의 대립은 제정러시아 당시부터 내려온 구악이 겹친 뿌리 깊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발칸반도를 석권한 투르크에 대해서 러시아는 비잔틴제국과 그리스정교를 자신들이 승계하였다고 주장하며 계속 반목하던
사이였습니다.
[ 비잔틴을 굴복시킨 투르크와 승계자로 자처한 러시아의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
불과 50여 년 전까지 투르크의 세력권이던 발칸반도를 소련이 순식간 석권하고 앞마당으로 만들어 버리자
터키의 위협은 가중이 되었고, 이것은 전후 소련과 맞설 수 있는 유일세력으로 떠오르는 미국과 가까이 하기로 결심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그러한 일환으로 터키는 그 동안의 중립정책을 파기하고 1945년 2월 23일 대독참전선언을 하며 연합군 측에 전격
가담하였습니다.
[ 중립을 고수하다 전쟁 말기에 연합군에 가담한 대통령 이뇌뉘(Ismet
Inonu) ]
이후 터키는 철저하게 반공정책을 펼치며 친미, 친서방주의를 국가의 기본노선으로 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터키의 정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천지원수인 그리스와 동서냉전시기를 같은 편에 서게 만드는 희한한
모습을 연출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그리스는 제2차 대전 종전직후 시작 된 공산게릴라와 치열한 내전을 겪으며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발칸반도의 유일
비공산화국가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그리스 내전 당시의 피난민 ]
바로 그러한 시기에 북괴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원조에 관한
결의문'이 채택되고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의 명의로 세계 각국에 파병을 요청하였습니다. 터키는 유엔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즉각 결정하였고 그것은 한반도에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이 쓰여 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 한국전쟁에 유엔의 개입이 결정되고 터키도 이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한 터키정부의 파병결정은 터키 국내에서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심하게
반발하던 세력은 극좌 계열인 '터키평화수호자협회'였고 여기에 더해서 공화국 건국이후부터 줄곧 집권하고 있다가 최근 총선에서 제2정당으로 밀려난
'터키공화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터키 내정으로 볼 때도 한국전쟁 파병은 충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