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1 ] ~ [ 4 ]

淸山에 2013. 7. 15. 07:38

기**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1 ]

 

전쟁으로 시작 된 인연

 

최근 여러 문제점이 밝혀져 실망을 시키기도 했지만,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으로 많은 국산무기들이 개발되었고 그중 일부는 오래전부터 제식화되어 국토 방위의 중요한 일익을 담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기는 개발을 하는데 있어 많은 경제적 투자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외부에 관련한 기밀을 노출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대외 수출에 대해 정부나 기업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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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산무기의 대표주자인 K-9자주포 ]

 

설령 미국처럼 튼튼한 내수시장이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개발에 천문학적 비용의 투입이 요구되는 고가의 무기는 처음 구상 단계부터 대외 판매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기라는 물건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저렴하거나 성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일반 공산품과 달리 외교적, 정치적인 보이지 않는 여러 이유 때문에 대외 거래에 많은 제한을 받는 대표적 상품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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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무기는 판매를 염두에 두고 제작 단계부터 대외 참여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

 

즉 제품의 성능이나 가격에 자신이 있어도 생각만큼 대외 판매가 쉽지 않고, 반면 수입하고자 하는 측에서 구매를 원하더라도 쉽게 가능하지도 않은 특수한 상품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국제 무기 산업에서 후발국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무기들은 성능이나 가격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대외판매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무기뿐만 아니라 사실 일반상품도 최초의 시장개척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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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준다고 해도 살수 없는 무기들이 있습니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거대한 아시아대륙을 사이에 놓고 우리와 정반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터키는 한국의 방위산업과 관련하여 상당히 의미 있는 나라입니다.  국산 무기의 사실상 의미 있는 최초 대외 수출이라 할 수 있는 K-9자주포의 수출 건을 시작으로, 2006년 6월에는 최초의 국산군용기인 KT-1훈련기를 수출하였고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K-2전차의 구매와 관한 이야기가 끓임 없이 오고가고 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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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는 우리 방위산업과 관련하여 상당히 의미 있는 나라입니다 ]

 

물론 기술만 이전해 주고 라이선스제품의 대외수출권까지 주었기 때문에 '겉모습과 달리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냐?'라는 반론도 있지만, 몇몇 선진국들이 좌지우지하는 무기시장에서 그 정도 당근이 아니면 우리보다 힘 있고 역사가 깊은 나라의 무기를 구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august 개인적으로는 수 십 억불 정도의 커다란 거래를 성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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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9의 터키 버전인 T-155 FIRTINA ]

 

그런데 우리 또한 경협차관 변제용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입하게 된 러시아제 무기가, 최초도입 시에 상당히 말이 많았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무기라는 물건은 단지 싸고 성능이 좋고 기술이전을 하여준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뤄지지 않는 품목인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터키가 한국산 최신 무기의 주요 구매국가로 부상한 것은 그만큼 한국과의 군사적 관계가 돈독하기 때문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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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공군에 납품 된 KT-1 훈련기 ]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터키와 우리의 관계를 기원전 우랄-알타이어족간의 역사적 관계에서부터 찾는 경우도 있지만, 막상 이를 체감하기는 불가능 합니다.  실질적으로 혈맹이라 또는 매스컴 등에서 형제라고 부를 만큼 돈독한 관계가 맺어진 것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터키군이 대규모로 참전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 한국과 터키는 관계를 맺기조차 힘들만큼 지리적으로도 너무 멀리 떨어진 남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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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은 양국 관계사의 새로운 시발점이 됩니다 ]

 

혹자는 터키에서 칭하는 '형제'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적이 아닌 아무에게나 붙이는 일반적인 호칭'이므로 우리가 글자에만 매달려 너무 마음의 문을 열고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서상, 같은 적을 상대로 함께 를 흘렸다는 자체는 상당한 친밀도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동기이기 때문에 한국과 터키의 관계는 분명히 남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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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터키의 참전 사실이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

 

사실 그동안 많은, 특히 전후 세대 한국인들은 터키가 한국전쟁 때 참전하여 우리를 도와 준 고마운 나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을 계기로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경우가 많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전하여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아는 분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제부터 한반도 현대사에 남겨 진 용감한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2 ]

생존을 위한 변신

 

제1차 대전에서 당한 패전의 기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터키는 독일의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제2차 대전 말기까지 중립을 고수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터키를 당연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지만 터키의 중립정책은 상당히 올바른 것이어서 독일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전선이 연결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면서도 전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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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과 터키의 관계는 돈독하였습니다 (터키군이 장비한 독일 4호 전차)

하지만 2차대전 말기까지 터키는 철저히 중립을 유지하였습니다 ]

 

하지만 1945년 들어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며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터키는 새로운 또 다른 위협에 서서히 노출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 후 이른바 코민테른(Comintern)으로 대변되는 것처럼 공산주의 세계화를 꿈꾸던 소련은 이번 전쟁을 결정적 호기로 잡았습니다.  그 첫째 대상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유럽 국가들이었고 이곳에 대한 소련의 위협은 날로 증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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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세력이 커지면서 터키도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용한 그림에 오류가 있습니다.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중립

유고슬로비아와 알바니아는 친소가 아니었고 스페인은 NATO회원국입니다) ]

 

하지만 공산주의 세계의 확대라는 표면적 모토보다 독소전에서 당한 참혹한 결과로 서부유럽과 소련 사이에 놓인 동부유럽을 소련의 완충지대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  러시아혁명이후부터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체제에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이었고, 따라서 이들과 소련 사이의 국가들을 위성국가화 함으로써 차후에 싸움이 재차 벌어지더라도 소련의 국토가 참혹하게 유린되는 것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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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가 컸던 소련은 동유럽을 완충지대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 파괴된 하르코프의 모습) ]

 

그러한 소련의 팽창은 국경을 인접하고 있던 터키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정분리를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회교국가인 터키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과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두 국가 간의 대립은 제정러시아 당시부터 내려온 구악이 겹친 뿌리 깊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발칸반도를 석권한 투르크에 대해서 러시아는 비잔틴제국과 그리스정교를 자신들이 승계하였다고 주장하며 계속 반목하던 사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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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을 굴복시킨 투르크와 승계자로 자처한 러시아의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

 

불과 50여 년 전까지 투르크의 세력권이던 발칸반도를 소련이 순식간 석권하고 앞마당으로 만들어 버리자 터키의 위협은 가중이 되었고, 이것은 전후 소련과 맞설 수 있는 유일세력으로 떠오르는 미국과 가까이 하기로 결심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그러한 일환으로 터키는 그 동안의 중립정책을 파기하고 1945년 2월 23일 대독참전선언을 하며 연합군 측에 전격 가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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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립을 고수하다 전쟁 말기에 연합군에 가담한 대통령 이뇌뉘(Ismet Inonu) ]

 

이후 터키는 철저하게 반공정책을 펼치며 친미, 친서방주의를 국가의 기본노선으로 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터키의 정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천지원수인 그리스와 동서냉전시기를 같은 편에 서게 만드는 희한한 모습을 연출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그리스는 제2차 대전 종전직후 시작 된 공산게릴라와 치열한 내전을 겪으며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발칸반도의 유일 비공산화국가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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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내전 당시의 피난민 ]

 

바로 그러한 시기에 북괴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원조에 관한 결의문'이 채택되고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의 명의로 세계 각국에 파병을 요청하였습니다.  터키는 유엔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즉각 결정하였고 그것은 한반도에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이 쓰여 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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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에 유엔의 개입이 결정되고 터키도 이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은밀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한 터키정부의 파병결정은 터키 국내에서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심하게 반발하던 세력은 극좌 계열인 '터키평화수호자협회'였고 여기에 더해서 공화국 건국이후부터 줄곧 집권하고 있다가 최근 총선에서 제2정당으로 밀려난 '터키공화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터키 내정으로 볼 때도 한국전쟁 파병은 충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3 ]

전격적인 파병

반대세력은 파병을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들의 이유도 나름대로 타당하였습니다.  우선 섣부른 한국전쟁 개입은 터키에 대한 소련의 보복침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소련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터키와 국경을 접한 소비에트연방국가중 하나인 아르메니아가 형식상 단독으로 전쟁을 도발 할 수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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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에게 소련은 당장의 현실적 위협이었습니다 ]

 

아르메니아는 19세기 말부터 제1차 대전에 걸쳐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민족청소를 당하였다고 표현될 만큼 엄청난 학살과 탄압을 당하여 터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쁜 나라인데 지금까지도 그러한 구원(舊怨)은 계속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소련연방이 직접 나서지 않고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국지전을 벌인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중동지대는 미국과 소련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힘의 공백지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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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살 당시에 터키에게 인종 청소를 당한 아르메니아인

이러한 복수심을 이용하여 아르메니아를 내세운 국지전도 가능하였습니다 ]

 

그런데 야당이나 좌파 계열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터키정부의 파병결정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했던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련의 위협 때문'이라는 반대세력의 논지와 같았습니다.  비록 제2차 대전말기부터 친서방정책을 천명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터키의 일방적인 구애상태였습니다.  현재도 유럽은 터키를 EU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할 정도로 경원시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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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터키를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나서야 반대급부로 미국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터키를 보호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터키가 서방의 일원임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전쟁에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 만한 대안이 없다고 당시의 위정자들은 파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언론 또한 정부의 한국전쟁 파병 결정을 터키의 안보를 담보로 제공받기 위한 것임을 적극 선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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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은 터키의 안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

 

당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극동에서 벌어진 북괴의 남침을 곧 소련의 침략으로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참전을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참전결정이 공산주의에 맞서는 터키인들의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열광하였습니다.  정부의 결정에 국민들의 지지가 이어지자 일부 정치 세력의 반대에도 파병준비는 척척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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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지지로 파병이 진행되었습니다 (1944년 훈련 중인 터키군) ]

 

정교가 분리된 세속주의 국가임에도 당시 종교부 장관이었던 악세키(Ahmet Hamdi Akseki, 1887~1951)는 "신앙심만이 공산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고, 터키인의 한국전쟁 참전은 聖戰(Cihad)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만일 전사한다면 순교자로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열정 때문인지 미국은 이후 군사적, 경제적으로 터키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고 이후 터키는 NATO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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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참전이 지하드임을 선언한 종교부 장관 악세키 ]

 

엄밀히 말해 터키는 한국의 자유 수호라는 명분보다 궁극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실리적인 방편으로 파병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실리만 추구하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파병을 미적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자원자들로 파병병력을 모집하였는데 전군에서 지원자가 쇄도하였습니다.  당시 터키는 18개월의 의무병제도였는데도 제대를 앞둔 현역까지도 지원에 나섰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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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한 터키군들은 전원 자원자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

 

많은 지원자에 고무 받은 터키정부는 지상군 1개 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미국과 영국 다음의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터키군의 출발이 조금 늦었다면 여타 파한 국가들처럼 부대의 규모가 축소되었을 가능성도 컸습니다.  당시 여러 나라들이 한국에 파병을 결정하였을 때만 해도 아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파한 터키군이 부산에 도착할 즈음인 1950년 10월이 되자 미군도 병력 증파를 조절하였을 만큼 상황이 반전되었기 때문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투르크 용사들의 전설 [ 4 ]

미지의 세계에 도착한 용사들

 

터키군은 1950년 8월 3일 제28사단 예하 241연대와 제2기갑여단 예하 2포병대대를 주축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한 후 제8군단 예하 4관구에서 공병, 의무 등의 지원부대를 차출하여 불과 1개 월 만에 파한 터키 제1여단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신편 부대는 9월 13일까지 각 병과별로 보충교육을 실시하였으나 탄약이 부족하여 실탄사격 훈련은 하지 못했고 대신 한국에 도착한 후 미군의 지원을 받아 현지 적응 훈련을 실시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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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 편성을 완료하고 한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의 모습 ]

 

총 5,455명으로 편성된 여단은 한국으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9월 14일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집결을 완료하였고 25일 제1대대를 시작으로 미지의 세계인 극동의 한국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면 대대별로 출발일이 달랐는데, 그것은 수송수단의 부족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에즈운하를 거쳐서 가는 최단 항로를 택하였지만 20일이 넘게 걸리는 말 그대로 대항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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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으로 향하는 병사를 전송하는 가족의 모습
자원하였지만 전쟁터로 보내는 심정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

 

3개 보병대대와 1개 105밀리 곡사포대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구성된 파한 터키 제1여단은 1년마다 부대를 교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대원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와 병력을 전면 교대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후 1951년 11월에 제2여단, 1952년 11월에 제3여단이 교체되어 차례차례 한국에 파견되었는데, 이들 제1, 2, 3여단이 한국전쟁에 실전 참전한 터키군 부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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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도착 직후의 터키 제1여단 장병들 ]

 

최초 파견된 제1여단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갈리폴리전투와 터키독립전쟁에도 참전한 경력이 있던 제2기갑여단장 야지즈(Tahsin Yazici, 1892~1971) 준장이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혈기왕성했던 참전과 달리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종결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터키 1여단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 17일이었는데 터키 출발 당시와 전쟁의 상황이 완전히 바뀐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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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제1여단을 이끌었던 야지즈 부대장

아들의 증언처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

 

이때는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유엔군이 북한의 심장인 평양을 점령하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늦어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완전히 종결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을 만큼 모든 것이 낙관적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점에 한국에 도착한 터키군이 할 일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망이 좋아도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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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착 직후 전황은 낙관적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

 

부산항에 도착 후 1여단은 20일 대구로 이동하여 현지적응훈련을 마친 후,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최초 대구-대전 간 경계를 시작으로 연이어 유엔군의 북진속도에 발맞추어 문산-개성간의 후방지역 경계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만일 당시에 유엔군의 북진통일로 전쟁이 끝났다면 터키군은 이라크 평화유지군으로 활약한 자이툰부대처럼 점령지의 치안임무를 수행하는 민사작전에 주력하다 철군하였을지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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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터키군은 평화유지활동만 하다가 철군하였을 것입니다 ]

 

하지만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대규모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통일의 꿈을 무산되었고 한국전쟁은 거대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며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후방에서 공비 소탕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1여단은 미 제8군의 예비로 전환되어 11월 하순에는 전방지역으로 급거 이동 전개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만큼 당장 한 명의 병사도 아쉬웠을 만큼 전선의 상황이 급속히 나빠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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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으로 향하기 위해 열차에 오르는 터키군 ]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이 내리는 11월이 되자 전선의 상황은 순식간 비관적으로 바뀌었고 깊숙한 산중에서 야밤에 떼거리 몰려다니며 심리전을 구사하는 중공군의 전술에 유엔군은 풍비박산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고 아군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낯선 군대에 맞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며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중공군은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군에게 전혀 새로운 적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