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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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의 전쟁
단대호 1에서 알 수 있듯이 제1사단은 국군의 모든 사단 중에서 제일 먼저 창설된
사단입니다. 사단의 모체는 1947년 12월 1일 태릉의 제1연대(현 수도사단 예하), 청주의 제7연대(현 6사단 예하) 및
춘천의 제8연대(현 7사단 예하)를 기간으로 창설된 제1여단이었는데, 당시에 예하부대였던 1연대는 물론 1여단도 당연히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군이 거의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다보니 당연히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 창군 초기에 부대 이동은 극심하였습니다
(태릉에서 창설 된 1연대가 이동
주둔한 1948년 11월 삼각지) ]
1여단만 하더라도 창설직후 사령부가 남산동에 있었지만, 각 예하 연대가 사방팔방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부대 구성에 많은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에 미군이 38선 일대를 경비하였는데, 소수의 병력이 주요 도로에만 배치되어 있어서 경비가 전반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이틈을 타 문산
북쪽에서 북괴군의 국지적인 도발이 잦았습니다.
[ 주요 가도를 중심으로 38선을 경비하던 미군과 초소 ]
이때 초대 1여단장이었던 송호성(宋虎聲) 준장이 여단 창설 직후인 1948년 1월 보병 1개 중대를 38선에 파견하여 미군과 합동근무토록
조치하였습니다. 비록 일개 중대였지만 이때 처음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는데, 1사단이 창설이후 배치된 지역이 되었고,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곳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최초로 미군과 합동 근무를 한 것이 인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전쟁을 거치며 미군과 가장 인연이 많은 부대가
되었습니다.
[ 미군 고문단의 지도로 훈련을 받는 창군 초기의 모습 ]
1949년 5월, 미군 철수를 앞두고 기존 7개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때 제1, 2, 3, 5, 6, 7여단이 사단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는데, 1사단이 5월 1일에 사단으로 승격되었고 나머지부대들은 5월 12일 사단으로 승격되어 근소하게나마 1사단은 국군 최초의
사단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하 연대는 제11, 12, 13연대였는데, 수색에
사단사령부를 두고 문산 정면의 38도선 경비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 1949년 6월 1사단의 38선 관측소 ]
하지만 이미 사단 승격이전인 1948년 11월부터 11연대가 38도선 경비임무를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인수하였던 상태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38도선 경비는 주요 요지에 경비 초소만을 설치한 형태여서 도로 이외 지역으로 남북 간 통행이 자유로웠을 만큼
허술하였습니다. 따라서 진지 등이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아 요충지가 무방비로 비어있는 곳이 허다하였습니다.
[ 분단되었어도 남북 간의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
반면 38경비여단처럼 별도의 전담 경비부대를 창설한 북한은 38선 북측 요충지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따라서 1여단이 38선 경비를 담당하였을 떼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이에 대응하는 진지구축이었고 사단 승격이후에도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단 승격 후 담당하게 된 구역은 지리적으로 방어에 상당히
불리한 여건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38선 바로 아래 놓인 고도(古都) 개성은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 최근 폐쇄 된 개성 공단에서 바라본 송악산 일대 ]
개성은 남쪽으로는 임진강과 예성강까지 평평한 평야지대지만, 북쪽인 38선 일대는 거대한 고지군이 도시를 내려보고 있어 군사적으로 북한에게
절대 유리한 위치입니다. 따라서 개성을 감제할 수 있는 38선 북쪽일대 고지군에 대한 피아간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남북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충돌을 벌였고 일부는
거의 국지전 수준이었을 정도였습니다.
[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철군 행사의 모습 ]
남북을 군정통치 하던 미군과 소련군의 1949년 동시 철군은 그 동안 불안하게나마 이어져 내려오던 38선 일대의 조마조마한 평화가 완전히
끝나게 됨을 의미하기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이 툭하면 벌어졌는데
일부는 규모도 컸고 상당히 격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해방이후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덧 남북은 서로를 극도로
증오할 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