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3 ]

淸山에 2013. 7. 14. 13:06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3 ]

 

현실적인 방어계획

 

여단에서 사단으로 승격되고 난지 불과 4일 후에 개성 북쪽 38선일대의 송악산, 292고지, 유엔고지, 비둘기고지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충돌은 한국전쟁의 일부로 포함하여도 이의가 없을 만큼 격렬하였습니다.  그 절정이 1949년 5월 4일, 피탈 된 고지를 탈환하려 서부덕(徐富德) 상사를 포함한 10명의 용사들이 육탄으로 공격하여 장렬하게 자폭하면서 적들을 일거에 제압한 송악산 전투입니다.

 

3-1.jpg

[ 송악산 전투 기록화 ]

 

이 전투는 전진부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의미 있는 승리였고, 이후 1사단이 상승부대(常勝部隊)로 자리 잡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38선 일대에서 벌어진 수많은 교전 중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북괴군은 이후 전진부대를 상당히 버거워 하여 이곳으로 정면 돌파를 감행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서전 때문이었는지 이후 북괴군은 전쟁 내내 1사단에게 곤혹을 치렀습니다.

 

3-2.jpg

[ 낙동강 전선에서 생포된 북괴군 포로들
전쟁 내내 북괴군에게 전진부대는 넘기 힘든 벽이었습니다 ]

 

1950년 4월 22일, 전진부대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인물이 제5대 부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평양 인근의 강서출신이었는데 1942년 만군(滿軍)에 자원입대하여 중위로 복무하던 도중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와 조만식(曺晩植)의 비서로 잠시 근무하다가 월남하여 국군의 창설요원이 되었습니다.  바로 현존하는 한국전쟁의 산 증인인 백선엽(白善燁, 1920~) 입니다.

 

3-3.jpg

[ 5대 부대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사단장 ]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고 월남하였을 정도로 반공의식이 강한 인물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만군 복무 경력으로 인하여 과거사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현재도 이러한 과거를 문제 삼아 비판하는 부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점을 떠나 한국전쟁이라는 공간과 시간만 놓고 볼 때, 군 지휘관으로서 그 보다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찾기가 힘듭니다.

 

3-4.jpg

[ 전진부대를 방문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영접하는 백선엽 ]

 

전쟁 당시 지휘관으로써의 이러한 평가는 비단 우리 내부뿐만 아니라 함께 싸운 미군은 물론 곤혹을 당한 적에게서도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임 사단장으로 임명 된 백선엽은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사단 전 지역을 샅샅이 돌아보았습니다.  당시 1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은 청단에서 적성에 이르는 100킬로미터의 광정면이었는데, 사실 이러한 규모는 일개 사단의 방어 한계를 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3-5.jpg

[ 1사단의 방어지역은 무려 100킬로미터에 달하였습니다 ]

 

때문에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예하부대를 분산 배치한 상태는 미군이 38선을 경계하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구축되지 않았는데, 만일 이 상태로 적의 남침이 개시된다면 각 예하부대들이 순식간 고립되어 각개 격파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였습니다.  전부를 차지할 수 없으면 가장 중요한 일부만을 확실하게 사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3-6.JPG

[ 전쟁 발발 시 임진강 일대의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전선을 패폭 축소한 후 결사항전하기로 결심합니다 ]

 

적이 전면전을 개시한다면 임진강을 우회하는 고랑포부근으로 주공을 투입할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아군의 주저항선을 후방의 임진강선으로 전이한다면 전선을 약 5분의 1수준인 20여 킬로미터로 대폭 축소시키고 임진강이라는 장애물을 적극 이용하여 방어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문제는 유사시에 연백, 청단 등의 주요 지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상징성이 큰 개성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7.jpg

[ 개전 직전 채병덕 총참모장을 위시한 국군 수뇌부의 모습 ]

 

백선엽은 총참모장 채병덕에게 이러한 방어 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얻어내었지만 사실 육군본부에서 먼저 작성을 했어야 하는 것이 맞았습니다.  군사전략상 당연하였지만 많은 부분, 특히 개성을 즉시 포기한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육군본부는 눈치만 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은 달아야 하는데 문제는 고양이에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대장 쥐가 몸을 사리던 형국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