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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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비하다
1950년 6월 현재 1사단의 총 병력은 10,000명 내외였고 보유한 장비는 편제상으로 105밀리미터 곡사포 15문, 57밀리미터
대전차포 18문, 81밀리미터 박격포 36문, 60밀리미터 박격포 54문, 2.36인치 로켓포와 각종 기관총 43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00킬로미터의 38선을 경비하면서 유사시에 서울을 사수하여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에게 이 정도 무장은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수준이었습니다.
[ 미 군사고문단 참관하에 실시 된 57밀리미터 대전차포 훈련 모습 ]
하지만 그렇다고 여타 부대와 비교하여 적은 무장 수준도 아니었는데 그것은 신생 약소국의 군대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하여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육군본부 지시에 따라 약 30퍼센트 정도의 장비가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사이에 후방인 부평 육군기지창에서 정비하기 위해 입고 된 상황이어서 전쟁 발발 당시에 이러한 부족한 무장도 완전히 갖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침략자가 강하다는 점이었습니다.
[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창군 초기 국군의 모습 ]
사실 이런 불균형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개전 초에 갑자기 등장한 북괴군 탱크에 놀라 일방적으로 밀리며
도망만 다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북괴군 전력이 압도적이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 군비를 미국에게 수시로 지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소련과 달리 미국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남친 전 북괴군의 전력은 대폭 증강되었습니다 ]
국군의 수준이 국내 치안 유지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툭하면 북진을 외치자 무기 지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정부는 정치적인 수사(修辭)로 북진을 언급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허풍을 부린 것이었는데,
미국은 이를 너무 과대평가하였습니다. 결국 한국과 미국의 이런 정책적 오판은 개전 초에 고전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전쟁 직전 38선을 시찰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 특별 고문
수시로 군비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거부하였습니다 ]
1950년 봄은 전쟁 위험을 감지하고 경계태세가 수시로 발령, 해제를 반복하였을 만큼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1사단은 새로운 방어계획에 따른 방어선 구축에 들어갔는데, 병력이 부족하여 학생이나 민간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진부대는 3단계로
방어선을 보강하였는데, 38선 일대에 간헐적으로 구축된 제1방어선은 단지 경계선의 의미였고, 후방의 임진강-파평산을 연하는 선에 구축한
제2방어선이 주저항선이었습니다.
[ 1사단은 방어 예정지에 민간의 도움을 받아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
대대단위로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감제 고지마다 깊은 참호선을 구축하였고 유사시에 교량 등을 파괴하여 적의 남진을 차단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곳이 돌파당한다면 봉일천에서 문산에 이르는 곳을 제3방어선으로 하여 최후의 저항을 펼치려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1사단의 방어
계획은 상당히 합리적이었지만 시간과 물자가 부족하여 전쟁발발 전까지 계획대로 모든 것을 마칠 수
없었습니다.
[ 시간과 물자가 부족하여 전쟁 직전까지 방어선 구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반면 북괴군은 개성 가도과 문산 가도의 두개 축선을 이용하여 1사단 방어 지역을 좌우에서 신속히 돌파한 후 파주를 거쳐 서울로 진입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북괴군은 제1, 6사단과 40여대의 T-34 전차를 보유한
제203땅크연대를 투입하였는데 총 병력은 약 3만으로 1사단의 3배 정도였고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약 5배 정도의 우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 전차를 위시한 북괴군의 전력은 아군을 압도하였습니다 ]
북괴군은 개성을 6사단이 공격하는 동안 주공인 1사단이 203땅크연대의 도움을 받아 고랑포를 돌파하려 하였습니다. 전진부대는 개성을
처음부터 포기할 생각이었으므로 남북 양측의 단대번호 1번 사단들이 문산 가도를 놓고
정면충돌할 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악연은 이후 낙동강까지 계속 이어질 운명이었고 결론적으로 침략의 선봉이었던 북괴군
1사단에게 국군 1사단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