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6 ]

淸山에 2013. 7. 14. 12:59

**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6 ]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

 

장병들의 선전이 이어지자 백선엽은 현 전선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더불어 미군이 참전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6월 28일 08시를 기해 반격을 개시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과는 별개로 밤 사이에 우회 침투한 적의 기습으로 13연대가 담당하던 지역이 돌파되면서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습니다.  하지만 더욱 사기를 저하시키는 소식이 배후에서 들려왔습니다.

 

6-1.jpg

[ 13연대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

 

육군본부가 빠져 나온 후 한강교량이 폭파되었고 서울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급보였습니다.  그것은 1사단이 현지를 더 이상 사수할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백선엽은 부대를 시흥으로 철수시키기로 마음먹고 예하부대들에게 한강을 도하하여 남으로 내려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급한 한강교량  폭파로 말미암아 중장비의 대부분은 유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6-2.jpg

[ 북한 선전 영상에 촬영된 폭파 된 한강 인도교의 처참한 잔해 ]

 

그날 저녁부터 11연대가 이산포에서, 15연대가 행주나루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29일 아침까지 나머지 부대도 철수 할 수 있었습니다.  체계적인 도하 장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단지 나룻배에 의존하여 병력만 간신히 한강을 건너게 되었지만 이러한 위난의 시기에 대부분 편제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한강을 건너온 전진부대의 생존은 이후 서부전선의 국군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6-3.jpg

[ 행주나루에서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는 15연대의 모습 ]

 

개전 당시 서부전선에 투입된 아군은 제1, 2, 5, 7, 수도경비사령부(수도사단)였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 초반부터 소진되어 제1군단 창설 이후인 7월 말에 대대적으로 육군을 재편할 때 1사단과 수도사단을 제외하고 모두 해체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력을 그나마 보존한 1사단은 미군의 참전직전까지 서부전선을 막아낼 수 있었던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6-4.jpg

[ 1사단은 어려웠던 시기의 버팀목이었습니다 ]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전시에 잘 싸우기 위해서는 항상 부대의 건재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대는 사람과 장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소비 물자로 이루어진 유기체입니다.  그렇다 보니 서류상에 표시된 대로 항상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설령 정원대로 병력과 장비가 갖추어졌다하더라도 이들이 유사 시 오차 없이 작동할 수 있는지 또한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6-5.jpg

[ 1사단은 지금도 최고의 준비를 완료한 정예 부대입니다 ]

 

예를 들어 병사들이 집단으로 식중독에 걸렸다든지 아니면 보유한 장비에 고장이 발생하여 작동하지 못할 수 있는 개연성도 충분히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시에도 부대의 관리에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전시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고 특히 전황이 불리하여 일일이 챙길 틈도 없이 후퇴하는 시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당연히 패배가 있다면 부대의 건재를 유지하기는 몹시 힘들고 불가능하기까지 합니다.

 

6-6.jpg

[ 1949년 시가행진을 하는 국군의 모습 ]

 

그런 점에서 1사단은 한국전쟁 내내 단 한 번도 건재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을 받을 만한 부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대가 전쟁에 임하면서 승리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패배를 당하지 않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설령 후퇴는 있어도 패배가 없는 부대, 바로 그런 부대가 1사단이었습니다.

 

6-7.jpg

[ 후퇴 당시 수원에 집결한 1사단 장병들의 모습 ]

 

많은 병력이 소모되고 중화기를 망실한 상태여서 전력이 급감하였지만, 대부분이 한강을 건너와 시흥에 집결하는데 성공한 1사단은 경부가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지연전에 투입되었습니다.  7월초에 미군이 전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아직까지 북괴군의 의도대로 전쟁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군이나 유엔군의 지휘관, 그 어느 누구도 북괴군의 진격을 막기를 희망하였지만 아직까지 현실적인 방법은 없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