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9 ]

淸山에 2013. 7. 14. 12:49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9 ]

 

감격, 좌절 그리고 후퇴

 

바로 이때 북괴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를 완벽하게 폭파시켜 도하 지체가 불가피해 보였고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려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어릴 적에 물놀이를 하였던 사단장 백선엽에게는 눈감고도 훤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도섭지점을 찾아 1사단의 급속도하를 감행하여 미군보다 하루 빠른 19일 밤, 제15연대가 본평양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로써 1사단은 예하 12연대가 동평양을, 15연대가 본평양을 제일 먼저 점령하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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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의 모습 ]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은 '전진'이라는 영광스러운 휘호를 내렸고 이후부터 국군 1사단은 '전진부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양의 점령이 전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전진을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1사단은 평양 선점의 영광을 오래 음미할 틈도 없이 운산을 점령하려 북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한만국경으로 향한 경쟁에서 가장 앞서던 부대는 초산으로 진격 중인 국군 2군단 예하 6사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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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을 향한 진격에서 6사단이 가장 앞서고 있었습니다 ]

 

한국전쟁 발발이후 현재까지 1사단과 6사단은 불패를 자랑하던 국군의 자부심이었는데, 이들의 멋진 활약으로 이제 통일은 눈앞에 다가와 보였습니다.  하지만 10월 25일 등장한 새로운 적으로 인하여 진격이 멈추면서 북진은 그것으로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6사단은 초산에서 붕괴되는 타격을 입었고, 운산에서 수풍호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한 1사단도 오전 11시경, 38선 돌파 후 가장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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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이 등장하면서 전쟁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엔군 지휘부는 중공군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였고 지금까지의 북진 방법을 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사단이 곤경에 빠진 틈을 타서 밀번(Frank W. Milburn) 미 1군단장은 11월 2일, 예하 미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1사단을 초월하여 공격의 선두에 서라는 지시하였을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국군의 우려와 달리 아직 유엔군, 특히 미군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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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 도중 예하 부대를 격려하는 맥아더, 워커, 밀번 ]

 

하지만 그러한 오판은 운산 우전방의 1사단 15연대가 중공군에게 우회 돌파당하면서 미 1기병사단 예하 8기병연대가 적진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예하 1개 대대가 탈출하지 못하고 포위망 안에 갇혀 전멸하는 참담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이로써 북진의 달콤함이 불과 한 달도 못되어 끝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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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에게 생포 된 미 1기병사단 장병들 ]

 

그리고 11월 24일, 아군은 청천강을 다시 건너 뒤로 돌아 38선을 향한 후퇴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패한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아서 이를 철수라고 이야기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엄연히 중공군에 놀라 도망가던 중이었습니다.  1사단도 지금까지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38선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감격 속에 점령한 평양도 미련 없이 적에게 내주었고 엄동설한에 남으로 남으로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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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교를 건너 평양에서 빠져 나오는 1사단 ]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굴욕적인 후퇴는 1951년 1월 4일 다시 한 번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가서야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어둠과 같은 이러한 암울한 상황은 의외의 곳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아군을 곤혹스럽게 만든 중공군의 패턴을 분석하여 그들의 약점을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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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4일 서울로 입성하는 중공군 ]

 

지금까지 산전수전 모두 경험하였던 미군조차 너무 낯설어서 신비롭게 조차 보였던 중공군의 이상한 전술행태, 그 자체가 바로 약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급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공세를 일주일이상 계속할 수 없었고 다시 공세에 나서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또한 아군이 화력에서 중공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인해전술을 결코 두려워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