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10 ]

淸山에 2013. 7. 14. 12:46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10 ]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다

 

이제 지난 두 달 간의 굴욕적인 후퇴를 멈추고 아군은 다시 38선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신중하게 전선을 밀어붙였고 마침내 한강에까지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반격의 선봉을 자임한 1사단은 중공군을 격파하고 안양을 거쳐 2월 10월이 되었을 때 영등포~양평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제 강 건너에는 탈환한지 석 달 만에 다시 적에게 내준 서울이 있었습니다.

 

10-1.jpg

[ 영등포 일대에서 강 건너를 관측하는 1사단 장병 ]

 

신중한 리지웨이는 섣불리 강을 건너는 것보다 주변을 차단하여 적을 고립시켜 서울에서 자연스럽게 몰아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서울 측방의 확보 없이 단지 도심만 차지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중한 대치 끝에 중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이 패퇴하자 3월 12일부터 중공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0-2.jpg

[ 부대를 방문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서울 재탈환 계획을 설명하는 백선엽 사단장 ]

 

3월 14일 정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도심을 살펴 본 결과 적이 완전히 서울을 포기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음날 05시 30분, 서울 재탈환의 임무를 부여받은 1사단 15연대가 대대별로 LVT를 이용하여 마포방면으로 도하하는 것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서울 진입이 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16일 아침, 연대 전체가 도하를 완료하여 서울시내 전역을 장악하면서 전진부대 역사에 또 하나의 찬란한 기록을 새겼습니다.

 

10-3.jpg

[ LVT를 이용하여 마포에 상륙한 1사단 15연대 ]

 

그러나 서울을 재탈환하였지만 여기가 종점은 아니었고 전진부대는 38선을 향한 쉼 없는 전진을 계속하여야 했습니다.  회고하여 보면 중공군이 지난 세 차례의 공세로 전세를 뒤집고 국군과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밀어붙였던 때까지만 해도 아군은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유엔군의 휴전 제의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을 정도로 중공군은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였었습니다.

 

10-4.jpg

[ 고지를 점령한 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1사단 장병들 ]

 

하지만 2월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4차공세가 좌절되고 아군의 반격이 개시되면서 중공군이 서울에서 물러나게 되자 반대로 이번에는 그들이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이 인해전술로 결코 돌파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임을 깨닫고 국군 담당 지역으로 돌파를 시도하였습니다.  바로 1951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연이어 벌어져 흔히 춘계대공세로도 알려진 피로 얼룩진 중공군의 제5, 6차공세였습니다.

 

10-5.jpg

[ 춘계대공세 당시 중공군은 화력이 약한 국군 담당지역으로 돌파를 시도하였습니다 ]

 

비록 이들 공세도 실패로 막을 내리면서 중국도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거두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이 당시에 중동부를 담당하던 수많은 국군부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1951년 5월, 국군 6사단의 용문산 전투이후 이런 불신감은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중공군의 연이은 춘계공세 당시에 연이어 무너진 국군 담당 지역을 시급히 메웠던 것은 유엔군들이었습니다.

 

10-6.jpg

[ 사창리 전투에서 국군의 붕괴를 가평에서 막아 준 영연방 참전 용사들 ]

 

특히 전투에 패해 타격을 입었던 것이 아니라 사창리 전투, 현리 전투처럼 중공군에 놀라 도망가다가 스스로 참담하게 몰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유엔군, 특히 미군들이 국군에 대해 갖는 불신감이 대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국군 역사의 굴욕시기에도 전진부대는 유일하게 자부심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미 1군단의 선봉으로 맹활약하였습니다.  이처럼 불패의 상승부대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감은 대단하였습니다.

 

10-7.jpg

[ 1사단은 전쟁 전 그들이 담당하였던 임진강까지 다시 다가갔습니다 ]

 

서울을 회복한 1사단은 4월이 되었을 때 점진적으로 앞으로 내달려 그들이 전쟁 발발이전에 담당하였던 임진강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더 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진부대의 전투력이 갑자기 감퇴되거나 적이 엄청나게 강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사단은 전투를 할 수 있었지만 전쟁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쟁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