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8 ]

淸山에 2013. 7. 14. 12:51

 

 

 

 

 

후퇴는 있어도 패배는 없다 [ 8 ]

 

반격의 선봉장이 되다

 

1사단의 분투 결과 8월 21일을 기점으로 다부동의 상황은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습니다.  초조해진 북괴군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마지막 남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그날 밤 대규모 야간 역습을 감행했지만 배속된 미 27연대 전차중대가 맞대응하며 이를 막아내었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이 되었을 때 북괴군이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면서 개전 이래 지속되어 온 적의 공세가 드디어 멈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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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파를 시도하다 격파된 북괴군 T-34 전차와 Su-76 자주포 ]

 

8월 공세동안 북괴군은 3만 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을 만큼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국군과 유엔군도 1만 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다부동 전투는 피아가 뿌린 엄청난 피로 얼룩진 지옥의 격전이어서 흔히 이를 '동양의 베르덩(Verdun) 전투'라고 부릅니다.  8월의 최대 위기였던 다부동에서의 공방전은 이처럼 1사단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대구, 더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 전체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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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전선에서 노획된 북괴군 장비 ]

 

이 전투에서 미 27연대를 예하 부대로 지원받아 협동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보여준 1사단의 용전은 그 동안 국군의 전투력을 불신하던 미군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이는 국군의 위상 제고와 함께, 차후 작전에서 한미의 협동 및 연합 작전에 기여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미 1군단은 전진부대의 전투력에 매료되어 전쟁 중 상당 기간 동안 주력 예하부대로 편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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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번 미 1군단장과 작전을 숙의 중인 백선엽 사단장
1사단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한 미군은 미 1군단에 편입하여 작전을 펼쳤다 ]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 8군의 반격이 개시되었으나 생각처럼 아군의 돌파는 쉽지 않았습니다.  공세를 막았지만 아직 주도권을 뺏은 상태가 아니어서 경부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할 선봉부대로 내정 된 미 1기병사단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북괴군은 일선 사단장까지도 아군의 인천상륙 사실을 알지 못하여 계속 낙동강에만 몰입되어 발악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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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비치로 명명 된 인천역 뒷편 제방으로 상륙하는 미 해병 1사단 ]

 

이처럼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자 미 8군사령관 워커의 근심은 커져갔고 맥아더도 군산에 추가적인 상륙작전 준비를 고려했을 만큼 초조해 하였습니다.  자칫하면 인천에 상륙한 미 10군단이 경인지역에 고립될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될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때 1사단이 북괴군 방어 지역을 공격하던 중 가산산성(架山山城) 우측 계곡이 텅텅 비어있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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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사단이 마침내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

 

전진부대는 지체 없이 이곳으로 신속 돌파를 감행하여 9월 19일 기습적으로 갈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은 낙동강의 방어전이 완전히 끝나고 공세가 개시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뫼가 아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구 공격에 투입되어 있던 북괴군 1, 3, 13사단의 동측이 일거에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낙동강가의 북괴군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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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가에 몰려 있던 북괴군이 일거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

 

그리고 9월 22일이 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의 모든 부대들은 낙동강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10월초가 되었을 때 아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한국전쟁은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최우선 목표가 되었고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내정된 부대는 미 1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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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진입을 준비 중인 1사단 ]

 

미 1군단의 쌍두마차는 미 1기병사단과 1사단이었습니다.  조공인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미 1기병사단보다 이틀 늦은 10월 11일에서야 38선을 넘을 수 있었지만, 그 후 밤낮없이 행군을 계속하여 시변리, 신계, 수안, 율리를 거쳐 10월 19일 대동강 동쪽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11시, 12연대가 대동교 동쪽 100미터지점에 있는 동(東)평양의 선교리에 진출하였고 이제 대동강만 건너면 본(本)평양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