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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맘룩 시대

淸山에 2013. 6. 6. 21:40

 

 

 

 

 

 

 

제4장 맘룩 시대

 

 

예루살렘의 군주가 1250년에 또다시 바뀌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기독교인의 손으로 되돌아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아파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을 아유비드의 종이자 노예라고 부르는 이들이 장악한 것이다. 알 - 말리크 알 - 나시르 무함마드가 이끄는 그들은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군사 봉건 제도의 정권을 이룩한 자들이었다.

 

 

 

맘룩 시대의 전투용 도끼의 표본

 

아유비드는 투르크를 신병(新兵)으로 삼고 전투에 나갔다. 그들을 군인 - 노예, 즉 맘룩(mamluks)이라 불렀는데, 문자적으로는 소유물, 즉 종(從)이라는 뜻이다. 맘룩은 탁월한 일류 전사들이었으며 '당대의 군사 귀족'이었다. 맘룩은 군인 계급을 탄생시키고 길렀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를 군사화하거나 무슬림을 청교도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행동하였고, 무슬림처럼 생각하였다.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슬림처럼 행동하였다.

살라딘의 후계자들과 아유브(Ayyub)의 아들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다. 정치적 재능이 별로 없던 그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나마 그들을 지탱시킨 것은 분열된 십자군과 용병들이었다. 그러나 1250년 아유비드의 왕자 투란 - 샤흐(Turan - Shah)가 나일 델타 동쪽 만수라에서 엘리트 출신의 바흐리야(Bahriyya) 대대의 토후에게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뒤를 이을 만한 영향력 있는 법적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왕자의 살해는 쿠데타를 위한 길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유능하고 야망이 넘치는 맘룩의 혁명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갔다.

이집트의 술탄은 계속되는 몽고의 침략으로 약화된 시리아의 군사력과 정치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이득을 챙겼다. 전문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이집트의 맘룩은 결코 살라딘을 낳지 않았으나 그들의 성취는 그 이상이었다. 1258년, 500년 동안이나 칼리프의 왕권이 유지되던 바그다드가 몽고에 의해 점령된 것은 이슬람의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일이었다. 카이로의 방어선은 시리아 북쪽이었다. 마침내 맘룩은 1260년 갈릴리 아윤 잘루트(Ayn Jalut) 전투에서 무적의 몽고에 맞서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1291년 악고를 점령하고 성지에서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 냈다.

이집트의 맘룩 술탄은, 약 200년간 성지에 머물던 프랑크의 십자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정복하고 약 250년 가까이 통치하였다. 술탄이 거주하는 곳은 카이로에 있었고 행정 및 종교의 수도 역시 카이로였으며, 예루살렘의 정치적 지위는 7개의 분구(分區)의 수도 - 다마스쿠스, 알레포, 하마, 트리폴리, 사페드, 가자, 케락 - 에도 들지 못할 만큼 작은 구역 중 하나에 불과하였으며, 다마스쿠스의 행정관이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군사 엘리트가 다스린 맘룩 정부는 여러 계급의 행정 관료들이 각각의 지위에 따라 각 지역을 통치하였다. 예루살렘에는 하급 장교가 근무했는데,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성벽 없는 도시가 되었다.

맘룩이 이집트에서의 권력다툼과 몽고로부터의 시리아 방어 등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팔레스타인은 침체기를 맞게 되며, 이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으로 가장 심한 쇠퇴기를 겪게 된다. 특히,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1260년, 맘룩에 의해 다마스쿠스가 정복되면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나사렛 교회가 파괴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박해는 알 - 말리크 알 - 아슈라프 칼릴(1290∼1293년)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맘룩은 처음부터 기독교와 대항하여 싸우는 '성전(Holy War)'을 일으켜 이집트의 기독교인 콥트 교회(Coptic)를 박해하였으며, 이는 차츰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적대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맘룩 제1왕조인 바흐리스(1250∼1381)와 제2왕조인 시르카시아인(1381∼1517)의 통치하에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 있는 모든 교회와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맘룩 정부는 기독교인에게는 파란 터번(무슬림이 머리에 감는 두건)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번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번을 각각 쓰게 하였다. 1354년에는 강제로 개종을 명령하였으며, 비이슬람교도는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 밖에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말을 타거나 공중 목욕탕에 출입하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 등의 경우 거의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가자와 람레 및 나블루스(세겜) 등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중산층 유대인은 몰락하여 갔으며, 유대인의 경제적 수준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정치 · 경제적 지위와는 달리 종교적 중요성은 여전하였다. 맘룩 시대에도 기독교인과 유대인 순례자들의 행렬이 여전히 예루살렘에 떼를 지어 이어졌다. 순례의 어려움은 갈수록 커졌다. 1488년에 예루살렘에 순례 온 랍비 오바디야(Obadiah of Bartenura)는 "예루살렘은 거의 황폐해 있고, 방어할 만한 성벽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4000명도 안 되는 주민이 자기 집에서 살았으며, 유대인 가족은 오직 70명뿐이었으나 그나마 비참하게 가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의 도시로서 예루살렘에는 건축물이 새로 들어섰다. 술탄 바이바르스(Baybars, 1260~1277)는 바위 돔의 팔각 벽면에 모자이크를 새로 입히고, 사슬의 돔에 기도소(mihrab)를 설치하였다. 무함마드 칼라운(Nasir Muhammad b. Qalaun, 1309~1340)은 엘 악사 사원과 바위 돔에 금을 새로 입히고, 하람의 북서쪽에 형형색색의 멋진 건물을 지었다. 붉은색과 흰색은 맘룩 시대 건축의 대표적인 특색을 이루었다.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인 이 건물은 마드라사(madrasas), 즉 대학으로 사용하였다.

이 시대 예루살렘의 종교적 명성은 무슬림 아카데미, 즉 마드라사라 일컫는 학교가 가져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30개가 넘는 학교는 대부분 기부금(waqf)으로 운영되었다. 안토니아 성채 구역에 세운 자우리야 대학(Madrasa Jauliyeh)과 성전산 서쪽에 세운 아르군이야 대학(Madrasa Arghuniyeh)은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학교였다. 1329년 다마스쿠스의 통치자 에미르 탄키즈(Emir Tankiz of Damascus)는 지금의 통곡의 벽 윌슨의 아치 위쪽에 탄키지야 대학(Madrasa Tankiziyeh)을 세웠다. 출입문을 조개 껍데기로 장식한 이층 구조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터키 시대 중요 관공서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 십자군이 세운 성 안나 교회가 마드라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맘룩 시대 예루살렘의 거리는 슈크(suqs), 즉 시장(市場)으로 넘쳤다. 특히 로마 시대의 카르도 주변은 물론 욥바 문에서 하람에 이르는 쭉 뻗은 다윗거리(David Street)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1336년 탄키즈는 바위 사원 서쪽 편에 무함마드 게이트(Gate of Muhammed, Bab el - Qattanin '목화문')를 세웠는데, 중세 면화상(棉花商)의 시장(市場)으로 통하였다. 성문에 사용한 깍은 돌들은 성전산 지역의 고대 성벽이나 건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목화상의 시장에 관해 1496년 중세 이슬람의 최고 역사가 무지르 알 - 딘(Mujir al - Din)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예루살렘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여러 개의 시장이 있는데, 그중 하람의 서쪽 성문 근처에 있는 면화상의 시장은 주목할 만하다. 시장은 견실하고 최고이다. 다른 도시에서 이에 견줄만 한 곳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시 서쪽 문 혹은 알 - 칼릴 문 근처에 서로 붙어 있는 세 개의 슈크는 그 건축물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 서쪽에 있는 첫째 번 바자르(bazaar)는 약제상으로 수입은 살라히야 대학(Madrasa Salahiyya)에 기부된다. 다음 중간 바자르는 야채상이며, 동쪽에 있는 바자르는 직물상으로 사용된다. 나중 두 개의 바자르 수익금은 엘 악사 모스크의 유지비로 기부된다.

맘룩 시대 예루살렘의 무슬림은 여전히 소수 공동체였다. 주로 도시의 남쪽과 하람의 서쪽, 즉 마흐라비(Maghrebi) 구역에 거주하였다. 살라딘의 통치 기간에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들이 많았다. 북동쪽에는 페르시아의 부크하라(Bukhara)와 사마르칸(Samarkand)으로부터 온 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는 13세기 몽고의 침략과 더불어 따라 들어온 인도인, 아프가니스탄인 등도 섞여 있었다.

십자군의 쇠락 이전까지만 해도 번영하던 독일, 프랑스, 헝가리, 영국 등 여러 유럽 국가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인들은 감소했으며, 이들은 주로 성묘 교회 주변에 모여 살았다. 또, 술탄 바이바르스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도시로 만드는 과정에서 성묘 교회로 들어오는 기독교 사제들을 살해하고 십자가 교회를 파괴하는 등 갈등이 적지 않았다. 1365년 기독교 함대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자 무슬림은 성묘 교회를 닫아 버렸다. 시온 산의 최후의 만찬소(Cenaculum)의 위층 방을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래층의 다윗 왕의 무덤을 구매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간에는 갈등이 커졌다. 갈등에 개입한 맘룩 당국은 전 구역을 모스크로 바꿔 버렸다.

맘룩 시대의 유대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된 이후 유대인의 인구는 조금씩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던 소수의 유대인들은 통치자의 보호 대상일 정도였다. 유대인의 거주지는 주로 윗도시(upper city)로써 예루살렘을 향한 자극을 촉진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1267년 예루살렘으로 이민 온 랍비 모세 벤 나흐만(Rabbi Moses ben Nahman)은 황폐한 도시를 되살리려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는 십자군이 버리고 간 건물을 재활용하여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중세 회당을 건설하였고, 탈무드 시대 이래 중요하게 여겨지던 성전 서쪽 성벽, 곧 지금의 통곡의 벽을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로 추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