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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슬람 시대

淸山에 2013. 6. 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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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슬람 시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무함마드(570∼632 C.E.)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은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바빌로니아로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1099년 십자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움마야드(Umayyad, 661∼750), 압바시드(Abbasid, 750∼974), 그리고 파티미드(Fatimid, 975∼1171)로 이어지는 제국의 통치를 이어나갔다. 이슬람의 등장은 유대인과 기독교인과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이슬람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 - 유대교의 토라와 이슬람의 쿠란 -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상당한 접촉이 있어 왔다. 특히, 아랍인들과는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무슬림의 경전인 쿠란은 유대교의 여러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고, 그들의 신이 '유일한 알라(Allah)'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Umma, 믿는 자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키르벳 엘마피엘 궁에서 나온 여인상(움마야드 시대)

 


638년, 예루살렘을 무혈 정복한 '작고 검은 남자' 칼리프 오마르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의 안내로 예수의 무덤 교회로 들어갔다. 그러나 칼리프는 기독교 교회를 빼앗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대한 무슬림의 존경심은 정복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이슬람이 그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메카와 메디나에 살던 유대인들을 통해 이 도시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 '예언자'의 가르침은 유대인의 성서 전통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691년 칼리프 압바드 알 - 말리크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터에 8각형의 쿠바트 아스 - 샤크라(Qubbat as - Sakhra), 일명 바위 사원을 지었다. 이 곳은 유대인의 성전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오물과 쓰레기로 덮여 있던 곳이었다. 칼리프는 이 곳에 거대한 모스크를 건설함으로써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하였던 이슬람의 지위를 드높이고자 하였으며, 무슬림들이야말로 완전한 아브라함의 상속자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람 에쉬 - 샤리프(Haram esh - Sharif, 성전산)의 걸작품은 710년에 세워진 엘 - 악사 사원이다. 첫 번째 사원은 알 - 말리크의 아들 칼리프 알 - 왈리드가 세웠다. 가로 82m, 세로 55m의 거대한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756년과 780년 두 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780년 압바시드 왕조의 칼리프 알 - 마흐디가 15개의 측랑과 280개의 주랑을 가진 사원으로 재건하였다. 이제 명실공히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와 더불어 이슬람의 3대 성도(聖都)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마르의 아량과 관용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의 통치자 무아비야(Muawiya, 661~750년)로 이어져 초기 아랍 왕조 시대 내내 대체로 유지되었다. 다마스쿠스가 수도였으나 예루살렘 역시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당시 무슬림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공동체에 비해 소수였으며, 행정에 있어서 기독교 행정 관료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불필요한 충돌이나 사고를 피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세력이 점차 커져 가고 개종자가 증가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배교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712년, 이슬람 제국이 동쪽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피레네의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흩어진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통치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대인들은 차별을 받기 시작하였다. 유대인의 거주 · 이전의 자유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으며, 상업 활동도 역시 크게 제약을 받았다. 나아가 새로운 아랍 문화는 유대인들의 언어 생활 및 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아랍어가 유대인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완전히 대체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세기의 유대 종교 사상은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었다.

 

 

이슬람 시대의 주요 유대인 정착지

 

이 시기의 유대교는 이성주의적 종교 · 문화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플라톤적, 신플라톤적 이성주의가 다양한 유대교의 사상을 설명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 해석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와 종교 학교(yeshivot)를 세우고 가르친 사디아 가온(882~942)은 합리주의 종교 사상을 세워 나갔다. 그는 그리스 철학과 아랍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앙과 견해에 관하여』라는 책을 아랍어로 출판하면서, 이 시대의 유대인의 사상적 경향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지성을 모세법과 동등한 가치와 지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서, 지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모세법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으로, 이 전통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경험이나 행동에 근거하여 선택된 것이므로 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교의 또 다른 종교 사상은 카라이트(Karaites, '소명자', '선전가')라 불리는 사람들로서, 유대 지도력에 반발하면서 탈무드의 전통을 거부하고 나선 베냐민 벤 모세 알 나하벤디(c. 830~860)로부터 부흥되었다. 이들은 유대인과 토라 사이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접촉을 무시하는 전통을 비난하면서, "스스로 토라에서 샘을 찾아라. 그리고 선생들의 의견에 의존하지 마라."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0세기의 합리적인 개인주의의 발달로 개인의 이성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다른 어떠한 권위도 부인하는 사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겨진다.

 

 

키르벳 엘마피엘 궁의 창문 조각품(움마야드 시대)

 

이 종교 사상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퍼져 나갔으며, 특히 이 종파는 10세기의 예루살렘에서 금욕적이고 개인적이며 합리적인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장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면서도 성전의 회복을 위해 갈망하던 집단임을 잘 나타내 보이는 칭호라 하겠다.

 

750년 칼리프 자리를 놓고 자브 강가에서 벌인 격전에서 움마야드(무함마드의 사위 무아비야의 후손)가 패퇴하고, 압바시드(무함마드의 삼촌 압바스의 후손)가 새로운 왕조를 이끌었다. 아라비아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바그다드가 다마스쿠스의 뒤를 이어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압바시드 왕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들답게 이슬람 문명을 절정으로 이끌어 올렸다. 8~9세기 도상(圖像) 논쟁으로 분열된 비잔티움은 더 이상 이슬람의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 상황은 예루살렘의 역사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최초의 압바시드 왕조의 칼리프 알 - 만수르(al - Masur, 754~775)와 알 - 마흐디(al - Mahdi, 775~785)가 성지를 방문하였다. 종교적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앞선 여행이었다. 이후 칼리프는 더 이상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메카를 방문하는 것은 견실하게 계속되었다. 이전 움마야드의 심장이었던 예루살렘에 대한 압바시드의 정치적 계획은 없었다.

 

그즈음 400여 년 이상 갈라지고 찢긴 서방에도 새로운 세력이 일어났다. 교황 스데반 2세는 프랑크의 추장 페핀(Pepin, 751~768)에게 가서 자신을 성직에 임명해 준 롬바르드(Bombard) 왕국으로부터 자기를 구해 달라고 청하였다. 751년 페핀은 롬바르드 왕조의 실드리크 3세를 폐위시키고, 768년에는 샤를마뉴로 알려진 페핀의 아들 샤를이 프랑크의 새 추장이 되었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 대제(742~814년)는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을 결합한 새로운 교황 국가를 세움으로써 서로마 제국을 세웠다. 그는 동방에 있는 여러 세력과 동맹을 맺고, 권력 유지에 실패한 여러 세력을 지원하였다. 샤를마뉴는 그의 왕국을 최대한 봉건 제도화하였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자신과 코르도바의 칼리프 사이의 투쟁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 동방 기독교인들이 그를 돕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그리고 조정에 필요한 적당한 이유를 찾아 주었다. 그 후 즉시 샤를마뉴 대제는 페핀의 정치적인 정책을 소생시켜 칼리프 알 - 만수르와 대사관을 교환하였다. 797년 그는 알 - 만수르의 뒤를 이어 칼리프가 된 하룬 알 - 라시드(Harun - al - Rachid, 786~809)의 왕실에 두 명의 신하를 파견하고, 예루살렘의 대교구로부터 유골을 가져오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유골을 받은 샤를마뉴 대제는 선물을 받은 대가로 사제 스가랴를 성도 예루살렘에 보내 보시(布施)하였다.

 

800년 11월 30일, 서로마 제국의 황제 대관식 한 달 전에 스가랴는 두 명의 수사를 동반하고 귀국해서 대주교 그레고리를 대신하여 왕에게 은총의 표시로 주님의 무덤과 갈보리의 열쇠를 드리며 "이는 또한 도시와 산의 열쇠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충성스러운 행동으로 샤를마뉴 대제는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권력을 전적으로 승인하였다. 807년 칼리프가 보낸 대사가 엑스 라 샤펠에 도착하였다. 샤를마뉴의 행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동기에 의한 것으로써 그에게 둘은 곧 하나였다. 그의 최종 목표는 예루살렘에 라틴의 토대를 놓는 것이었다.

 

샤를마뉴의 외교적 조정으로 예루살렘에 여러 라틴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제들과 수사들이 봉사하도록 허가되었다. 올리브 산의 대성당과 아겔다마에 세워진 교회는 이때 세워진 것이었다. 또, 성묘 교회의 남쪽에 '라틴' 울타리를 세우고 지진으로 파괴되어 있던 성 마리아 교회와 도서관과 시장을 성 내로 끌어들여 교회에 고정 수입을 올리게 해 주었다. 810년에는 총대주교 토마스에게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의 돔을 수리하도록 허가했으며, 샤를마뉴 대제는 여러 개의 수도원을 짓도록 팔레스타인에 큰 돈을 보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카롤링거 왕조(751~987)의 사람들이 연대를 깨뜨리고, 봉건 세계를 무정부 상태로 이끌고 갔다. 예루살렘은 고립되고, 935년 알 오마리에(al - Omariyeh) 모스크가 성묘 교회 안마당에 세워졌다. 967년 무슬림과 유대인이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에 불을 지르고 총대주교 요한을 화형에 처하였다. 얼마 후, 비잔티움 제국이 예루살렘을 돕기를 희망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867년 이래 마케도니아 왕조하에서 급속도로 힘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북쪽으로부터 불가리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920년에 소아시아의 재점령이 마무리되자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어떤 위협도 받지 않았다.

 

969년 칼리프를 거부하는 새 무슬림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티미드 왕조(Fatimid, 969~1171)를 세운 후, 이듬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치러 올라왔다. 힘으로는 압바시드 칼리프를 물리칠 수 없었으나, 압바시드 왕조의 무너진 행정과 엉성한 질서로 말미암아 쉽게 예루살렘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도시였다 하더라도 압바시드 통치 기간에 기독교는 자치 공국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권력이 파티미드 왕조에게로 돌아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969년 니케포루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가 안디옥을 탈환하고, 975년 요한 지미스케스(John Zimisces)가 이슬람 군대와 맞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를 점령하였다. "기독교인의 칼이 큰 낫처럼 적을 베어 냈다." 급기야 비잔티움 군대가 나사렛에 들어왔고, 가이사랴를 포위하였다. "무슬림의 굴종으로부터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976년 1월 10일 거대한 출정을 앞두고 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무슬림은 갑작스러운 비잔티움의 반격으로 충격에 빠졌다. 카이로의 칼리프는 서투르게 방어되던 예루살렘의 성벽을 축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까지 오펠(Ophel)과 실로암이 대대로 성벽 안에 놓여져 있었으나 성은 자꾸만 축소되면서, 985년 다윗 이래 최초의 예루살렘인 남쪽이 배제된 채 성벽이 구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세기의 "예루살렘은 메카보다는 작았지만 메디나보다는 컸다."

 

파타미드 왕조가 지배하는 예루살렘에서는 이집트의 수니(Sunni) 무슬림과 페르시아의 시아(Shi'ite) 무슬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유대교 내에서는 라반파(Rabbanite)와 카라이트(Karaites) 사이의 오래 된 적대감이 되살아났다. 알 하킴 비 - 아마르 일라(Al Hakim bi - Amr Illah, 996~1021)가 칼리프가 되면서 이전의 통치가로부터 누리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는 더 이상 없었다. 훗날 그의 이름은 속담이 될 정도로 그의 악명은 높았다. 1008년 칼리프는 종려 주일의 종려 행진을 금지하였고, 1009년 성묘 교회를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다. 무슬림들은 아예 이 교회를 '똥더미 교회(Kanisat al - Qumama)'라 불렀다.

 

그리스도의 무덤은 사라지고 바위의 기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032년 콘스탄틴 IX 모노마쿠스(Constantine IX Monomachus) 황제의 취임 이후 건축물은 합의에 따라 비잔티움의 재정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는 재건되었고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1034년 지진은 마지막 흔적마저 빼앗아 갔다. 1048년 갈보리 자리에 작은 건물이 들어섰으나 거대한 바실리카, 즉 순교자 기념 성당(Martyrium)은 복구되지 못하였다.

 

기독교도의 순례는 카롤링거 시대 이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랐다. 해적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 게르만, 헝가리, 비잔티움 제국, 이탈리아, 그리스를 통과해서 길고 험난한 육로로 여행하기도 하였다. 평신도와 주요 인사의 수가 증가하고, 순례자들은 경건한 신앙심에 영감을 받아 죄를 회개하였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에 올라와 수도원에 불을 지름으로써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였다. 어떤 이는 신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자 아내와 이혼하였다. 대부분이 이방인 출신인 서구인들의 이런 신앙은 매우 강해서 성지 순례를 네 번씩이나 한 앙주(Anjou) 왕가의 흑인 풀케(Fulke)는 자주 그런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노르망디 공국의 로버트는 귀국길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50년대는 평화롭게 지나갔다. 새로운 위협이 시작된 것은 전사 백성 셀주크 투르크(Seljuq Turks)가 동방에서 이슬람의 새로운 정치적 지도력을 확보하면서부터였다. 약화된 압바시드와 이단으로 간주된 파티미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아랍 세력은 급속도로 셀주크 투르크의 토그릴베그(Toghrilbeg),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63-1072), 말리크샤아(Malikshah)의 수중에 떨어졌다.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의 휘하의 비잔티움 군대가 만지키에르트(Mantzikiert)에서 투르크 군대에 대패를 당하고, 1078년 무슬림은 니케아에 다시 진을 쳤다.

 

1077년 예루살렘은 투르크의 손에 떨어졌다. 다시는 움마야드의 자유로운 지배 같은 시절은 오지 않았다. 권력은 차갑고 잔인한 통치자의 손에 넘어갔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뚝 끊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서쪽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서쪽의 라틴 공동체는 더 이상 10세기의 무질서한 봉건 시대가 아니었으며, 교황권은 40년 동안 개혁되어 갔다.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의 통치하에서 당대의 왕에 대한 도덕적 권위는 통치가 가능할 만큼 충분히 힘을 발휘하였다. 스페인과 게르만과의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을 하지는 못했으나, 우르반 2세(1088-1099)가 교황이 되자 그는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소집하고 기독교 세계 전체에게 성지의 회복을 위한 그의 원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십자군이 소집된 것이다. 1099년 십자군은 이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포학한 학살을 자행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도시에는 시체와 피가 가득하였다.